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예비경선 후보의 이른바 ‘미 점령군’ 발언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강력한 비판을 제기하면서 때아닌 역사 논쟁이 정치권을 달구고 있다. 야당인 국민의힘에서도 이 지사의 발언을 맹비난하고 나섰다. 학계에선 학술적 측면에서 이 후보의 발언이 사실에 부합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도 있다. 다만 정치적 득실 측면에서 이번 역사 논쟁이 중도층 표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는 기류가 전문가들 사이에선 강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5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친일 논란을 일으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자체를 폄하하려는 시도는 국민 분열을 통해 정치적 이득을 보고자 하는 얄팍한 술수다. 이미 이재명 후보는 2017년 출마할 때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묘소를 참배할 수 없다며 분열의 정치를 정체성으로 삼았다”며 “민주당은 분열의 길을 미래로 삼을 것인지 궁금해진다”고 비판했다.
이날 민주당 오전 최고위 회의에선 이재명 후보의 ‘미 점령군’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이낙연 민주당 예비경선 후보는 이날 라디오에서 “(이 후보의 발언이) 학술적으로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정치인은 어떤 말이 미칠 파장까지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이재명 후보의 ‘미 점령군’ 발언 논란은 지난 1일 출마 선언 당일 경북 안동 이육사 문학관에서 이 후보가 “대한민국이 친일 청산을 못 하고 미 점령군과 합작해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는 발언에서부터 시작됐다. 논란이 격화되자 이 후보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승전국인 미국 군대는 패전국인 일제의 무장해제와 그 지배영역을 군사적으로 통제했으므로 점령군이 맞다. 이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고증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윤 전 총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광복회장의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란 황당무계한 망언을 집권 세력의 차기 유력 후보인 이 후보도 이어 받았다”며 “온 국민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미군과 소련군이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진주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고증이 끝난 팩트다. 역사학자와 정치인의 화법이 달라야 한다는 믿음 자체가 오늘날 한국의 역사가 왜곡된 원인”이라고 했다.
반대로 국민대 박휘락 교수는 “민주당 내 좌파 성향의 인물들 가운데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약하다는 인식을 가진 인사들이 있다. 이 후보의 이번 발언 때문에 이 후보의 역사 인식이 편향돼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며 “점령이란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미군정이 한국 정부에 자율성을 부여해 스스로 국가를 만들도록 도와줬다는 측면에서 ‘점령’이란 단어는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말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이재명 후보의 발언이 학술 토론회에 나온 역사학자의 발언이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발언이 나온 장소가 하필 이육사 기념관이고, 발언이 나올 즈음 광복회장의 ‘소련군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이란 발언이 있었다. 이 후보의 발언 가운데 국민들의 머리속에 남는 것은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진 이재명’아니겠느냐. 한미 공조가 중요한 시점에서 나온 이 후보의 발언은 중도층의 등을 돌리게 만드는 발언이 될 것”이라 말했다.
홍석희·정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