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에 가장 민감한 패션업계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보수적인 분야로 분류되곤 한다.
기획부터 생산에 이르는 전과정과 특히 미국내 유통 상황은 근대화 이후 100여년 동안 큰 변화 없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날로 발전해가는 첨단 기술이 부분적으로 패션산업에 도입되고 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품이 기획돼 만들어지고 또 과거와 다름없는 경로로 소비자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올해 초부터 전 세계에 재앙처럼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 대유행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적어도 그랬다.로스앤젤레스(LA)를 중심으로 남가주 지역에서 가장 큰 경제 규모를 갖추고 그에 따른 고용창출을 하고 있는 한인 의류업계는 온라인 상거래와 바이러스 팬데믹에 따른 이동제약 등으로 패션산업의 생태계가 어찌 변할 지 모르는 상황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미주 한인커뮤니티 경제계의 버팀목인 한인 의류업계의 달라진 현장과 달라지고 있는 상황을 짚어본다.
■유통, 신구 방식의 공존
한인 의류업체 제품 개발실
새로운 기술과 홍보 방식이 다변화 됨에 따라 판매처와 방법이 다양해지고 있지만 연간 270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내 의류 소매 시장에서 아직까지 가장 큰 비중은 전통적인 오프라인 매장이다.
과거에 비해 퇴색되긴 했어도 메이시스 등 백화점 체인들과 TJ맥스와 같은 할인매장 체인, 미 전역에 수백개 대형 매장을 운영 중인 개별 브랜드 업체들은 여전히 미국 내 의류 판매의 2/3이상을 담당하고 있다.코로나 대유행과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든 자택격리가 2개월 이상 진행됐지만 여전히 이들 전통적인 유통 업체들은 창고에 재고를 쌓아두고 그때 그때 손님들이 원하는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결제 역시 최소 2~3개월 가량 유예를 원하고 있고 최근 들어서는 이 기간이 오히려 더 길어졌다는 것이 거래 중인 한인 의류 업체들의 말이다.
온라인, 모바일이 빠르게 시장을 잠식하고 있지만 여전히 매장에서 직접 옷을 보고 구매하려는 소비자들의 심리까지 쉽사리 바꾸기는 어렵다.
이런 점을 감안해 전통적인 유통업체들은 당분간 이 방식을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과 거래 중인 한인 업체들은 과거에 비해 더욱 더 제품에 대한 기획력과 일정 물량 이상의 생산력에 재고를 감당할 수 있는 기본기가 더욱 요구된다.여기에 더 길어지는 결제 주기에 대응할 수 있는 현금 유동성도 확보해야 하는 다중고에 시달릴 것으로 전망된다.
온라인과 모바일은 보다 다채로운 방식으로 제품을 소개하고 또 판매하는 방식으로 바뀔 것으로 보인다.
당분간 사회적 거리두기의 여파로 외부 활동 보다는 집을 비롯한 제한된 공간 또 제한된 사람들과 교류가 이뤄지는 상황이 유지될 것이다. 직접 만나서 보고 듣고 즐기는 방식에서 스마트폰이나 TV등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는 방식이 과거에 비해 보다 보편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를 활용한 제품 홍보와 판매가 최근 빠르게 늘고 있다.
단순히 아마존닷컴이나 각 브랜드별 웹사이트를 통해 제품이 판매되는 것을 넘어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제품 판매가 미국에서도 더 이상 실험 단계를 넘어 이제는 실생활에 보다 가까워지고 있다.
소매 판매 뿐 아니라 이미 적지 않은 도매 의류 업체에서도 제품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수단으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의 소셜미디어 라이브 방송을 활용하고 있다.
발빠른 일부 한인 의류 업체 역시 이런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책 형태로 사진과 제품 소개를 담아 인쇄하는 ‘Look Book’이 100여년간 애용돼 온 제품 홍보 방식이라면 이제는 동영상 생방송이라는 방식과 병행하는 것이 새로운 흐름이다.
라이브 방송 이후 해당 제품 홍보 동영상은 유튜브채널을 비롯한 각 소셜미디어 공간에 고스란히 남겨진다. 또 클릭이나 터치 몇 번만으로 타인에게 쉽게 공유된다는 확장성도 과거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다. 최근 몇년 사이 이른바 ‘동네 옷가게’로 불리는 각 지역의 의류 소매상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 자리를 온라인과 모바일,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비대면 가상 판매 소상인들이 채우고 있다. 유통구조의 실감나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은 발 빠르게 팔릴만한 제품을 찾기 위해 각종 소셜 미디어에 넘쳐나는 패션 관련 정보와 영상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구매한다.
