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근현대 속 얽힌 인연들…장편 서사시 ‘작은 땅의 야수들’

재미 작가 김주혜 장편 데뷔작…전미 매체들 추천·해외 판권 수출

한국 상징 ‘호랑이’에 주목…기생 ‘옥희’와 고아 출신 ‘정호’가 주인공

재미 작가 김주혜
재미 작가 김주혜[다산책방 제공] 

 

“독립운동이나 한국의 근대사는 지금과 상관없는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입니다. 그렇게 이타적으로 몸 바친 사람들이 있었기에 한국의 역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김주혜(35)는 장편소설 데뷔작 ‘작은 땅의 야수들’(Beasts of a Little Land)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는 말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이 책은 지난해 12월 미국에서 출간된 후 전미 30여 개 매체 추천 도서에 선정되고 10여 개국에 판권이 팔리는 등 주목을 받았다. 국내에는 이달 28일 박소현 번역으로 다산책방을 통해 정식 출간된다.

작가는 미국의 문학 포털 사이트 ‘리터러리 허브’(Literary Hub)에 기고한 글에서는 “20세기 초 한국을 배경으로 쓰기를 선택한 이유는 바로 그때가 전면적인 투쟁의 시기였기 때문”이라며 “시대적 억압과 폭력, 부당함은 곧 역설적으로 그 시대에 필요했던 용기, 충성심, 연민의 가치를 극명하게 강조해 줬다”고 밝힌 바 있다.

600쪽 분량의 소설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부터 해방 이후 1965년까지 약 50년간 한반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독립 투쟁과 격동의 세월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일제강점기 재일조선인 4대 가족사를 다룬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장편소설 ‘파친코’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소설은 가난한 농부의 맏딸로 10살에 기생으로 팔려 간 ‘옥희’(제이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또 다른 주인공은 고아 출신 ‘정호’로, 모두 주류에서 비켜난 인물들이다. 다소 길지만 디테일한 장면 및 심리 묘사 등으로 인해 흡인력이 있다. 여러 인연으로 얽히고설킨 인간 군상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엔 ‘사랑’과 ‘희망’이란 결론을 마주한다.

'작은 땅의 야수들' 미국 출간본 표지
‘작은 땅의 야수들’ 미국 출간본 표지[다산책방 제공] 

작가는 사랑과 우정, 전쟁과 구원 등의 메시지가 담긴 소설에서 한반도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호랑이에 주목했다. 용맹함과 강인함을 상징하는 야수인 호랑이는 식민지 시절 저항의 이미지로 그려졌다. 물론 야수는 식민 지배와 전쟁 등을 겪으며 인간성을 잃고 배신하며 야만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소설의 첫 문장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시작한다.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 처음으로 해가 떠오르기 전 태초의 시간 같았다.”(THE SKY WAS WHITE AND THE EARTH WAS BLACK, LIKE AT THE BEGINNING of time before the first sunrise.)

긴 역사는 1917년 눈 내리는 겨울 평안도의 깊은 산속에서 시작한다. 추위 속에서 굶주림과 싸우며 사냥감을 쫓던 사냥꾼 ‘경수’는 길을 잃고 쓰려졌다가 일본 장교 야마다에 의해 발견돼 간신히 살아난다. 이후 일본군 무리와 함께 이동하던 경수는 기지를 발휘해 일본인들이 호랑이의 공격을 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옥희는 1918년 평양에서 ‘은실’이 운영하는 기방에서 기생 견습생으로 시작해 서울에 있는 ‘예단’의 기방으로 옮겨간다. 옥희는 기생이 익혀야 하는 다섯 가지 기예 중 시에서 특출난 능력을 보인다. 기방에서 나와 한때는 조선극장 소속 유명 배우로 승승장구하고, 경수의 아들 정호, 연하남 ‘한철’과 삼각관계를 이루기도 한다.

작가는 기생을 교육을 잘 받아 재주가 많고, 낭만적이며,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여성으로 그려낸다. 뛰어난 예술인이면서 독립운동에 동참하는 모습 등을 통해 일제에 의해 매춘부로 왜곡된 한국 기생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옥희는 사랑의 결실을 이루진 못하지만, 제주 해녀가 되는 길을 택하며 운명을 개척한다. 말미엔 “삶은 견딜 만한 것”이라고 되뇐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김주혜
한국계 미국인 작가 김주혜[김주혜 홈페이지 캡처] 

옥희 외에도 다양한 인물이 서로 ‘인연’으로 엮인다. 고아 출신 깡패였지만 독립운동에 나서고 국회의원이 되는 정호, 인력거꾼에서 한국 최초 자동차 제조 공장 회장이 된 한철, 기방 주인 은실의 두 딸 ‘월향’과 ‘연화’, 조선총독부 치하에서 특혜를 받으며 사는 출판사 대표 ‘성수’, 상해와 만주를 오가며 비밀리에 독립군을 결성한 성수의 친구 ‘명보’ 등이다.

소설은 민간인들을 강간하고 잔혹하게 살해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모든 한국인에게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제한 사례도 지적한다. 3·1운동 현장에 나와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미국 총영사가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점, 워싱턴을 찾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미국이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점 등도 짚는다.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음을 맞는 정호는 마지막 면회를 온 옥희와 재회하며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한 게 제일 아쉽고 후회스럽게 생각한다”고 평생 마음에 묻어둔 말을 꺼내며 화해한다. 사랑했던 인연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옥희는 “삶을 계속 놓아주고 또 붙잡고 버티면서” 생에 대한 의지를 다잡는다.

인천에서 태어나 9살에 미국으로 이주한 작가는 프린스턴대에서 미술과 고고학을 공부했다. 2016년 저명한 영국 문학잡지 ‘그란타’에 단편소설 ‘보디랭귀지’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여러 신문과 잡지에 수필과 비평 등 기고문을 써왔다. 2019년에는 고(故) 최인호 작가의 단편 ‘이 지상에서 가장 큰 집’(The Biggest House on Earth)을 번역했다.

기후 변화와 채식을 비롯해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작은 땅의 야수들’ 인세 수익의 일부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기반을 두고 시베리아 호랑이와 아무르 표범을 보호하는 비영리 단체 ‘피닉스 펀드’에 기부하고 있다.(연합)

'작은 땅의 야수들' 표지 가안
‘작은 땅의 야수들’ 표지 가안[다산책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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