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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얀 보에크호르스트, 헤르메스의 도움을 받아 페가수스를 제압하는 아테나, 1650~1654, 캔버스에 유채, 145.5×209.5cm, 노르드브라반츠 박물관 |
카드모스·페르세우스와 ‘3대 영웅’
불운·악담 겹쳐 목숨 걸고 고생길
유혹 외면했더니 외려 누명 쓰기도
페가수스 길들여 최악의 괴물 퇴치
점차 교만…신에 도전했지만 결국
그리스 로마 신화를 〈후암동 미술관〉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보듯 감상하세요. 기사는 여러 참고 문헌 기반에 흐름상 약간의 변형·생략,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좋아요’와 댓글은 콘텐츠 제작과 유통에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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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텔 토르발센, 벨레로폰과 페가수스, 1790~1844, 종이에 펜과 갈색 잉크 등, 16.8×12.6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미남 벨레로폰이 왕궁에 들어온 순간 이오바테스 왕은 그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훤칠한 키와 탄탄한 몸, 시원한 눈코입 등 그는 과연 듣던 대로 조각상 같았다. 몸소 리키아까지 찾아온 벨레로폰을 위해 이오바테스 왕은 무려 아흐레간 잔치를 열었다. 이는 벨레로폰이 당시 강대국이었던 코린토스의 왕자였기에 그랬다. 한편으로는, 그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자식일 수 있다는 소문을 의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벨레로폰은 성대한 환영식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앞서 벨레로폰은 이곳 리키아에 오기 전 다른 국가에서도 잠깐 머문 적이 있었다. 그곳은 아르고스. 호쾌한 프로테우스 왕이 지배하는 땅이었다. 벨레로폰은 아르고스에 있는 동안에도 그 왕에게 ‘특별한 은혜’를 받은 바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지금 함께 있는 리키아의 왕 이오바테스와 직전에 신세를 진 아르고스의 왕 프로테우스는 끈끈한 인척 관계였다.
“프로테우스 왕께서 저에게 아르고스를 떠나면 리키아를 가보라고 간곡하게 말했지요. 이제야 이유를 알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어른을 소개하기 위해 그랬나 봅니다.” 벨레로폰이 말했다. “사위가 이어준 인연을 앞으로도 잘 지켜나가지요.” 이오바테스 왕이 빈 잔에 포도주를 채워주며 화답했다.
“그러고 보니, 왕이시여. 제가 전달해 드린 편지는 읽어보셨습니까?”
“리키아는 귀한 손님이 오면 성대한 잔치부터 열지요. 어쩌다 왔는지, 무슨 상황에 놓여 있는지는 그다음 따지는 게 우리 풍습입니다.” 벨레로폰과 이오바테스 왕은 이 말을 끝으로 술잔을 또 맞댔다. 그렇게 재차 웃고 취했다. 행사의 마지막 밤도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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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미상, 키마이라, 청동 등, 78.5cm(높이), 피렌체 국립 고고학 박물관 [Sailko, CC BY-SA 3.0, commons.wikimedia.org] |
벨레로폰이 말한 편지.
그것은 벨레로폰이 이오바테스 왕을 마주한 첫날에 건넨 것이었다. “프로테우스 왕이 당신에게 전하라는 말만 있었을 뿐, 무엇이 쓰여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 말과 함께.
잔치 내내 타오르던 횃불이 드디어 꺼졌다. 음악 소리도 이제야 잠잠해졌다.
이오바테스 왕은 모든 잔치를 마무리한 후에야 편지에 눈길을 줬다. 그는 잠들기 직전 봉투를 뜯었다.
“아버님. 직접 찾아 인사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이는 프로테우스 왕이 직접 쓴 글이었다. “코린토스의 왕자 벨레로폰을 만나셨습니까? 그는 강하고 예의 바른 사내입니다. 정성을 다해 대접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오바테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촛불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종이 맨 구석에 있는,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작게 적힌 글을 읽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는…
순간, 숨이 막혔다.
불쑥 튀어나온 예상치 못한 글 앞에서 왕의 표정은 물 맞은 듯 일그러졌다.
