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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천만 영화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 투자가 얼어붙으면서 텐트폴(고예산 영화)도 자취를 감췄다. 중간 체급의 영화들이 성수기 극장가에서 한국 영화의 체면을 지키기는 했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점령한 연말 대목의 극장가를 지켜보는 마음은 씁쓸하기만 하다.
위기를 이야기하는 와중에 그 위기는 더욱 깊어졌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그나마 독립·예술영화들의 약진이 위안이 됐던 한 해였다.
29일 영화진흥위원회 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25일까지 극장을 찾은 관객 수는 1억300만명이다. 간신히 1억명은 넘겼지만, 팬데믹 이전인 2019년(2억2667만명)의 절반도 못 미친다. 전년 대비로도 16%가량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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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한 영화관의 상영 시간표 [연합] |
올해 극장가는 한국 영화 개봉작이 급감하면서 외산 애니메이션이 강세를 보였다. 국내 최고 흥행작도 연말 극장가를 휩쓴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 2’다. 크리스마스인 지난 25일 기준으로, 누적 관객 수가 700만 명을 넘어섰다. 개봉 30일 만의 쾌거다. 2위는 568만 관객을 동원한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차지했다. 3위에는 조정석 주연의 ‘좀비딸’(563만명)이 이름을 올렸다.
관객 감소와 ‘천만 영화’의 실종 탓에 흥행 척도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범죄도시 시리즈와 ‘서울의 봄’(2023)과 ‘파묘’(2024) 등 팬데믹 이후에도 이어져 온 천만 신화는 끊겼다. 올해 한국 영화 중 5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좀비딸’이 유일하다. 상반기 최고 흥행작인 ‘야당’의 성적은 337만이다.
올해 최대 기대작 중 하나였던 봉준호 감독의 첫 할리우드 장편 ‘미키17’은 국내에서 300만을 간신히 넘겼다. 베니스국제영화제 등 해외 유력 영화제에 연이어 초청되며 개봉 전부터 큰 기대를 받은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는 결국 300만 고지를 넘지 못했다. 거장 감독들의 잇따른 흥행 부진을 바라보는 업계는 뉴 노멀의 시대를 처절하게 경험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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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준호 감독의 첫 할리우드 장편 ‘미키17’ 스틸컷. 국내 동원 관객 수 300만을 턱걸이했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
한 배급사 관계자는 “티켓 파워가 있는 감독의 작품이나 텐트폴이 기대만큼의 흥행 기록을 내지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깝다”면서 “올해 영화계가 가장 필요했던 분위기 반전도 이루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과거에는 500만이 멀어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200만도 멀다”면서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엔데믹 이후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업황에 극장 폐점 소식도 잦았다. 지난해 4개 상영관을 정리한 CGV는 올해에도 12개 지점을 폐점했다. 메가박스는 지난 10월 메가박스 성수점 등 5곳의 문을 닫았다. 롯데시네마 역시 올해 4개 상영관의 운영을 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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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세계의 주인’ 포스터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
우려와 위기감이 지배했던 2025년이었지만, 그 속에는 희망과 기회도 있었다. 상업영화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독립영화의 약진은 빛났다. 탄탄한 서사와 연출, 남다른 아이디어로 뭉친 반짝이는 작품들이 상업 영화의 빈자리를 채웠다. 업계의 이목을 주목시킨 흥행작도 등장했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정부 지원 등을 통해 영화를 만들려는 열정 있는 감독들이 많다. 상업영화 개봉작은 줄었지만, 독립영화는 평년 수준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극장이 안 되고, 상업 영화가 줄다 보니 작은 영화에게 기회가 많이 생긴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어두운 시기에 희망의 불을 밝힌 것은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계의 주인’이다. 지난 10월 말 개봉해 12월 말 현재 18만 관객을 넘었다. 관객의 입소문에 힘입어 손익분기점(8만명)을 일찍이 넘겼고, 지난 2019년 독립영화 인기를 견인한 ‘벌새’(15만)의 스코어도 제쳤다. 독립영화를 기준으로 보면 ‘블록버스터급 흥행’이다.
‘세계의 주인’은 열여덟 여고생 ‘주인’이 전교생이 참여한 서명운동을 홀로 거부한 뒤 의문의 쪽지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주인공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피해자다움’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향한 날카로운 시각으로 유력 영화제에서 호평받았다.
