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와 AI 거품론 [조원경의 현인들의 경제적 조언]

초록빛 코드로 가득한 <매트릭스>의 시그니처 이미지 [출처 : wired.com



매트릭스라는 가짜세계와 인간군상의 모습

1999년, 극장 스크린 위로 초록빛 코드가 비처럼 떨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영화적 연출이 아니었다. 영화 매트릭스는 인간이 살고 있다고 믿는 세계가 사실은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시뮬레이션이라는 충격적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즉, 매트릭스는 지배자 인공지능(AI)이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가상현실을 말한다. 영화는 이 세계를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씩 깨어나는 이야기다. 주인공 네오는 낮에는 무료한 회사원이지만, 밤에는 불법 해킹과 진실 추적에 몰두한다. 어느 날 그는 정체불명의 인물, 저항군의 리더 모피어스를 만나고 이렇게 질문을 받는다.

“진짜 세계를 보고 싶은가?”

그 순간 네오에게는 두 약이 제시된다. 파란 약을 먹으면 지금까지의 평범한 세계로 돌아가고, 빨간 약을 먹으면 숨겨진 현실을 보게 된다. 네오는 결국 빨간 약을 삼키고 깨어난다. 그리고 그가 목격한 세계는 상상 이상이었다. 인간은 인공지능이 짜놓은 가짜 세계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실제 현실은 폐허가 된 도시와 거대한 AI 기계가 지배하는 암울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캡슐 안에서 전기에너지로 쓰이고 있었으며, 인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저항군만이 희망의 불씨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후 네오는 자신의 정체성과 능력을 깨달아가는 동시에,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운명과 마주하게 된다. 영화의 결말에서 그는 마침내 ‘가짜 세계의 규칙’을 뛰어넘는 존재로 성장하고, 기계의 지배가 끝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날리며 하늘로 떠오른다.

25년 전 만들어진 이 영화가 놀랍도록 지금의 AI 시대를 닮았다. 매트릭스는 “시설”이 아니라 인간이 갇혀 있는 무의식적인 감옥을 의미한다. 가장 무서운 감옥은 본인이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감옥이다. 모피어스의 대사처럼 “매트릭스는 네 눈을 가린 세계다.” 이는 인간이 시스템에 복종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구조를 가리킨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매트릭스는 자본주의, 교육, 회사, 정치, 미디어 등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사회 시스템을 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광고가 말하는 욕망을 소비하고, ‘정상적인 삶’이라는 특정 경로를 맹목적으로 따른 채 살아간다. 왜 그렇게 사는지, 누가 그 규칙을 만들었는지, 그것이 정말 우리의 선택인지

이 질문들을 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영화가 말하는 “매트릭스”가 아닐까. 네오가 빨간 약을 삼키며 매트릭스를 떠났다는 것은 실체를 통찰하기 전의 무지한 상태를 벗어났다는 의미가 된다. 불교의 무명(無明),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도 연결된다. 매트릭스는 “깨닫기 전의 세계”, 그리고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이다.

AI 겨울-기대가 얼어붙던 시절

AI의 시대는 언제나 직선으로 달려온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눈부신 발전과 과열된 기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번쯤 과거로 되돌아가야 한다. 인공지능의 역사는 뜨거운 봄과 혹독한 겨울이 번갈아 찾아오는 기후와도 같았다.

1956년 다트머스 회의에서 “인간의 지능을 기계에 구현할 수 있다”는 선언이 울려 퍼졌을 때 세계는 새로운 종교를 만난 듯 열광했다. 연구자들은 기계가 수년 내 인간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믿었고, 정부와 기업은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하지만 현실은 더 느리고 더 투박했으며, 인간의 기대는 너무 성급했다.

1960년대 말, 초기 AI 모델들은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고, 시각도, 추론도, 문제 해결도 형편없었다. “곧 인간처럼 생각할 것”이라던 기계들은 사칙연산을 조금 빨리하는 정도에 머물렀고, 과학자들은 그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

그리고 첫 번째 겨울이 찾아왔다.

연구비는 잘려나갔고, 실험실은 하나둘 문을 닫았고, 학문 자체가 존재 의의를 의심받았다. ‘AI’라는 단어 자체가 업계에서 금기어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술은 죽지 않고 숨어서 조금씩 성장했다. 그리고 1980년대, ‘전문가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했다. 기업 의사결정 시스템에 적용되면서 AI는 또 한 번 산업의 미래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투자금이 쏟아졌고, 세계는 다시 인공지능의 약속에 도취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기기는 기대만큼 똑똑하지 않았다. 유지비는 지나치게 높았고, 기업들은 그 시스템을 사용할수록 실망했다.

두 번째 AI 겨울이 닥쳤다.

기술의 균열은 자본의 냉기를 부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긴 침묵 끝에, 2010년대 딥러닝의 부활이 시작됐다. GPU라는 새로운 불씨가 등장했고, 데이터는 폭발적으로 늘었으며, 알고리즘은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성장하기 시작했다. 바둑 챔피언을 무너뜨리고, 의학 영상을 판독하고, 언어를 생성하고, 인간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AI는 다시 ‘기적’의 언어로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또 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정말 이번에는 겨울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아니, 혹시 지금의 열기가 너무 뜨겁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 겨울이 올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특히 오늘의 AI 열풍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확산되고 있다.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며칠 만에 전 세계에 퍼지고, 경쟁은 몇 달 단위가 아니라 ‘주 단위’로 바뀐다. 기술자들은 말한다. “지금은 인간이 기술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기술이 인간의 사고 속도를 앞질러가기 시작한 시대”라고.

그러나 속도가 빠른 산업일수록 착시도 크다.