다시 읽었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그 내용이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이것은 갑자기 무슨 전개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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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페가수스를 탄 벨레로폰, 1746~1747, 프레스코, 팔라초 라비아 |
모든 일의 시작은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먼저, 벨레로폰에게 본명은 따로 있었다. 히포누스였다. 이와 함께 따라붙었던 수식어도 있었다. 살인자였다. 그는 실제로 코린토스의 왕자이기는 했다. 하지만, 군사 훈련으로 칼 던지기를 하던 중 잘못해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다. 사망자의 이름은 벨레로스. 형제였다는 설이 있고, 일반 시민이었다는 말도 있다. ‘벨레로스를 죽인 자.’ 벨레로폰이란 말은 이 일 때문에 새롭게 붙은 이름이었다.
그 사건 이전의 벨레로폰은 인망이 높은 자였다.
왕족에게 어울리는 위엄과 기품도 있었다. 그러나 한 번의 치명적 실수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맥없이 추방되고 말았다.
그런 벨레로폰이 갑자기 아르고스에 간 일에도 이유는 있었다.
그곳의 프로테우스 왕을 찾아 정화 의식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타국의 권위자(프로테우스 왕)가 아무 인연 없는 본인(벨레로폰)을 위해 정성껏 제사를 치르는 일. 그렇게 하면 제우스 신도 감동해 죄를 용서해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정을 들은 프로테우스 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벨레로폰을 위해 제단을 찾고, 마음을 다해 며칠간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단비가 내렸다. 이는 죄를 지워주겠다는 신의 말씀과 같았다. 탄복한 벨레로폰은 아르고스에 더 머물렀다. 프로테우스 왕과의 우정을 쌓아올렸다. 왕 또한 나쁠 게 없었다. 벨레로폰은 언젠가 코린토스의 왕이 될 수도 있는 자였다. 가깝게 지내면 외려 이득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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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머리와 사자 머리를 가진 키마이라, 기원전 850~750년경 [Georges Jansoone, commons.wikimedia.org] |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프로테우스 왕의 아내, 왕비 스테네보이아(또는 안테니아). 그가 벨레로폰의 미모에 홀딱 반하고 만 것이다.
스테네보이아는 늦은 밤 벨레로폰을 몰래 부르기까지 한다. 유혹의 손짓으로 몸을 끌어안으려고도 한다. 벨레로폰은 이를 뿌리쳤다. “저를 배은망덕한 자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망설임도 없이 문을 닫고 돌아섰다.
홀로 남겨진 스테네보이아는 분노와 굴욕감에 젖었다.
그래서 일을 꾸몄다. 바로 다음 날, 프로테우스 왕에게 찾아가 울먹이며 한 말. “이른 새벽, 벨레로폰이 저를 끌고 가 제 몸을 능욕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한 인간의 추악한 거짓말에 불과했다.
프로테우스 왕은 눈물까지 뚝뚝 흘리는 아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당장 벨레로폰을 죽일 수도 없었다. 프로테우스 왕은 앞서 제우스에게 직접 그 사내의 무결함을 주장한 입장이었다. 이제 와 다시 죄를 씌워 처형한다? 신을 희롱하는 일과 다를 바 없었다.
벨레로폰은 때마침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는 지난밤의 은밀한 충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프로테우스 왕은 벨레로폰에게 모른 척 제안했다. “그대여. 고향으로 가기 전 리키아를 꼭 들러보시게.” 벨레로폰은 은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리키아까지 온 것이었다. “그곳의 이오바테스 왕에게 봉투를 전해주게. 다만, 절대 먼저 읽지는 않았으면 하네.” 이 요청과 함께 받아 챙긴, ‘소중한’ 편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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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더 이바노프, 키메라와의 전투에 나서는 벨레로폰, 1829 |
이오바테스 왕은, 이 과정을 거쳐 사위 프로테우스 왕의 비밀 메시지를 받은 것이었다.
그도 난감해졌다. 저 품격 있는 사내가 그따위 악행을 벌였는지도 의문이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 또한 이미 벨레로폰을 정성껏 대접했다. 지금에서야 뒤통수를 치는 건 필시 신의 미움을 살 짓이었다. 그는 밤새 고민했다. 정답을 찾아 밤을 헤맸다. 그 결과 생각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해가 뜨자마자 벨레로폰을 불렀다. 보자마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벨레로폰이 먼저 물었다. 이 말을 듣고 입을 열었다. “그렇소. 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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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마이라, 아풀리아 지방의 적색 인물화 접시, 기원전 350~340년경, 5(높이)x21.4(지름)cm, 루브르 박물관 |
“머리가 셋 달린… 괴물 사자이지 않습니까?”
