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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란·김건희 특검과 경찰 등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는 피의자들인 윤석열 전 대통령(가운데)과 전성배씨(건진법사·왼쪽부터), 김건희 여사, 한덕수 전 국무총리, 전광훈 목사 [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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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밤, 여의도 상공에 뜬 헬리콥터 불빛에 눈발이 유난히 선명했다. 물기 짙은 눈이 세찬 바람에 맨살에 꽂힐 듯 사선으로 뿌려졌다. 흐리고 검푸른 밤하늘과 어지러히 흩뿌리던 눈발 말고는 그날 여의도의 모든 풍경이 비현실적이고 초감각적이었다. 굉음을 내며 국회에 착륙하던 헬리콥터도, 그로부터 쏟아져 나오던 무장 군인들도, 국회의사당 창문을 부수던 그들의 총도, 아니 그 이전에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담화 생중계부터가 ‘비현실’을 넘어 ‘초현실’에 가까웠다. 1년이 흐른 지금, 차가운 눈비 섞인 그날 대기의 선연한 감촉과 기억만이 그날의 모든 일이 AI(인공지능)로 지어낸 가상 역사와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 일어난 사건들이었다고 증명해주는 듯 하다. 장갑차를 맨손으로 막아선 시민들의 영웅적 행동과 국회의 즉각적인 해제 결의까지 말이다.
한 해 동안 진행된 윤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과 계엄·내란 수사 및 재판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가정’에 근거한 숱한 질문들을 하도록 했다. 국회의원들이 담을 타넘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 시민들이 국회 정문에 모이지 않았더라면,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가 더 늦어졌다면, 계엄군이 발포라도 했다면, 주요 정치인들에 대한 체포 명령이 실제로 이행됐더라면, 더 많은 군부대가 한강의 다리를 넘어 국회로 진격했더라면 등등. 아니 그 이전에 윤 전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디올백을 받지 않았더라면, 최고 권력권자가 그토록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한 명의 장관 한 명의 군 장성이라도 그 길을 막아섰더라면 계엄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바벨의 도서관’은 발간됐거나 발간되지 않았던 ‘세상의 모든 책’이 있는 가상의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다. 이 도서관엔 모든 가능한 문자열의 조합이 이뤄진, 모든 길이의 책들이 있다. 그 책은 무한이라고 할만큼 많지만, 무한은 아니다. 여기엔 계엄을 포함해 출범부터 지금까지 윤석열 정권의 모든 실제 역사를 기록한 책도 있을 것이다. 단 하나의 가정으로 바뀐 ‘대체 역사서’도 무수히 많이 있을 것이다. ‘바벨의 도서관’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계엄은 왜 일어났는지, 계엄을 어떻게 막을 수 있었는지,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러나 ‘바벨의 도서관’ 서가에 꽂힌 무한에 가까운 책 중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역사엔 가정이 없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지금 우리가 가진 텍스트로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답을 추론하는 길 뿐이다. 계엄에 대해 말하자면, 내란 특검·김건희 특검·채해병 특검 등의 수사와 재판, 윤 대통령 탄핵심판 및 파면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과 의혹들이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텍스트다. 계엄은 어떻게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사건이 됐을까. 대한민국은 어떻게 계엄을 역사 밖으로 퇴장시킬 수 있었을까. 경악스러웠던 그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말란 법이 있을까.
비뚤어진 사적 욕망과 망상에 빠진 권력기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아닌 평화롭고 일상적인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집권세력이 계엄을 감행하도록 한 ‘필요조건’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계엄으로 그들을 이끌었을까.
첫째, 가장 먼저 확인되는 것은 ‘망상에 빠진 권력기관’으로서의 대통령이다. 윤 전 대통령은 취임 6개월만인 2023년 11월 대통령 관저에서 열린 국민의힘 지도부 만찬 자리에서 “나에게는 비상대권이 있다”며 “내가 총살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다 싹 쓸어버리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조은석 특별검사가 이끄는 내란특검이 윤 전 대통령을 외환 혐의(일반이적 등)로 기소하면서 공소장에 적시한 내용이다. 윤 전 대통령은 계엄 선포 당시 담화문에서 국회를 ‘범죄자 집단 소굴’이라고 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복을 기도하는’ 종북 반국가세력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역할 및 권한에 대한 ‘과대 망상’, 국회에 대한 ‘피해 망상’이다.
