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 생존자 “안전의식 아직도 결핍…비슷한 사고, 일상 습격할것”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26주기를 앞두고 만난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의 저자 이선민 씨. 주소현 기자/addressh@heraldcorp.com

[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생존자가 국내외에서 잇따라 발생한 건물 붕괴 사고들을 두고 “안전 의식 결핍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최소한의 안전을 지키지 않으면 이런 사고들은 쪼개져서 계속 우리의 일상을 습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산만언니’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작가 이선민(45) 씨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26주기를 하루 앞둔 28일 헤럴드경제와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씨는 2018년부터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생존자로서 겪은 후유증 등을 인터넷에서 연재해 오다 이들 글을 묶어 지난 11일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라는 책을 발간했다. ‘삼풍 생존자’ 중에서 사고 이후의 이야기를 책으로 담아낸 이는 이씨가 처음이다.

플로리다·광주 참사 전조 곳곳…“‘우연’ 아니라 ‘인재’”

이씨는 미국 플로리다 아파트 붕괴 사고에 대해 “팬케이크 같이 무너졌다는 표현이, 그 사이에 사람이 껴 있다는 게 너무 끔찍하다”며 “‘삼풍 사고’도 플로리다 아파트 붕괴와 똑같이 당했지만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이씨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어디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사고인데 관리 감독, 감리 등이 잘 됐다면 사전에 사고를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플로리다 아파트가 붕괴 사고뿐 아니라 17명의 사상자를 낸 광주 학동4구역 재개발지역 철거 건물 붕괴 사고 역시 전조가 곳곳에 있었다.

대형 참사와 관련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사고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이씨는 ‘우연’이라는 표현에는 선을 그었다.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인재’(人災)였기 때문이다. 이씨는 ‘사고 당일 오전에 5층인지 6층인지 식당가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가 아예 어긋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자신의 책에 적었다.

삼풍백화점·광주 철거 건물·플로리다 아파트 붕괴 사고, 쿠팡 덕평물류센터 화재, 평택항 이선호 씨 사망 사건, 세월호 참사 등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게 이씨의 생각이다. 이씨는 “이 같은 대형 인명 피해가 되풀이된다면 누가 불안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버스를 탈 수 있겠느냐”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씨는 기적을 바라는 마음조차 조심스러워졌다. 미국 플로리다 12층 아파트가 붕괴한 지 나흘이 지났지만 150여 명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상자 수에 따라 사회적 충격만 다를 뿐 대형 인명 피해는 우리에게 분명한 영향을 미치는데 사람들이 인식을 못한다”며 “괜찮을 거라는 막연함을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스쳐간 죽음이 언제 반복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26주기를 앞두고 만난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의 저자 이선민 씨. 주소현 기자/addressh@heraldcorp.com

26년이 흘렀음에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이씨에게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당시 갓 성인이 됐던 이씨는 재수생 생활 중 1개월 동안 삼풍백화점 지하 1층 물품보관소에서 손님들의 짐을 맡아주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건물 상판이 한층씩 차례로 무너져 내린 탓에 이씨와 함께 지하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망했다. 당시 이씨는 근무지인 물품보관소에서 식품 코너로 발걸음을 떼자마자 ‘등 뒤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 왔다’고 기억했다.

이씨는 사고 이후 ‘배웠든 가난하든 한 순간에 죽어버리는데 대학은 왜 가고 아이는 왜 낳지’라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는 “뭘 해도 재미가 없는 인생을 꾸역꾸역 나이 먹으며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이를 모르는 채로 열아홉에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며 “그 사고의 여파가 나을 듯 계속 발목을 붙잡아서 지긋지긋하게 쳐내도 떨어지지 않는 악몽과 같았다”고 말했다.

극적으로 죽음의 경계를 지나온 이씨는 이후 극심한 무기력과 조울에 시달렸다. 사고의 영향은 10여 년이 흐른 이후에도 나타나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이씨는 “사람들은 대단히 감사해하고 매일이 선물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생존게임’에서 살아난 기분은 그렇지 않다”며 “날 스쳐간 죽음이 언제 반복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고 털어놨다.

“생존자·유족의 자격을 묻는 시대…불행한 소수의 일 아냐”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이씨의 가장 큰 바람이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생존자들이 한때 세간의 관심을 받았던 때도 있었으나 이들도 이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자취를 감췄다. 이씨는 당시에는 구조 현장에 주먹밥이라도 싸 갖고 와서 돌리는 등 우호적인 분위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대형 인명피해 생존자들에게 ‘너는 살아 남았지 않느냐’, ‘보상금을 얼마 받았느냐’고 물어보는 시대가 됐다고 자조했다.

이씨 역시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인터넷상에서 글을 연재하는 동안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생존자임을 증명하라는 이들을 맞닥뜨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눈총과 비난을 무릅쓰고 단행본을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 상처만 돌보느라 이기적이었던 건 아닐까’하는 부채감 탓이었다.

그는 “우리 세대가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경제적으로는 지탱했지만 안전이나 시민의식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그 괴리가 무너질 때 희생자나 유족의 자격을 따져 묻게 되는 것 같다”며 “일부 불행한 소수의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6월 29일마다 기분이 어떻냐’는 질문을 종종 받지만 오히려 이씨는 그날을 지나치고 나서야 알 때가 많다고 했다. 습하고 더운 날이면 이씨는 ‘그맘때도 이런 날씨였지’하고 떠올릴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이씨는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나처럼 한 방 얻어맞더라도 너희들도 그 시간들을 지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다”며 “일상을 되찾아 가겠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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