이오바테스 왕은 벨레로폰의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는 척했다. “놈이 우리 백성을 마구 잡아먹고 있소.” 왕은 벨레로폰에게 다가가 두 손을 잡았다. “어젯밤 자기 전 사위의 편지를 읽어봤소. 그대가 탁월한 전사라는 칭송이 빽빽했소. 그러니 혹시 가능하다면… 자네가 키마이라의 목을 베어줬으면 하오.” 이오바테스 왕이 눈물을 글썽였다. 벨레로폰은 부탁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 가문에 너무 큰 환대를 받았다는 생각이었다.
“왕이시여. 제가 나서겠습니다.”
일단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고맙소!” 왕은 이 사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는 동안 표정을 바꿨다. 1~2세기께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신화 모음집 《비블리오테케》에서는 “이오바테스 왕은 벨레로폰이 그 야수와 싸우다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여겼다”는 문장이 쓰여있다. 벨레로폰이 아무리 강한들 키마이라를 이길 수는 없으리라고 확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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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바티스트 위카르, 키마이라에 업힌 여성, 18~19세기경 |
키마이라는 그저 괴물 사자 정도로 볼 수 없었다.
키마이라는 과거 제우스까지 위협했던 최악의 존재, 티폰을 아버지로 둔 괴생명체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따르면 키마이라는 사자와 염소(또는 양), 뱀의 머리를 달고 다녔다. 사자의 송곳니, 뱀의 맹독 등 이들의 무기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운데 있는 염소 머리는 지옥 불을 무한히 뿜을 수 있었다. 몸에도 사자와 염소, 뱀의 특징이 섞여 있었다. 두꺼운 피부, 날카로운 발톱, 유연한 꼬리…. 녀석에게는 약점이 없어 보였다.
토마스 벌핀치는 《그리스 로마 신화》등에서 키마이라가 안탈리아(지금의 튀르키예 남서부)에 서식지를 두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당시 그곳은 이오바테스 왕이 이끄는 땅, 리키아의 영토가 맞았다고도 한다. 놈은 산에서 주로 야생동물을 사냥했다. 그러다 인간을 맛본 후부터는, 매번 마을로 내려와 집과 밭을 습격했다. 모두가 힘을 합치기도 하고, 전문 사냥꾼까지 고용해 봤으나 헛수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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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크 엥겔하르트 슈뢰더, 아테나와 페가수스, 1700~1750, 캔버스에 유채, 65×38.5cm |
벨레로폰은 무작정 키마이라의 뒤를 밟지 않았다.
그는 조언부터 구했다. 그가 만난 이는 폴리이도스였다. 일대에서 가장 현명한 예언자로 꼽힌 인물이었다. “청년이여. 지혜의 여신 아테나 신전으로 가게.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면 길이 보일걸세.” 가르침은 이게 전부였다.
벨레로폰은 그 말을 따랐다. 신전으로 갔다. 밤이 스르르 내렸다. 그곳 한가운데 자리를 깔았다. 눈을 감고, 천천히 잠을 청했다.
꿈에서 목소리를 들었다. 갑주 차림의 누군가가 후광과 함께 등장했다. 아테나였다. “이것을 챙겨 페이레네(Pirene) 샘으로 가거라.” 그녀가 건넨 건 황금 말고삐였다. “신이시여. 무슨 말씀입니까.” “키마이라 퇴치에 도움을 줄 존재가 그곳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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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보뇌르, 페가수스, 19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65x100cm |
꿈은 흐릿해졌다.
일어나보니 아침이었다. 벨레로폰은 오른손을 봤다. 거기에는 꿈에서 본 고삐가 그대로 놓여있었다. 그는 들판을 가로질렀다. 얼마나 달렸을까. 아테나가 말한 그 샘이 보였다. 샘에서 목을 축이는 동물도 볼 수 있었다. 말이었다. 새하얀 털의 근육질 말이었다. 보통 말이 아니었다. 녀석의 등에는 독수리보다 큰 날개가 달려 있었다! 그러니까, 눈앞 동물은 하늘을 날 수 있는 전설의 생명체였다. 벨레로폰은 천천히 다가갔다. 고삐를 건넸다. 과연 아테나의 손길이 닿은 도구인지, 말 또한 저항 없이 따랐다. 날 수 있는 명마, 페가수스(Pegasus)를 길들인 순간이었다.
벨레로폰은 땅에 둔 검과 활, 청동 갑옷을 다시 챙겼다.
