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프타값 두배 올랐는데, 팔수록 손해”…정부 ‘가격 통제’에 업계 ‘골병’ [중기+]

이재명 정부는 ‘미국-이란 전쟁’ 발발 이후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를 실시하겠다고 밝히는 등 ‘물가 안정’ 대책에 착수했다. 건설현장의 수급 가격 관리와 함께 의료제품에 대해서도 매점매석 조사에 착수했다. ‘가격 통제’에 들어간 셈이다. 그러나 현장에선 ‘재고가 충분한 상황’이라는 가정 하에 실시되는 가격 통제는 오래 가기 힘들다고 임을 모은다. [정부 대응 종합]


중동전쟁에 나프타 수급난·가격 급등
도료·건자재 업계 등 원가 쇼크 확산
가격 인상땐 담합 조사, 안 올리면 적자
재고 길어야 2~3주, 정부는 가격 통제만
현장에선 “공급 절벽이 더 무섭다”


[헤럴드경제=홍석희 기자] “공산국가도 아니고, 모든 제품의 원가가 다 올랐는데 납품가격을 기존대로 유지하라고 하면 팔수록·만들수록 손해만 커지는 상황 아니겠나.”

중동전쟁 이후 원자재값이 치솟는 와중에도 정부가 가격 인상 억제에 전방위로 나서면서 도료·건자재 업계의 불만이 거세지고 있다. 정부는 유류에는 최고가격제를 도입했고, 중동전쟁발 물가 확산을 막겠다며 특별관리 품목도 43개로 늘렸다. 페인트 업계가 가격 인상에 나서자 공정거래위원회는 담합 의혹 조사에 착수했다. 업계에선 “가격을 올려도 문제, 못 올려도 문제”라는 말이 나온다.

문제의 출발점은 나프타다. 도료, PVC, 단열재, 방수재, 실란트, 접착제, 각종 플라스틱 건자재의 기초 원료인 나프타가 전쟁 이후 빠르게 부족해졌다. 헤럴드경제 취재와 업계 설명을 종합하면 나프타 가격은 지난 2월 말 톤당 500달러 안팎에서 3월 말~4월 초 900달러대 후반까지 급등한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에선 “불과 한달 남짓한 사이 사실상 두 배 가까이 뛴 셈”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나프타 가격 급등과 수급 불안은 페인트 가격 인상과 건설현장 자재 조달 차질의 직접 배경으로 지목됐다.

건자재 업계 관계자는 “하루가 멀다하고 ‘납품 기일을 맞출 수 있느냐’는 문의 전화가 온다. 원재료가 부족하다는 것이 뉴스를 통해 많이 보도되다보니 기존 계약을 해놨던 곳들에서 오는 문의”라며 “원재료 부족 상황은 심각하다. 중소업체들일수록 재고가 모자라고 그래서 더 힘들어 진 것이 현재 분위기”라고 내부 분위기를 설명했다.

도료업계의 움직임은 빨랐다. 노루페인트와 삼화페인트공업은 3월 23일부터 제품별 가격을 20~55% 올렸고, KCC는 4월 6일부터 도료 제품 가격을 10~40% 인상하겠다고 대리점에 공문을 보냈다. 강남제비스코도 4월 1일부터 15% 이상 인상을 추진했다. 인상 대상에는 주택용 도료, 플랜트 도료, 공업용 실란트 등 건설·산업 현장에 직접 쓰이는 품목들이 대거 포함됐다.

국제 나프타 가격이 전쟁전(톤당 500달러)에 비해 거의 2배 가까이 뛴 990달러를 넘어섰다. [트레이딩 이코노믹스]


정부는 철퇴를 가했다. 공정위는 지난달월 30일 KCC, 노루페인트, 삼화페인트공업, 강남제비스코와 업계 단체를 상대로 현장조사에 착수했다. 중동전쟁 이후 원재료값 상승을 이유로 주요 업체들이 비슷한 시기에 줄줄이 가격을 올리자, 공정위는 이 과정에 부당한 합의가 있었는지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업계에선 “원가가 동시에 뛰었으니 가격 조정 시점도 비슷할 수밖에 없는데, 일단 올리면 담합 프레임부터 씌워진다”고 볼멘소리를 냈다.

