재판 소원 급피치…학계, 속도전 우려

김용민 의원 재판소원법 대표발의
독일·스페인, 헌재 사건이 대다수
오스트리아·이탈리아, 제도 없어
헌법학계 단계적 도입 등 신중론


더불어민주당이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재판 소원’ 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헌법학계는 환영하면서도 헌법재판소의 업무 과중에 대한 우려도 함께 지적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더불어민주당이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재판 소원’ 제도 도입을 추진하면서 논쟁에 불이 붙고 있다. 헌법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재판 소원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우세했지만, ‘대법원 길들이기’ 목적으로 재판 소원이 추진되면 기본권 보장이라는 제도의 취지가 퇴색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6일 법조계, 헌법학계 등에 따르면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4일 헌법재판소법 일부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법원 재판이 헌재 결정을 위반할 경우와 법원 재판이 헌법·법률이 정한 절차를 위반할 경우 재판에 대한 헌법 소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골자다. 헌재 업무량 증가에 대비해 헌법연구관 정년을 현행 60세에서 65세로 상향하는 내용도 담겼다. 민주당은 대법관 증원 등 기존에 추진하던 ‘5대 사법개혁안’에 더해 재판 소원, 법 왜곡죄 도입, 법원행정처 폐지 등을 연내에 통과시키겠다는 입장이다.

재판 소원이란 법원의 판결에 대한 헌법 소원을 말한다. 헌법 소원은 공권력의 행사·불행사 또는 위헌적 법률로 기본권이 침해됐다고 주장하는 개인이 헌재에 권리 구제를 요청하는 절차다. 우리나라 헌재법은 헌법 소원의 대상에서 법원의 재판을 제외한다는 규정을 통해 재판 소원을 금지하고 있다.

대법원과 헌재가 공존하는 국가 중 재판 소원 제도가 없는 국가로는 오스트리아가 꼽힌다. 오스트리아는 1920년 세계 최초로 헌재를 설립, 운영하고 있는 나라지만 일반 민사·형사 재판에 대한 재판 소원이 불가능하다. 다만 행정 재판에 대해서는 기본권 침해를 이유로 헌재의 판단을 구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에는 최고재판소·헌재·행정재판소가 있다. 최고재판소는 일반 민사·형사 재판의 3심을 담당하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대법원이라고 할 수 있다. 행정 재판의 경우 1심은 행정법원이, 2심은 행정재판소 또는 헌재가 담당한다. 이탈리아는 재판 소원은 물론 개인이 헌법 소원 자체를 제기할 수 없다. 이탈리아의 헌재는 법원이 제청한 위헌법률심판, 탄핵 심판, 국가기관 사이의 권한쟁의 심판에 대해서만 판결한다.

독일과 스페인은 재판 소원 제도를 도입한 대표적인 국가다.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 연방헌재에 접수된 사건 4640건 중 재판 소원 사건은 3830건으로 82.5%에 달했다. 독일은 분야 별로 연방일반법원(민사·형사)·연방행정법원·연방노동법원·연방사회법원·연방재정법원, 5개 최고법원이 있다. 각 최고법원이 최종심을 담당하지만 헌법적 결함이 있을 경우 연방헌재에 재판소원을 제기할 수 있다. 스페인도 재판 소원이 활발하다. 지난해 스페인 헌재에 접수된 9871건의 사건 중 재판 소원 사건이 9344건으로 전체의 94.7%를 차지했다.

헌법학계에서는 재판 소원 도입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헌법학회장을 역임한 이상경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모든 국가권력은 헌법의 정신과 원리에 따라야 한다.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중대하게 침해한 재판도 헌법 소원 대상이 된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라며 “재판 소원은 당연히 허용돼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무분별한 재판 소원을 막기 위해서는 기본권 침해의 ‘중대성’을 판단하는 기준에 대한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독일은 헌재가 법원 판결에 지나치게 광범위한 통제를 행사하지 않도록 원칙을 세워왔다”며 “법원의 법률 해석이 잘못됐다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하고 오로지 기본권 ‘침해’가 있을 때만 개입한다는 헥 공식, 법원이 기본권의 본질적인 내용이나 의미를 잘못 해석하면 헌재가 심사할 수 있다는 슈만 공식 등이다”고 설명했다.

‘기본권’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안에 대해서만 개입할 수 있도록 선을 그어왔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 같은 기준이 실제로 헌재의 심사를 제한하기보다는 기본권 심사를 정당화 하는데 사용됐다는 비판도 존재한다”고 부연했다. 재판 소원이 활발한 독일에서조차도 헌재의 개입 범위를 두고 여전히 해석이 분분하다는 취지다.

‘단계적 도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법 소원의 대상을 어디까지로 할 것인지는 입법의 영역”이라며 “오스트리아가 재판 소원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최고재판소, 행정재판소, 헌재의 ‘대등한 관계’를 중심에 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차 교수는 재판 소원 자체가 위헌이라는 대법원의 입장을 비판하면서도 민주당 주도로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것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차 교수는 “현재 헌재의 인력과 조직을 가지고 재판 소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최근 고위공직자에 대한 ‘줄탄핵’으로 국정 공백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헌재가 빠르게 사건을 처리하지 못했다”며 “재판 소원이 섣불리 도입되면 사건 지연으로 국민이 피해를 입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행정재판에 한정해 재판 소원을 도입하고 단계적으로 민사·형사 사건으로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차 교수는 “행정 사건에 대한 재판 소원을 먼저 도입해 재판 소원의 적법 요건을 먼저 다듬고 궁극적으로는 개헌을 통해 헌재의 조직과 인력을 지금의 2배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 헌법재판관의 숫자가 헌법에 9명으로 정해져 있어 헌법재판관을 늘리려면 개헌이 필요하다”고 했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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