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표현에 ‘포도넝쿨을 통해 들었다(I heard it through the grapevine)’는 말은 ‘소문으로 들었다’는 뜻이다. 꽈배기처럼 꼬인 포도 넝쿨처럼 소문이란 흔히 뒤틀려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grapevine에 정관사 ‘the’를 붙여놓아 유언비어라는 의미로 쓰이는 모양이다.
루머를 비공식적인 대중매체라고 규정하고 연구한 김복수 교수는 이를 소문과 구분지어 아예 ‘바람’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불특정 다수의 소망이나 원망(願望)을 담고 있는 함축적인 의미를 나타내려면 소문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루머의 내용대로 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대중 심리의 한켠을 꼬집은 셈이다. 루머의 생성 원인은 학문적으로 여러 측면에서 진단되고 있다. 한마디로 루머는 매스 커뮤니케이션, 즉 공적인 대중매체의 기능이 원활하지 않을 때 활발하다는 점으로 요약되고 있다.
천재지변이나 전쟁통에 통신수단이 장애를 받는 상황이라든가, 군사 쿠데타로 대중매체가 검열 당하고 권력으로부터 통제받을 때 루머가 기승을 부렸던 일은 우리 세대의 현대사를 통해서도 금세 기억해낼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 뿐 아니라 이곳 동포사회에서도 단연 화제가 되고 있는 루머는 가수 나훈아씨와 관련된 온갖 이야기들이다. 해마다 연말이면 마련해왔던 디너쇼 형식의 콘서트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이를 취소하고 운영하던 사업체들도 정리해버린 뒤 소식이 끊기면서 나훈아씨를 둘러싼 루머가 꿈틀대기 시작했다고 한다.
말할 나위 없이 인터넷의 네티즌들이 확대 재생산하는 오늘 날의 전형적인 루머 유통 과정을 거치면서 나훈아씨 관련 소문은 괴담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됐다. 급기야 부산지역 경찰청이 특별수사팀까지 편성, 루머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기초 조사에 돌입하더니 엊그제 나훈아씨가 한국에 머무르고 있음을 확인했으며 그동안의 루머들은 헛된 내용들이라는 짤막한 코멘트만 남기고 수사 종결을 선언했다.
나훈아씨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나에 관해 악소문을 낸 사람들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만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간의 루머를 개운하게 털어버리기에는 미진한 상황이다. 두어달 동안에 걸쳐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는 루머를 종식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나훈아씨 스스로 공식 매체에 등장, 근황과 경위를 직접 대중에게 설명하는 길 뿐인데도 측근들을 통해서만 심경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당장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뭘까라는 데 집착하다 보면 그와 관련된 루머는 또 다른 차원으로 번질 지 모를 일이다.
‘나훈아 루머’는 학자들이 분석한 대로 매스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이 억압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는 루머 생성의 원인과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 인터넷 시대인 오늘 날 대중들간의 소통은 거의 무제한 무방벽에 가깝다. 커뮤니케이션 기능이 통제되기 보다 그 정반대의 상황인데도 루머는 왕성하게 생산돼 세상 도처를 활보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루머를 퍼나르는 대표적인 기능인 댓글이라든가, 블로그 등을 통해 누구나 매체를 갖고 이용할 수 있는 현실에서 정보와 쓰레기같은 소문을 가려내는 일은 과연 누구의 몫일까. 신문과 방송 등 이른바 정통 저널리즘이라는 전통적인 매체들이 오히려 인터넷같은 곳에서 터져나온 미확인 정보를 주된 소스로 활용하고 있는 판국이다.
루머 수준만도 못한 뉴스와 정보를 다루다보니 정통파 저널리즘의 신뢰도는 바닥을 기고, 어딜 봐도 믿을 게 없다고 손사래치는 대중은 루머 자체가 주는 재미에 흠뻑 빠지고만 사례 – 그것이 일련의 나훈아 괴담이 아닐까 싶다. 이러다간 루머가 사실과 진실을 지배하고야말 것이라는 불길하고 불온한 생각마저 꿈틀대는 하루다.
황덕준/미주판 대표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