페가수스의 등 위로 뛰어올랐다. 녀석은 날개를 길게 펼쳤다. 기다렸다는 듯 하늘로 높이 올랐다. 이제야 사냥 준비를 마쳤다. 더는 지체할 여유도 없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괴물 키마이라가 있는 땅, 안탈리아였다. 페가수스는 벨레로폰만큼이나 들뜬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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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키마이라를 죽이는 벨레로폰(웅변의 힘), 1723년경, 프레스코, 샌디 팰리스 |
당연히 쉽게 잡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그것은 땅에서나 떨칠 수 있는 위세라고 여겼다. 하늘 위 벨레로폰은 자신이 위협을 느끼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일이 당장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구름 틈에서 활을 지겹도록 쐈다. 단 한 발도 키마이라의 가죽을 뚫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질긴 피부 때문이었다. 그뿐인가. 키마이라는 계속해 지옥 불을 뿜었다. 이는 굵은 화염 기둥이 돼 구름 위까지 위협했다. 언젠가부터 벨레로폰은 이 괴물의 공격을 피하는 데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날렵했던 명마 또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대로면 위험했다.
이오바테스 왕의 숨은 바람처럼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벨레로폰은 동굴에 몸을 숨겼다. 생각했다. 초조하게 따졌다. 계책이 떠올랐다. 납이었다. 화살에 납을 매다는 일이었다. 이를 놈의 입 깊숙한 곳에 넣으면 희망이 있었다. 녀석이 그 상태로 불을 뿜는다? 외려 납을 녹여 기도가 막힐 터였다. 다만, 설에 따라서는 화살 아닌 창을 활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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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테르 파울 루벤스, 페가수스를 타고 키마이라를 물리치는 벨레로폰, 1635, 패널에 유채, 34×27.5cm, 보나-헬레우 박물관 |
벨레로폰은 다시 페가수스에 올랐다.
키마이라의 목구멍으로 납 화살을 정확히 때려 박았다. 키마이라는 이를 모른 채 또 한 번 불구덩이를 토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역시나 납이 숨통을 조였다. 흘러내린 납은 내장을 망가뜨렸다. 키마이라는 비틀거렸다. 불을 뿜는 염소 머리가 먼저 죽었다. 그다음 사자 머리와 뱀 머리가 기운을 잃었다. 육중한 몸이 쓰러졌다. 마지막까지 요동치던 뱀 모양 꼬리마저 잠잠해졌다. 끝. 벨레로폰의 승리였다.
이오바테스 왕은 살아 돌아온 벨레로폰 앞에서 몸을 움츠렸다.
이오바테스 왕은 벨레로폰에게 요행이 있었을 것으로 봤다. 그래서 다른 일도 부탁했다. 《비블리오테케》에 따르면 이오바테스 왕은 벨레로폰에게 리키아와 적대적 관계인 옆 나라, 솔리모이의 군대에 맞서달라고 요청했다. “때마침 수확 철이라 우리 병사가 한 명도 없소. 그러니, 대규모 군사를 혼자서 상대해야 하오.” 이 말과 함께. 벨레로폰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페가수스와 함께 적진까지 날았다. 날개 위에서 화살 비를 퍼부었다. 결과는 싱거웠다. 돌아온 벨레로폰에게 이번에는 사냥의 명수 아마조네스를 제압하라는 임무가 내려왔다. 그 일 또한 페가수스가 있으니 어렵지 않았다.
끝으로, 벨레로폰은 다시 돌아가는 길에 웬 도적 무리와 맞붙었다.
그들은 예사롭지 않았다. 서로 호흡이 잘 맞았다. 싸움도 능숙하고, 무기도 잘 다뤘다. 다만 승자는 역시나 정해져 있었다. 줄줄이 쓰러진 이들은 이오바테스 왕이 보낸 리키아 최고 정예군이었다. 그렇게 벨레로폰은 억울한 누명 탓에 키마이라 퇴치를 포함, 4차례나 시험에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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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미상, 벨레로폰이 페가수스를 타고 키마이라를 죽이는 모습, 2~3세기경, 모자이크, 롤린 박물관 |
이쯤 되니 이오바테스 왕도 인정해야 했다.
