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국경세·유럽반도체법…EU ‘유럽판 IRA’로 미국에 응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15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EU 정상회의가 끝난 후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EPA]

미국에 이어 유럽도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각종 보조금 정책을 꺼내들면서 수출에 기대고 있는 한국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각국 정책에 따라 현지 생산을 늘릴 경우 국내 산업이 공동화될 가능성도 있다.

우르줄라 폰 데 라이언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지난 14일(현지시간) 유럽의회 본회의에서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비판하며 “우리는 우리의 유럽식 IRA로 답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기조와 북미산 전기차에 한정한 각종 세금감면 및 보조금 혜택 등을 IRA의 차별적 요소로 지적했다. 불공정 경쟁으로 EU 기업들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EU가 역내 투자를 유치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튿날 로베르타 메촐라 유럽의회 의장도 기자회견에서 IRA에 대해 “지금은 우리가 동맹들과 무역전쟁을 할 때가 아니다”며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를 비판했다.

이달초 미국과 EU는 제3차 무역기술위원회(TTC)를 열고 IRA와 관련한 논의를 이어갔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이 지지부진해지자 유럽도 보조금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라이언 집행위원장은 다음달 중 IRA에 맞서 EU에 투자한 기업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공공 투자를 확대하기 위한 계획을 내놓겠다고 예고했다.

내년 초 유럽의회 표결만 남겨둔 ‘유럽 반도체법(The European Chips Act)’ 역시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이다. EU는 오는 2030년까지 전세계 반도체 생산 시장 점유율을 현재 9%에서 20%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반도체법을 통해 430억유로(약 59조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기후변화 등 환경 이슈를 활용하기도 한다. EU는 이르면 2026년부터 생산 과정에서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철강 등 수입 공업품에 대해 탄소 국경세를 부과하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오는 16~17일 CBAM이 도입되면 탄소세 부과 기준이 될 배출권 거래제(ETS) 개편의 시기 등이 확정될 전망이다.

CBAM은 온실가스 배출 규제가 약한 국가에서 생산된 제품을 EU로 수출할 때 제품의 탄소 배출량 추정치를 EU ETS와 연동해 가격을 부과하는 조치다. 적용 대상 품목은 철강·알루미늄·비료·시멘트·전력·수소 등으로 결정됐다. 수소의 경우 집행위 초안에 빠져있다가 협의 과정에서 추가됐다. 본격 시행에 앞서 유기화학물질, 플라스틱 등도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제조 공정에서 사용되는 전기를 생산할 때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을 의미하는 ‘간접 배출’도 규제 대상으로 포함됐다. 잠정합의에 따라 내년 10월부터 수출 대상 기업은 관련 사항을 보고해야 한다. ETS 개편 시기에 맞춰 3~4년 정도 준비 기간을 거쳐 본격 시행할 계획이다.

CMAM이 시행되면 한국 등 수출국 입장에선 일종의 추가 관세를 내는 효과가 있는 만큼 ‘무역장벽’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한국은 지난해 EU지역에 ▷철강 43억달러 ▷알루미늄 5억달러 ▷시멘트 140만달러 ▷비료 480만달러의 물품을 수출한 바 있다. CBAM이 본격 시행되면 생산비 증가와 부수적 행정비용이 급증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본격 시행에 앞서 EU에 CBAM 적용 면제 등 예외 조치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 EU 당국자를 만나 한국이 EU ETS와 유사항 형태로 K-ETS를 운영중인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원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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