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은 왜 앙숙이 됐나…70년 악연의 역사 [디브리핑]

석유 국유화에서 핵 위기·군사 충돌까지
70여 년간 누적된 불신의 결정적 순간들
연도로 정리한 미·이란 갈등의 뿌리


6월 20일 테헤란에서 열린 반미·반이스라엘 시위에 참가한 이란인들.[게티이미지]


[헤럴드경제=서지연 기자] 미국과 이란의 갈등은 최근 불거진 군사적 긴장이나 핵 문제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1950년대 이란의 석유 국유화와 이를 둘러싼 정권 교체 논란에서 출발해, 1979년 이슬람 혁명과 미국 대사관 인질 사태로 외교 관계가 단절됐고, 이후 핵 개발·제재·군사 충돌이 반복되며 불신은 구조화됐다. 양국 관계는 화해와 대립을 오가며 70년 넘게 누적된 역사적 갈등의 산물로 굳어졌다. 다음은 미국과 이란 관계를 규정해 온 핵심 장면을 연도별로 압축한 타임라인이다.

1950년대: 개입의 시작

1951년 이란 의회는 석유 산업 국유화를 결정하며 영국 주도의 석유 지배 구조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는 자원 주권 회복을 내건 민족주의 흐름의 산물이었지만, 서방의 이해관계와 정면 충돌했다.

1953년에는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이 비밀 공작인 ‘에이잭스 작전’을 통해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 축출을 지원했다. 냉전 구도 속에서 값싼 석유 접근권을 유지하고 공산주의 확산을 차단하려는 계산이 작용했다.

이후 친서방 성향의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복위했지만, 외세 개입의 기억은 이란 사회 전반에 깊은 반미 정서를 남겼다. 이는 훗날 혁명과 반서방 이데올로기의 토양이 됐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4년 백악관에서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와 함께 있는 모습. [게티 이미지]


1960~1970년대: 동맹과 균열

1957년 미국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 구상에 따라 이란의 민간 핵 이용을 지원했다. 당시 이란은 미국의 핵심 중동 동맹으로, 핵 기술 이전은 안보 협력의 연장선이었다.

1968년 미국과 이란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초기 서명국이 되며 ‘평화적 핵 이용국’ 지위를 공식화했다. 핵 문제가 갈등의 씨앗이 되기 전, 제도적 협력이 작동하던 시기였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의 테헤란 방문 이후 미국은 대규모 무기 판매를 약속했고, 1970년대 후반까지 이란은 F-14 전투기 등을 포함해 160억달러가 넘는 미국산 무기를 도입했다. 미국은 이란을 중동 질서의 핵심 축으로 활용했다.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1979년 이란으로 귀국했다.[게티이미지]


그러나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팔라비 샤가 축출됐다. 프랑스 망명 생활을 마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2월 귀국해 권력을 장악했고, 4월 국민투표를 통해 이란을 이슬람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호메이니를 최고지도자로 하는 헌법이 승인되며 친서방 군주제에서 반서방 신정 체제로의 전환이 공식화됐다.

1980년대: 적대 관계 고착

1980년 미국의 인질 구출 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카터 행정부는 이란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미·이란 적대 관계는 구조화됐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전략적 판단 아래 이라크를 지원했다. 이란 입장에서는 미국이 적대국을 지원한 또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1984년 미국은 이란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고, 1986년에는 이란-콘트라 스캔들이 폭로되며 적대 속 이중적 거래가 드러났다.

1988년에는 미 해군이 이란 민항기를 전투기로 오인해 격추하면서 민간인 290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이란 사회에 깊은 상처와 분노를 남겼다.

1988년 미 해군 구축함 USS 빈센스호에 의해 오인 격추된 이란 에어버스 여객기 희생자들의 관이 일렬로 놓여 있다. [게티 이미지]


1990년대: 제재의 제도화

1995년 미국은 이란산 석유에 대한 금수 조치를 단행하며 경제 압박을 강화했다.

이듬해 제정된 이란·리비아 제재법은 제3국 기업까지 제재 대상으로 삼으며 제재의 외연을 넓혔다. 이로써 미·이란 간 무역과 투자는 사실상 전면 차단됐다.

2000년대: 핵 문제 부상

2002년 부시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대결 구도를 공식화했다. 같은 해 이란의 비밀 핵시설(나탄즈·아라크) 존재가 폭로되며 핵 문제는 핵심 쟁점으로 부상했다.

2003년,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약 1,300km 떨어진 부셰르 원자력 발전소 건설 현장 내부를 걷고 있는 이란 노동자들.[게티이미지]


2003년 이란은 우라늄 농축 중단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수용을 통보하며 긴장 완화에 나섰다.

2007년 미 정보기관은 이란의 핵무기 프로그램이 2003년 중단됐다는 평가를 내놨지만, 2009년 포르도 농축 시설 공개로 불신은 다시 증폭됐다.

2010년대: 합의와 파기

2013년 오바마 대통령과 로하니 대통령 간 접촉을 계기로 최고위급 대화가 재개됐다.

2015년에는 핵합의(JCPOA)가 체결되며 핵 활동 제한과 제재 완화를 맞바꾼 역사적 합의가 성사됐다.

그러나 2018년 트럼프 1기 행정부가 합의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면서 국면은 급반전됐고, 이란은 농축 우라늄 생산을 확대했다.

2020년대 초반: 군사 긴장 재점화

2020년 1월 3일, 이라크에서 발생한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한 카셈 솔레이마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위 도중, 테헤란에서 시위대가 그의 사진을 들고 있다.[블룸버그]


2020년 미군 드론 공격으로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사망하면서 양국 간 군사 충돌 위험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란은 이라크 내 미군 기지에 미사일 공격으로 대응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2021년 핵합의 복원을 시도했지만 협상은 결렬됐다. 다만 2023년에는 억류자 교환과 이란 자금 일부 해제가 이뤄지며 제한적 거래가 재개됐다.

2025~2026년: 압박과 충돌 국면

트럼프의 재집권 이후 ‘최대 압박’ 전략이 다시 가동됐고, 핵 협정 재요구와 제재 강화가 병행됐다.

올해 이란 내 대규모 반정부 시위와 강경 진압이 이어지며 체제 불안이 부각됐다. 미국은 중동 해군 전력 배치와 군사 행동 가능성을 거론했고, 이스라엘·미국의 이란 핵시설 공습과 이란의 보복 공격으로 긴장은 다시 고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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