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필하모닉의 2024~2025 시즌 상주 음악가 조성진(왼쪽)과 상임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 [연합]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연주자는 학교든 단체든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는다면 방황하기 쉬운데, 한 곳에 속해 1년간 정기적으로 설 수 있는 무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알찬 성장의 기회가 됐어요.” (2023년 마포문화재단 초대 M아티스트 김도현)
피아니스트 조성진·김준형, 첼리스트 한재민, 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 이 연주자들의 공통점이 있다. 올 한 해 유수의 클래식 공연장, 오케스트라가 선택한 ‘얼굴’이라는 점이다.
최근 국내외 클래식 음악계는 ‘상주음악가(Artist in Residence)’ 발굴에 적극적이다. 젊고 재능있는 음악가들을 초청, 자신만의 음악을 들려줄 무대를 정기적으로 마련해주는 프로그램이다. 1년 동안 3~4번의 굵직한 콘서트를 선보이는 상주음악가 제도는 그 해 해당 공연장과 오케스트라의 ‘킬러 콘텐츠’가 된다.
국내 클래식 음악계에 상주음악가 제도가 도입된 것은 2005년. 통영국제음악제가 처음으로 들여왔고, 금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금호아트홀이 공연장 최초로 시도했다. 금호문화재단 관계자는 “지속가능한 콘텐츠가 공연장의 화두로 떠오르는 때에 공연장과 예술가가 손잡고 함께 무대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상주음악가의 기본 ‘요건’은 탄탄한 기획력과 연주력을 가졌는 지 여부다. ‘인하우스 아티스트’라는 이름으로 상주음악가 제도를 운영 중인 롯데콘서트홀 관계자는 “(상주음악가를 선정할 때) 일정 기간 동안 다양한 레퍼토리를 완성도 있게 소화해 다채롭고 전문화된 프로그램을 구성할 수 있는 지를 본다”고 말했다. 롯데콘서트홀의 2024년 상주음악가는 첼리스트 한재민(18)이다. ‘첼로 신동’으로 불렸고, 2021년 열다섯의 나이에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주인공이다.
2024년 롯데콘서트홀 인하우스 아티스트로 선정된 첼리스트 한재민 [롯데문화재단 제공] |
마포문화재단은 지난해 처음으로 ‘M아티스트’라는 이름의 상주음악가 제도를 시작하면서 피아니스트 김도현(30)을 위촉했다. 마포문화재단 관계자는 “M 아티스트는 매년 거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클래식 연주자를 선정한다”고 말했다. 올해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25)을 발탁했다. 2019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선 3위, 2018년 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선 우승을 차지했다. 김동현은 2022년 금호아트홀의 상주음악가를 맡기도 했다.
금호문화재단은 긴 시간 지켜봐 온 음악가들을 ‘간판’으로 내세운다. 그동안 재단이 선정해온 금호 영재, 영아티스트, 라이징스타로 활동했던 음악가 중 ‘다음 단계로의 도약이 필요하고 기대되는 사람’을 상주음악가로 뽑는다. 초대 상주음악가는 피아니스트 김다솔이었고, 이후 선우예권·박종해·김수연·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이지윤·조진주·첼리스트 문태국·클라리네티스트 김한 등을 발탁했다. 2012년 금호영재콘서트로 데뷔한 피아니스트 김준형(27)은 금호아트홀의 12번째 상주음악가다.
한국 ‘클래식계의 슈퍼스타’ 조성진(30)은 세계 최정상 악단 베를린 필하모닉의 2024~2025 시즌 상주음악가로 발탁되며 화제가 됐다. 한국인 연주자로는 처음이고, 아시아 연주자로는 일본 피아니스트 미츠코 우치다에 이어 두 번째다.
마포문화재단의 2024년 M아티스트로 선정된 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 [마포문화재단 제공] |
지난해 한국을 찾은 안드레아 쥐츠만 베를린 필하모닉 대표는 조성진을 베를린 필의 ‘얼굴’로 선택한 사실을 기습적으로 공개했다. 베를린 필의 상주음악가가 되면 1년 동안 1~2개의 협주곡과 실내악 프로그램을 연주하는 무대를 갖는다. 여기에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베를린 필하모닉의 카라얀 아카데미에 속한 30명의 음악가들과 함께 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특전도 주어진다. 쥐츠만 대표는 “조성진은 매우 직관적인 음악가”라며 “최대한 음악가의 다양한 면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주음악가 제도는 공연장과 악단, 예술가 모두에게 ‘윈윈(win-win)’다. 젊은 음악가들이 상주음악가로 보내는 1년간 자신의 색깔을 찾는 ‘도전의 시간’이자, 안정된 지원 속에 과감하게 꿈을 펼치는 ‘발전의 기회’다.
김동현은 “연주자로서 직접 공연 프로그램과 협연자를 고민하고 무대를 꾸려나갈 수 있다는 점이 음악가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2021년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였던 김한은 “언젠가 꼭 해보고 싶었던 레퍼토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고,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를 관객들에게 가까이 느끼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2017년 금호문화재단, 2022년 롯데콘서트홀의 상주음악가로 활동한 문태국은 “음악가는 섣불리 해보지 못했던 레퍼토리에 도전할 수 있고, 관객들은 자주 들어보지 못한 곡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피아니스트 김준형 [금호문화재단 제공] |
공연장과 오케스트라의 입장에서도 재능 있는 음악가를 ‘핵심’ 콘텐츠로 확보해 브랜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 베를린 필과 조성진의 ‘만남’은 상주음악가 제도 안에 숨은 전략적 파트너십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베를린 필이 조성진을 상주음악가로 선정한 것은 그가 한국을 넘어 클래식 본토에서도 인정받는 세계적인 음악가가 됐다는 방증인 동시에 한국 클래식 시장의 가치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의미로 본다.
류태형 음악평론가는 “베를린 필이 조성진이라는 음악가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자, 아시아 특히 한국 시장을 각별히 고려한다는 의미”라며 “베를린 필이 주력하는 디지털 콘서트홀의 구독자 확보와 안정적인 수익 창출을 위해 디지털 강국인 한국 시장을 염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내에선 금호아트홀을 비롯해 롯데콘서트홀, 통영국제음악제, 마포문화재단, 서울시립교향악단, 더하우스콘서트, 부산시립교향악단 등이 상주음악가 제도를 운영 중이다. 상주음악가 제도는 궁극적으로 클래식 음악계의 건강한 생태계를 만드는 데에도 일조한다. 롯데문화재단 관계자는 “보다 세분화되고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통해 일반 대중부터 클래식 애호가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호에 맞게 접할 수 있어 클래식 음악계에 선순환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봤다.
다만 제도 운영의 어려움은 존재한다. 클래식계 관계자는 “민간 공연장에서 상주음악가를 초청하는 운영 여건을 갖춘 공연장이나 재단이 많진 않다”며 “국내 클래식계의 하드웨어와 연주자들의 활동 기반 제약이 맞물린 만큼 제도 운영을 위해 재정과 환경 등 극복해야 할 난관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