둘째, ‘망상에 빠진 권력 기관’을 수단이자 방패막이로 이용했던 ‘사적 욕망’이다. 계엄 전 윤석열 정부를 위기로 몰아갔던 계기 중 하나는 ‘김건희 여사 명품 백 수수 의혹’이었다. 이후 김건희 특검 수사로 드러난 혐의는 디올 백이 빙산의 일각임을 보여주고 있다. 민중기 특별검사팀이 확보한 내용에 따르면 목걸이, 귀걸이, 가방, 브로치, 시계, 재킷, 클러치백, 금거북이, 회화작품 등 고가품 수수 리스트가 일반인들의 대형마트 쇼핑 목록처럼 길다. 특검은 공직, 공천, 이권 청탁 등 ‘대가성’으로 받은 물품으로 보고 있다. 김 여사는 도이치모터스·삼부토건 주가 조작과 양평고속도로 특혜 의혹 등도 받고 있다.
‘김건희’는 원래 사적 영역에서만 호명되던 이름이었다. 일반 국민들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러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대권의 주인으로 입길에 오르내리던 순간부터 그 이름이 공적 공간으로 불려나왔다. 반면 ‘윤석열’이라는 이름은 오로지 공적 영역에서만, 공적 지위와 권한으로서만 호출되는 이름이었다. 검사와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 그리고 검찰총장. 철저히 공인(公人)이었던 이름과 사인(私人)이었던 이름이 ‘대통령 부부’로서 나란히 명기되기 직전후부터 대한민국에 불온한 소문이 떠돌았다. 공인 ‘윤석열’은 ‘김건희의 남편’이라는 사적 지위가, 사인 ‘김건희’는 ‘대통령 부인’이라는 공적 지위가 문제가 됐다. 그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다. 법과 제도, 시장의 규칙에 따라 실현돼야 할 ‘사적 욕망’이 최고의 헌법 기관을 수단과 방패막이 삼아 불법·편법적으로 추구됐다. 계엄이 그 여럿의 매개 고리 중 하나일 수 있었다는 혐의는 점차 ‘심증’과 ‘정황’을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일개 권력자의 비리와 부패, 직권 남용, 국정농단을 넘어 대한민국 체제를 위협할 계엄 선포가 현실화되기 위해선 좀 더 많은 것이 필요했다.
‘영혼 없는 법·행정 기술자’와 ‘망상을 지배했던 주술사’ 그리고 ‘지·선상의 극단주의’
12·3 계엄은 행정권과 국군통수권을 동원해 입법·사법권을 무력화시키고 국민의 헌법상 기본권을 제한하려던 시도다. 이를 현실로서 구현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영혼없는’ 법과 행정의 기술자들, 고위 관료들이 필요했다. 후일 ‘망상’으로 판명된 계엄 주동자들의 확고한 신념과 더불어 계엄 실행에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가담·협력·방관자들의 ‘상황논리’였다. 즉 ‘객관적 사실이나 일관된 판단 준칙에 의거하지 않고 현실의 불가피성을 내세워 자신의 입장을 자의적으로 합리화하는 언행’이다.
내란 우두머리 방조 및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한덕수 전 국무총리는 신문에서 계엄 당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에게 명시적으로 ‘반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재고’를 요청했다는 취지로 말했다. 당초 국회와 헌법재판소에서 계엄 문건을 보지 못했다고 했던 한 전 총리는 자신의 증언과 반대되는 당시 대통령실 폐쇄회로TV(CCTV)가 공개되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과의 대화도 역시 “기억에 전혀 없다”고 했다. 비상계엄 선포문에 사후 서명하고 폐기를 요청한 데 대해선 “내가 헌재에서 위증했다”고 밝혔다. 최상목 전 부총리 역시 문건을 보지 못했다던 종전 증언이 CCTV 영상과 배치됐다. 한 전 총리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온 박상우 전 국토교통부 장관은 최 전 부총리가 국무회의 당시 “(계엄에)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일은 하겠습니다”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박 전 장관은 증언에서 윤 전 대통령을 말릴 새가 없었다며 “저희 국무위원들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유무죄 여부는 차치하고 이들의 발언은 전형적인 ‘상황논리’를 보여준다. 일부는 이를 넘어 위증까지 했다. 이들 외에도 김 여사의 각종 의혹을 제대로 수사·조사하지 않고 면죄부를 준 검찰과 사정당국 관료 역시 ‘영혼없는 법·행정 기술자’에 포함돼 마땅하다.