변화에 맞춰 한인 업체들도 조금씩 참여하고 있는 동영상을 활용한 제품 홍보는 단순히 또 하나의 방식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도매 유통 채널 중 하나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다.
대형 유통 업체들은 여전히 대면 또는 비대면이라도 화상 회의를 통해 상대할 거래처와 제품을 평가해 거래를 결정하고 있다.하지만 중소 업체나 개인 사업 최근 달라진 홍보와 세일즈 방식에 대한 연구과 발빠른 도입이 필요하다.
|
■ 일터의 방식이 바뀐다.
필수업종을 제외한 모든 업종 종사자들에 대해 지난 3월 중순부터 각 지역마다 2개월여간 자택격리가 시행되면서 고용환경, 일터에 대한 기본 개념도 크게 달라졌다.
한인 의류업계는 우선 비용 절감을 위해 적지 않은 인력을 이 기간 감축했다. 경제가 차츰 재개되고 코로나 사태도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면 자연히 외부 활동도 늘게 되고 의류 소비도 따라서 증가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한인 의류업체 대부분이 최소 10~20%에서 많게는 절반 이상 직원들을 줄였지만 경제 활성화 이후 다시 필요한 인력에 대한 충원이 이뤄질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고용 환경이 유지될 것이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이는 매출 규모와 관계없이 진행된 10여곳의 한인 의류업주들과 전화와 화상을 통한 인터뷰 끝에 얻은 결론이다.
감성이 담기는 패션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여전히 팀원간 직접 대면 소통이 중요시 되는 디자인, 패턴, 샘플메이킹 등 개발담담 부서는 당분간 출근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회계, 물류, 전산 지원 등 관리직군은 비대면 근무가 가능하다는 것이 이번 자택격리 시대를 겪은 한인 의류업주들의 반응이다.
한인업계는 지난 10여년간 주요 거래처를 통해 납품 단가 인하를 요구받는 바람에 인력 효율화를 이뤄왔다.
하지만 단순히 인력 감축과 추가 업체 배당이라는 방식으로만 인력 운영이 진행돼 왔다.
이번 자택격리와 강제적인 운영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으면서 인력 운영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본격화하고 있는 셈이다.
■탈(脫·Exit) LA?
단계별 경제재개와 함께 현재 거점인 LA를 떠나려는 움직임도 과거에 비해 빨라질 것으로 업주들은 전망했다. 수년전부터 거론돼 온 라스베가스가 한인 의류업주들의 운영 비용 절감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캘리포니아처럼 창고에 쌓여있는 제품도 재산으로 책정해 재산세를 부과하는 납세제도가 네바다주에는 없다.
이미 1시간당 15달러가 된 캘리포니아에 비해 네바다주의 최저임금은 8.25달러로 절반 수준이다. 종업원 상해보험률은 1/3에 불과하고 창고 임대료 역시 최근 크게 올랐지만 라스베가스에서 나름대로 비싼 지역이 LA에 비교해 절반 이하 수준이다.
최근 2~3년 사이 아마존닷컴을 비롯, 대형 온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의 대규모 물류 인프라가 라스베가스로 옮겨간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인 의류업계는 항구에 맞닿아 있고 회사 본사도 LA에 있어 쉽사리 공장이전을 꺼리는 게 사실이다.하지만 철저한 시장 조사와 연구를 통해 단계별 이전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취재에 응해준 업주 대부분의 의견이다.
어떤 업체는 경제재개 이후 지난해 같은 기간 보다 두배 가까운 판매 증가를 겪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연초부터 중국 등 아시아지역에서 확산된 코로나의 여파로 생산 주문을 업체들마다 취소하던 때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뚝심있게 생산을 진행해 위험을 감수했던 업체들은 모두 경재 재개 이후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온라인과 모바일 등 전세계 대상 비대면 유통망을 10년 넘게 꼼꼼하게 챙겨온 업주 역시 사실상 경제 봉쇄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도 오히려 더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위기라는 말이 많고 곧 업계 전체가 망할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많은 이들의 걱정이 현실이 돼 남가주지역 한인 경제계에 더 큰 어려움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위기 속에서도 새로운 시도와 더 큰 노력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선도적인 업체들이 있어 한인 의류업계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이경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