작품성과 흥행이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세계의 주인’은 좋은 이야기와 연출이라면 영화의 제작 규모와 상관없이 관객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영화 산업의 본질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업계가 기대하고, 바라는 희망의 싹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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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작업장 봄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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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 스틸컷 [엣나인필름 제공] |
길종철 한양대 연극영화과 교수는 “큰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지원금을 통해 세상에 태어난 독립영화들의 활약이 있었다. 그 중 ‘세계의 주인’은 독립영화 중에서도 관객과 많은 교감을 할 수 있는 영화”라면서 “창의성을 마음껏 뽐내고 도전하는 독립영화가 살아나고, 그 안에서 상업적으로도 흥행할 수 있는 기획이 나와서 다음 단계로 가는 식으로 창작자와 업계가 성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3학년 2학기’, ‘3670’, ‘여름이 지나가면’, ‘사람과 고기’ 등의 영화도 관객과 평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독립영화 전체로 봤을 때 극히 일부의 성공이지만, 그럼에도 한국 영화의 토양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영화 투자·배급사이자 예술영화극장 아트나인을 운영하는 엣나인필름의 주희 기획마케팅총괄이사는 “‘세계의 주인’은 아트버스터(예술 영화+블록버스터) 느낌의 영화다. 이 영화의 성공은 독립영화계에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면서 “몇몇 작품 가지고 업계가 모두 잘됐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과감함으로 무장한 신인 감독들과 경력 있는 감독들이 다 함께 좋은 영화를 만들고 선보였던 한 해임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스타 배우들의 독립영화 출연 움직임도 이어졌다. 이나영은 단편영화 ‘신원미상’에서 1인 2역을 연기하며 7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다. 지난 9월에는 송일국이 저예산 독립영화 ‘잃어버린 사이’ 출연 소식을 알렸다. 송일국은 “활기를 잃어가고 있는 국내 영화 제작 환경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독립영화의 다양성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번 작품에 참여하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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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얼굴’ 포스터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
동시에 올해 상업영화에서는 ‘산업’의 체질 개선을 위한 노력이 두드러졌다. 이대로는 한국 영화가 존속하기 힘들 것이란 우려가 오랫동안 고착돼 온 제작 관행에 변화를 가져왔다. ‘흥행 감독’들이 먼저 발 벗고 나섰다.
‘부산행’(2016)의 연상호 감독은 2억여 원의 제작비를 들인 ‘얼굴’로 관객들을 찾았다. 20여명의 스태프로 3주 만에 촬영을 마쳤다. 배우들은 최소한의 출연료와 흥행 보수로 연 감독의 도전에 동참했다. 영화는 관객 100만명을 동원했고, 11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연 감독은 영화 ‘실낙원’을 통해 또 한 번 초저예산 작품 제작에 나선다.
‘범죄도시’(2017)를 연출한 강윤성 감독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첫 장편 영화 ‘중간계’로 극장 문을 두드렸다. 기존 시각효과 작업을 AI로 대체해 시간적·비용적 효율을 높였다. 강 감독은 “AI로 만들면 적은 예산에서도 이 정도로 구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올해 영화계가 이처럼 긴 침체의 터널을 지나왔는데도 출구는 없는 듯 보인다. 내년 전망 역시도 ‘그리 밝지 않다’는 게 영화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무엇보다 개봉작이 없다. 팬데믹 당시 쌓였던 창고 영화는 소진됐다. 2026년 중·대형 영화 개봉작은 30편대에 그칠 전망이다. 이에 정부는 부리나케 영화 제작 지원 규모를 늘리고 있다. 순제작비 ‘20억 이상 100억원 미만’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중예산 한국 영화 제작지원 사업’의 내년 예산을 올해 대비 2배 많은 200억원으로 책정했다. 흥행 이전에 ‘영화가 있어야 시장이 존속한다’는 위기의식이 반영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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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 |
물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여전히 많은 창작자가 자신들의 영화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다. 올해 51회 서울독립영화제의 경우 최다 출품작(1805편)과 최다 관객(2만23명)이란 기록과 함께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창작의 열기 속에서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길 교수는 “지금은 한국 영화의 재정비 시대라고 생각한다.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고, 실패한 영화들에 대한 점검도 필요한 때”라면서 “이번 위기를 기회 삼아 우리가 영화를 잘 만들어왔는지 초심으로 돌아가 관객과 만나고 소통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 이사는 “일본은 올해 영화 ‘국보’와 ‘귀멸의 칼날’, ‘체인소맨’ 덕분에 최고 흥행 수익을 얻었다. 일본 시장을 보면 우리나라도 앞으로의 극장과 영화가 계속해서 침체할 것이라고 비관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좋은 작품과 아이디어가 있으면 극장도 다시 활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