벨레로폰. 그는 신의 축복을 받고 있었다. 그런 자가 성폭행과 같은 짓을 저지를 리 없었다. 이오바테스 왕은 벨레로폰에게 그간의 일을 고백했다. 문제의 편지도 보여줬다. “제우스 신께 맹세코, 저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벨레로폰이 말했다. 제우스가 바라보고 있을 하늘은 역시나 잠잠했다. 이오바테스 왕은 다시 한번 벨레로폰의 두 손을 잡았다. 고개 숙여 사과했다. 왕은 결혼 상대로 그가 아끼는 딸을 소개했다. 나아가 왕실 재산, 아울러 리키아 영토의 반도 내어줬다. 다만, 프로테우스 왕에게까지 그의 결백이 전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정확히 묘사되는 바가 없다.
어쨌건, 이로써 벨레로폰은 명예를 완전히 되찾을 수 있었다. 매력적인 아내, 넉넉한 금은보화도 챙길 수 있었다. 그는 이제 무서울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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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미상, 제우스와 벨레로폰, 17세기경 |
벨레로폰은 생각하지 못했다. 무서울 게 없다는 마음, 그것이 자신의 삶을 빠르게 파멸로 내몰 줄은.
벨레로폰은 이제 삶이 너무 쉬웠다. 그는 어딜 가도 영웅 대접을 받았다. 칭송과 환호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런 그의 마음에 조금씩 내려앉는 게 있었다. 건방과 교만이었다. 벨레로폰은 언젠가부터 본인 또한 신이 될 자격이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 사나운 키마이라를 무찌른 일 자체가 신의 업적과 견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제우스가 있는 올림포스산. 그곳에 닿으면 나 또한 신 대접을 받지 않을까. 위험한 생각이 솔솔 피어올랐다.
벨레로폰은 다시 페가수스에 올랐다.
고삐를 힘껏 흔들었다. 어느덧 평생 경험하지 못한 높이까지 치솟았다. 차츰 산꼭대기가 보였다. 분명 올림포스 12신이 모여있을 곳이었다. 그런데…. 웬 거대한 벌 한 마리가 별안간 주위를 맴돌았다. 녀석은 빙그르르 돌아 사라지는 듯하더니, 말의 엉덩이에 침을 깊이 찔러 넣었다. 페가수스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벨레로폰은 갑작스러운 요동을 견디지 못했다. 그대로 떨어졌다. 그렇게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신들은 주인 잃은 페가수스를 다시 거뒀다. 페가수스는 이후 제우스의 번개를 나르는 일 등을 하다 별자리가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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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딜롱 르동, 페가수스와 벨레로폰, 1888년경, 종이에 목탄 등, 53.7×36.1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벨레로폰은?
벨레로폰은 뒤늦게 눈을 떴다.
그가 있는 곳은 가시덤불이었다. 용케도 살아남았지만, 발과 다리에는 이미 가시가 촘촘하게 박혀있었다. 벨레로폰은 그때부터 제대로 걷지도, 일어서지도 못했다. 발 아닌 두 눈이 찔려 앞을 보지 못하게 됐다는 설도 있다. 벨레로폰은 자만으로 명예와 명마를 잃었다. 신에게 대놓고 미움까지 샀다. 그런 그를 좋게 보는 이는 이제 없었다. 또다시 곤경에 처한 그의 삶을 구제해 줄 사람도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다니는 길을 피해 외롭게 떠돌았다. 그러다 서서히, 그리고 확실히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벨레로폰이 추락 중 제우스의 벼락을 맞고 죽었다거나, 땅에 닿는 순간 즉사했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긴 하다.
벨레로폰은 테베의 건국자 카드모스, 메두사를 퇴치한 페르세우스와 함께 최초 세대의 용사로 꼽히기도 했다.
그렇게 별의 반열에 올랐지만, 결국은 어이없을 만큼 허무한 최후를 맞아야 했다.
아무리 큰 업적을 쌓았다고 한들 인간은 인간이었다. 당장 처한 상황이 좋아도, 나빠도 언제나 겸손하고 평정심을 유지할 것. 인생이란 한순간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는 점을 알고 받아들일 것. 그의 길고 긴 여정은 이 당연한 덕목을 재차 일깨워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참고)벨레로폰의 편지(Bellerophonic letter) : 본인도 모르게 자신에게 몹시 불리하거나 해가 되는 내용을 편지 등 형태로 직접 챙겨가는 상황을 뜻함.
변신 이야기, 오비디우스, 숲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아폴로도로스, 숲
신화의 시대, 토머스 불핀치, 열린책들
그리스 로마 신화, 헤시오도스, 오비디우스, 토마스 불핀치, 린
그리스의 영웅들, 케레니, 카를, 템스 앤 허드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