윤 전 대통령 부부와 정치권 주변에서, 사익과 공적 권력의 접착제 역할을 했던 ‘브로커’들도 종교나 무속을 참칭해 ‘망상’을 키우고 지배했던 존재들이었다. 제19대 대선 전부터 정권 내내 윤 전 대통령 부부를 둘러싼 무속인 관련 이야기가 유독 많았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이른바 ‘영(靈)의 세계’와 ‘현실세계’를 잇는 ‘영매’ 혹은 ‘주술사’를 자처했으며, 실제로는 두 부부를 심리적으로 좌우하는 ‘심령술사’이자, 인사와 이권의 다리가 된 브로커였다.
마지막으로, 시대착오적 반공주의와 극단적 종교신념이 결합된 ‘극단주의 정치세력’이 계엄의 또 다른 기반이 됐다. 선상(線上)과 지상(地上)의 극단세력, 즉 유튜브 극우 스피커와 이른바 ‘아스팔트 극우’다. 국회의 입법독재와 종북 반국가세력, 북한공산세력의 위협으로 인해 자유민주주의와 헌정 질서가 붕괴되고 대한민국은 망국의 풍전등화 운명에 처해있다는 윤 전 대통령의 ‘망상적’ 현실인식은 유튜브·아스팔트 극단세력과 교감하며 서로를 비대하게 만든 결과였다. 윤 전 대통령은 평양에 무인기를 보내 남북간 군사적 분쟁을 유도함으로써 계엄의 명분으로 삼으려 했다는 혐의(외환·일반이적죄)를 받고 있는데, 이는 ‘망상’ 속 현실을 스스로 창조함으로써 ‘인지부조화’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시도는 아니었을까.
계엄을 낳은 ‘5개의 광기’, 회귀와 종언의 갈림길
분노와 적의로 점철된 망상의 권력자, 공적 지위를 탐했던 사적 욕망, 영혼없는 법·행정 기술자들, 주술이나 예지같은 삿된 재주로 홀려 이름과 이권을 팔았던 브로커, 광신적 이념과 교리를 돈벌이로 삼은 극우세력이 바로 그날 계엄의 밤에 대한민국을 파국으로 몰고가려던 ‘5개의 광기’였다.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없었다면, 이들간의 접합과 연대가 불가능했더라면, 2024년 12월 3일 밤 상연된 초현실적 희비극은 아마도, 권력자의 취중 망상이나 시나리오 단계에서 멈췄을 지도 모를 일이다. 수사와 재판이 진행될수록 광기에 찬 5개의 얼굴들과 이들간의 얽히고 설킨 커넥션이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계엄을 수시간만에 좌절시킨 힘은 무엇이었나. 그 답 또한 긴 연대기와 기사본말, 그리고 열전이 필요한 일일 터이나, 한마디로 말하자면 제도로 축적되고 시민의 힘으로 체화된 민주주의의 역사였다. 독재와 계엄의 시대를 견디고 이겨냈던 과거가 시민을 움직이고 계엄 해제와 탄핵의 제도를 작동시킨 것이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작가 한강의 질문에 대해 우리 국민과 제도가 증명한 답이기도 했다.
그러나, ‘5개의 광기’는 절멸했고, 불의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확신하겠는가. 권력과 체제를 잠식했던 망상과 욕망의 망령은 단지 준동과 발호를 멈췄을 뿐이다. ‘생존’과 ‘종족 보존’만이 목적인 영혼없는 법·행정 기술자들은 여전히 관료제의 일부로서 존속하고 있다. 주술과 종교, 이념을 어지러히 오가는 브로커들과 극단주의 세력은 일부 정치·정당 세력과 서로를 ‘숙주’ 삼아 기생의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계엄을 가능하게 했던 그 광기들은 차라리 우리 공동체 안에 새겨진 유전자 중 하나, 곧 ‘밈’(meme)과 같아서 없앨 수는 없고 단지 ‘발현’을 막는 일만 가능할 수도 있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현재가 미래를 돕고, 산 자가 앞으로 살아갈 자들을 구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것은 무엇일까. 지난 1년이 증명했듯, 법과 제도 그리고 행동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