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관련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 1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연합] |
[헤럴드경제=박지영 기자]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둘러싼 부당 승계 의혹이 8년 만에 첫번째 종지부를 찍었다. 2020년 9월 1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재판에 넘겨진 뒤 1252일만에 치러진 1심 재판에서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5-2부(부장 박정제 지귀연 박정길)는 자본시장과금융투자업에관한법률위반(자본시장법), 주식회사의외부감사에관한법률위반(외부감사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 등 전·현직 삼성 관계자와 삼정 회계법인 관계자 14명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검찰이 항소할 경우 2심과 대법원까지 갈 가능성도 있다.
이날 오후 1시 40분께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한 이 회장은 굳은 표정으로 법정에 앉아 재판부를 기다렸다. 이 회장은 허리를 꼿꼿하게 피고 자리에 앉아 시종일관 담담한 모습으로 선고를 들었다.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하자 변호인과 삼성 관계자들이 앉은 방청석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이 회장은 재판부가 퇴정하고 나서야 옅은 미소를 띄우며 긴장을 풀었다. 생수를 마시며 목을 축이는 등 비교적 여유로워진 모습이 눈에 띄었다.
1심 재판부의 선고는 단호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목적은 경영권 승계와 무관하며 합병 과정에서 미래전략실의 부적절한 개입도 없었다고 판단했다. 또 합병비율(삼성물산 0.3 : 제일모직 1)과 합병 시점이 삼성물산 주주에게 특별히 불리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검찰이 경영권 승계를 위해 삼성그룹이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시세 조종, 허위 정보 유포, 회계 조작 또한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양사 합병은 초기 단계부터 경영 목적으로 진행됐으며 삼성물산 주주들이 피해를 입지도 않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오래 전부터 예상되던 시나리오 중 하나로 미래전략실 또한 지배구조 개편 관점에서 여러 방안과 함께 검토한 적 있다. 미래전략실이 전단적으로 합병을 검토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며 “삼성물산과 삼선물산 주주의 이익이나 의사가 도외시 된 바 없다. 성장 정체 및 위기 극복을 위해 경영실, 미전실, 합병 TF 등을 통해 심도 있게 검토해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이 컨트롤 타워가 돼 ‘이재용 승계’를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각사 의견을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합병을 추진했다는 검찰의 주장을 전면 부정한 셈이다.
특히 검찰이 제시한 핵심 증거였던 ‘프로젝트G(Governance)’와 ‘엠사 합병 추진안’ 등 2개 문건에 대해 “막대한 상속세 납부에 따른 지분 감소, 상속으로 인한 지분율 변화와 아울러 순환 출자 등 내부 규제 환경 변화에 따른 대응 보고서다. 합병 추진안 또한 각사의 합병 필요성, 장애 사유, 시너지 유무 등 합병을 전제로 발생 가능한 문제를 검토하는 것일 뿐 검찰이 주장하는 약탈적·불법 승계 계획안이라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삼성바이오에피스 회계 부정 의혹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검찰은 제일모직에게 유리한 합병비율 산출을 위해 핵심 계열사인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의 회계 장부를 조작해 기업 가치를 부풀렸다고 주장했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삼성바이오로직스와 미국의 제약사 바이오젠이 합작해 2012년 설립한 회사다. 특히 삼성바이오에피스는 ▷바이오젠 콜옵션 의도적 누락 ▷삼성바이오로직스 종속회사→계열회사 변경 통한 4조원 매출 증대 착시 등 수년간 회계 조작 의심을 받아왔다.
하지만 재판부는 바이오 업계 특성에 따른 회계일 뿐 분식 회계와는 무관하다고 판단했다. 먼저 콜옵션 누락에 대해서는 “바이오젠이 보유한 콜옵션은 에피스 설립 초기 리스크를 회피하고 안정되면 사용하는 것으로 2011~2013 회계연도에서는 바이오젠이 콜옵션 행사로 얻을 수익이 크지 않았다. 실질적 권리라고 보기 어렵다”며 “반드시 공시해야 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합작법인 설립 당시 삼성바이오로직스와 바이오젠의 지분은 각각 85%, 15%였다. 바이오젠은 에피스 전체 주식의 절반(50%-1주)를 사들일 수 있는 콜옵션을 보유하고 있었다. 재판부는 초기 투자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바이오 업계의 관행으로 콜옵션이 주주와 회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실질적 권리’가 되기 전까지는 공시 의무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2015 회계연도에서 삼성바이오에피스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종속회사에서 관계회사로 변경된 것 또한 회계 조작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삼성바이오에피스가 종속회사인 경우에는 회계 상 지분 가치가 장부가액(3000억원)으로 인식되지만, 관계회사의 경우에는 공정시장가액(4조 8000억원)으로 인식한다. 검찰은 이를 두고 매출 부풀리기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2014년까지는 바이오젠이 보유한 콜옵션이 실제 권리가 아닌 회계상 방어권에 불과했다”며 “2015년 바이오젠의 콜옵션이 (실질적) 권리가 돼 지배력 판단에 영향을 끼쳐 반영됐다. 피고인과 삼정회계법인은 올바른 회계 처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분식회계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2015년 삼성바이오에피스가 개발한 바이오시밀러 2종이 판매 승인을 받는 등 수익화가 뚜렷해지면서 바이오젠의 콜옵션 행사 가능성이 높아졌고, 이를 반영해 회계 기준을 변경했다는 삼성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 회장측 변호인인 김유진 김앤장 변호사는 선고 이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판결로 삼성물산 합병과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처리가 적법하다는 점이 분명히 확인되었다고 생각한다.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신 재판부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