기술의 진보와 시장의 기대는 항상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은 한 계단씩 올라가지만, 기대는 열 계단씩 앞질러 달리기도 한다. 결국 AI 겨울이란 기술의 실패만의 문제가 아니다.

너무 많은 기대가 한꺼번에 쏠리고, 너무 많은 자본이 동시에 움직이고, 너무 많은 미래가 조급하게 호출될 때- 그때 찾아오는 집단적 현실 점검의 계절이다.

오늘 우리가 보는 AI 거품론의 등장도 어쩌면 그 겨울의 전조인지, 혹은 자연스러운 조정의 신호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AI의 역사는 따뜻한 봄날의 약속보다도, 혹독한 겨울 속에서도 살아남은 기술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쩌면 겨울은 기술에게 잔인한 계절이 아니라 진짜 혁신만 살아남도록 ‘불순물을 거르는 시간’인지 모른다.

AI 거품론-이번 혁명은 진짜인가?

2023년 챗GPT가 등장하자 세계는 다시 격렬하게 흔들렸다. 전 세계 빅테크들은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듯 인공지능 인프라에 돈을 쏟아부었다. 투자액은 1년 새 두 배로 뛰어올랐고, AI 스타트업에 흘러 들어간 자금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기업이 뚜렷한 수익 모델을 확보하지 못한 채 성장만을 약속한다.

일부 기업의 주가는 기업 실적을 크게 웃돌며 위험한 상승 곡선을 그렸다.

“AI에 거품이 있다”는 발언이 빅테크 내부에서조차 나오기 시작했다. 경제학자들은 말한다.

혁신의 초입에서는 늘 두 가지 힘이 충돌한다고. 하나는 기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착시다. 매트릭스 속에서 사람들이 거대한 시뮬레이션을 현실로 믿었던 것처럼, 우리는 AI가 만든 성취를 ‘인간 지능의 대체’로 과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제금융기구들은 “AI 대형주의 시가총액 쏠림이 지나치다”고 경고하며, “수익이 없으면 거친 조정이 올 것”이라 말한다. AI를 도입한 기업의 95%가 수익을 내지 못한다는 분석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순환 투자·공급업체가 신규 업체에 투자하는 구조도 닷컴 버블에서 나타났던 위험 패턴이다. 모피어스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단지 전기 신호일 뿐이다.”

경제에서도 우리가 ‘혁신’이라 믿는 것 중 일부는, 실제로는 자본과 기대가 만들어낸 신호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대의 네오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라고 있다

반대로 월가는 “이번 혁명은 닷컴과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논거는 이렇다. AI 기업들은 실제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AI 기술은 자동차·금융·의료 등 전통 산업에서 이미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빅테크들은 막대한 투자에도 흔들리지 않는 현금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즉 지금의 과열은 ‘허상’이 아니라 ‘과도기’를 거쳐가는 자연스러운 진통이라는 것이다.

인터넷도 처음에는 거품이라 불렸지만, 결국 세계 경제의 주축이 되었다. AI도 비슷한 경로를 걷고 있다. 가짜는 사라지지만, 진짜 기술은 남는다. 영화의 결말처럼, 진짜 혁명은 조용히 찾아온다. 매트릭스 1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네오는 마침내 가짜 세계의 법칙을 깨뜨린다.

총알이 그의 앞에서 멈추고, 그는 더 이상 매트릭스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가짜 세계의 한계를 넘어선 인간의 가능성. 그는 하늘로 떠오르며 이렇게 선언한다.

“이제 나는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의미는 끝나지 않는다. 네오가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가짜 혁명’ 속에서 ‘진짜 변화’를 찾아냈다는 점이다.

AI 산업 역시 마찬가지다. 기술은 지금 분명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달리고 있다. 거품이 없다고 말하기에는 투자와 기대가 너무 크고, 위험이 없다고 말하기에는 과열의 기운이 짙다. 그러나 기술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면,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 쪽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술에 투영한 욕망, 공포, 그리고 ‘놓치고 싶지 않은 미래’라는 집단적 심리가 시장 전체를 매트릭스처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장면에 서 있는가. 파란 약을 삼키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계속 기대의 세계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빨간 약을 삼키고 한 걸음 떨어져 기술의 실제와 거품의 경계를 차분히 살펴볼 것인가. 매트릭스가 던진 질문은 결국 선택의 문제였다. 그리고 지금의 AI 거품 논란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기술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과장하는 것도, 극적으로 꾸미는 것도 인간의 상상력이다. 그러나 그 상상력이야말로 진짜 혁신을 밀어붙이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버블은 결국 꺼지지만, 꺼지고 난 자리에 남는 것들이 미래 산업의 씨앗이 된다. 인터넷도 그랬고, 스마트폰도 그랬다. AI 역시 그럴 것이다.

라나 워쇼스키와 릴리 워쇼스키

라나 워쇼스키와 릴리 워쇼스키는 매트릭스 시리즈를 만든 미국의 영화 감독·작가 듀오로, 현대 SF 영화의 판도를 바꾼 시카고 출신 인물들이다. 라나 워쇼스키(1965. 6. 21-)는 2010년대 초 트랜스젠더 여성이다. 시각적 혁신과 철학적 주제를 결합하는 작품 세계로 유명하다. 릴리 워쇼스키(1967. 12, 29 -)가 언니 라나와 함께 제작한 작품들은 다층적 서사와 정치·철학적 메시지로 평가받고 있다. 매트릭스 1편은 액션 장르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폭발적인 인기와 반향을 일으킨다. 매트릭스 2: 리로디드, 매트릭스 3: 레볼루션이 제작되었으며 매편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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