실제 현장에선 인상 계획을 접거나 낮추는 사례가 잇따랐다. KCC는 1일 “정부 물가안정 기조를 반영한다”며 4월 6일부터 예정했던 10~40% 인상 계획을 전면 철회했다. SP삼화도 인상 폭을 하향 조정했고, 노루페인트 역시 일부 품목 인상 폭을 낮추거나 대상 제품을 조정했다. 공정위 조사와 정부의 물가 안정 압박이 업계 가격 정책을 사실상 되돌려 세운 셈이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의 더 큰 문제는 가격이 아니라 재고다. 업계 안팎에서는 최근 NCC 가동률이 60%대 후반까지 떨어졌고, 나프타 재고도 2~3주분 수준에 불과하다는 진단이 나온다. 도료업계 관계자는 “일단 정부 방침을 수용한다. 그러나 도료의 경우 부피도 크고 무게도 많이 나가 재고를 많이 쌓아둘 수 없다”며 “재고가 길어야 2주 정도였는데 현재는 거의 바닥이다. 가격 인상은 부차적인 문제고, 진짜 문제는 원료 공급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건자재업계 관계자도 “정부는 재고가 어느 정도 쌓여 있을 것으로 보는 것 같은데 실시간 조달 제품은 지금 들어오는 가격을 반영하지 않으면 밑지고 파는 구조가 된다”며 “적자를 감수하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지속된 물가 상승에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겹치며 국내 건설현장의 공사비 부담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초기 공정에 필요한 원유 연관 자재 수급과 마감 단계에서 쓰이는 방수재, 단열재, 창호 등의 가격 상승이 공사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다. 1일 오후 서울 시내의 한 건축자재 매장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윤창빈 기자


건설 현장도 후폭풍을 체감하고 있다. 현대건설은 최근 서울 은평구 대조1구역 재개발 조합에 보낸 공문에서 유가·환율 상승과 나프타 수급 불안으로 4월부터 페인트, PVC-플라스틱, 단열재, 방수재, 도배지, 아크릴, 시트지 등 주요 자잿값이 10~40% 오를 예정이라고 알렸다. 이어 공급 중단이 지속되면 준공 일정 조정이 불가피하다고도 했다. 이미 자재 가격 상승이 제조업체를 넘어 시공사와 정비사업 현장까지 번지고 있다는 뜻이다.

정부 입장에선 전쟁발 물가 불안 차단이 급선무다. 실제로 정부는 3월 13일부터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를 시행했고, 3월 26일에는 ‘중동전쟁 물가대응팀’을 가동하며 특별관리 품목을 43개로 확대했다. 3월 27일에는 2차 최고가격도 고시했다. 정유·유통 단계에서부터 가격 전가를 최대한 막아보겠다는 취지다. 정부는 정유사와 주유소의 담합, 매점매석 등 시장질서 교란행위에 대해 무관용 원칙으로 대응하겠다고도 밝혔다.

정부는 지금의 가격 인상을 “전쟁을 틈탄 과도한 전가”로 보지만, 업계는 “지금 들어오는 원료 가격이 이미 급등했다”는 입장이다. 재고가 많지 않은 산업일수록 이 시차는 짧다. 창고에 오래 쌓아둘 수 없는 도료와 일부 건자재는 나프타 가격 급등이 사실상 실시간으로 제조원가를 밀어 올린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유가와 원유 수급 불안은 레미콘뿐 아니라 석유화학 원료를 쓰는 자재 전반의 생산원가와 운송비를 끌어올리는 요인”이라며 “이 같은 흐름이 장기화하면 공사비 상승이 건축비와 분양가에 반영되고, 공사 현장에서는 공사비 증액이나 공기 연장을 둘러싼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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