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헤럴드경제 창간 6주년 아침에 밖에서 보는 한국은 여전히 불안하다. 들리느니 아우성과 고함이요, 보이느니 눈을 씻고도 믿기지 않는 일 투성이니 말이다. 재벌과 대기업을 대리하는 전경련 회장은 중소기업과 상생을 채근하는 정부를 향해 “왜 우리만 갖고 그래”라며 대놓고 삿대질이다. 반값등록금과 무상급식을 둘러싼 복지포퓰리즘 논쟁은 아예 일상화돼 있다. 여당내에서조차 반대가 많은 4대강사업의 후유증이 경북 구미시를 걸핏하면 생활용수도 못쓰는 단수(斷水)의 도시로 만들었다. 장마통에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구제역 침출수는 상당히 심각한 환경 위생의 문제로 떠오른다. 인사권자인 대통령이 해외출장 중인데도 사표를 던진 검찰총장의 무례함은 어떠한가. 경찰과의 수사권조정 합의안이 불만스럽다며 칭얼대는 검사들의 체면을 살린다는 그 사퇴의 변(辯)으로 인해 1년6개월 이상 남은 정권의 심장과 혈압은 과연 괜찮을 지 심히 걱정스럽다. 해병대원의 총기 사고는 차라리 말을 꺼내기조차 두렵다. 늘 갈등과 분열로 휩싸여 있는 듯하지만 한국은 그보다 더한 혼란과 격동의 시기를 겪고 오늘에 이르렀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셋 중 하나였던 처지에서 반세기도 못 돼 세계 12위의 부자나라 대열에 들어서 있다. 가끔 찾아가는 한국은 그때마다 달라져 있다. 두어달만에 다시 가 보아도 뭔가 한두가지씩 바뀌어 있다.물론 발전적 변화다. 미국에서 볼 때면 ‘왜 맨날 저러나’ 싶던 한국의 부정적인 모습은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수도 서울의 넘치는 활기와 역동성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한국에서는 한국의 좋은 면만, 미국에서는 한국의 나쁜 면만 보려는, 즉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하는 ‘인식의 감옥’을 제멋대로 옮기고 다녀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요즘들어 부쩍 한국에서 사용되는 모국어에서 이질감을 자주 느낀다. ‘사장님’ 대신 ‘대표님’이고, ‘손님’ 대신 ‘고객님’이란다. 계약의 ‘갑·을’관계를 초월하는 ‘수퍼 갑’의 존재도 있다. ‘그 사람들이’로 칭하던 3인칭 대명사의 구어체는 ‘그들이’라는 말쑥한 문어체로 일상대화에 자주 섞여나온다. 생경스러운 만큼 신기하다. ‘오락프로’나 ‘쇼프로’로 불렀던 TV에선 ‘예능’이라는 용어가 장르의 대세로 자리잡았다. 이런 사례를 끄집어내는 자체가 핀잔의 대상이 된다.걸핏하면 따라붙는 말이 “미국 살더니 동포 촌X 다 됐네”이다. 글로 써서 점잖아 보이지만 ‘동포’라는 발음을 꼬박 세게 내질러 가슴에 작은 상처를 안긴다. 명색이 세상의 흐름을 따라잡고 산다는 미디어를 업으로 삼고 있는데도 사정이 이러하니 수년, 또는 십수년씩 한국을 경험하지 못한 이민세대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학자들이 말하는 ‘의식의 화석화’는 예상보다 심화되고 있다. 이민 올 때 가졌던 현실감각과 현실인식이 생계와 생업에 몰두하느라 세상흐름의 추세와 변화를 놓치는 바람에 고스란히 퇴적화돼 있는 상태 말이다. 두어달에 한차례씩 방문하면서도 그 간격을 따라잡지 못해 허덕거리다 보면 절로 드는 두려움이다. 그나마 몇년 사이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모국과 이민사회의 현실적 간극은 상당히 좁혀진 게 사실이다. 24시간 뉴스채널이 실시간으로 방영되고 있는데다 각종 TV프로그램도 동시 시청이 가능해졌다. 시간과 여유만 허락하면 얼마든지 한국에 가지 않고도 태평양 너머의 변화와 다름을 낚아챌 수 있다. 한국인의 특징을 양은냄비에 빗댈 때가 있다.쉽게 달아오르고 그만큼 쉬이 식는다는 것이다. 그때문에 모멘텀만 생기면 금세 몰입하는 집단적 열광의 에너지가 잘 발휘되기도 한다. 월드컵같은 국가대항 스포츠 이벤트나 사회적 이슈에 대한 촛불시위도 그같은 형태의 일종일 것이다. 평창이 고향도 아닌데 밤잠 늦춰가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의 IOC총회 생중계를 시청하느라 아파트촌의 불빛이 꺼지지 않는 것도 한국사회의 몰입과 열광의 편린이다. ‘나는 가수다’같은 예능프로에서 나타나는 출연가수들의 열창과 몰입은 가히 감동적이다. 가창력이라는 이미 입증된 재능에 감탄하는 게 아니다. 기성가수들이 진정으로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 여과없이 보여짐으로써 감동의 스토리텔링을 구성한다. 평균 15%가 넘는 시청율은 감동을 공유하고, 그 대상에 열광하는 숫자이다. 우리 한인동포들도 모국인지라 한국의 그같은 열광의 한쪽을 나눠갖는다. 평창을 응원하는 애국의 마음과 ‘나는 가수다’의 감동을 즐기는 정서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다. 정작 우리 커뮤니티 자체에선 그 못지 않은 몰입과 열광의 모멘텀은 왜 없을까. 생업에 눈코 뜰 새 없다지만 한국발 ‘열광의 대상’이 생기면 밤샘도 마다하지 않았던가. 작위적으로든 자연발생적으로든 커뮤니티 전체가 열광하고 몰입할 그 무엇이 간절하게 필요하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