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증시로는 대한민국에 희망은 없다 [홍길용의 화식열전]

천간(天干)은 6가지 색(靑綠赤黃白黑)을 상징한다. 으뜸인 ‘갑(甲)’은 푸른색이다. 갑진(甲辰)년은 청룡의 해다. 청운(靑雲)의 꿈을 품어야 할 청년들의 해다. 용(辰)의 모습은 여러 동물을 조합했다.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머리털은 사자, 귀는 소, 눈은 토끼, 코는 돼지, 몸은 뱀, 비늘은 잉어, 발톱은 독수리, 발바닥은 호랑이다. 평범한 동물도 여의주를 얻으면 용이 될 수 있다. 여의주는 희망이다.

청년은 미래의 희망이다. 희망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다. 경제적으로는 미래에 경제적 안정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다. 우리 청년들은 이런 믿음을 품고 있을까? 초저출산의 뿌리에 ‘아이가 지금보다 못한 미래에 살 수 있다’는 불안이 있지 않을까? 자산가격 상승으로 근로소득만으로는 경제적 안정을 이루기 어려워졌다. 자본소득이 중요한데 우리 증시는 청년들에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뉴욕연방은행(Federal Reserve Bank of New York)은 40세 미만 미국인들의 부(wealth)가 2019년 이후 80%나 늘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같은 기간 중년(40~54세), 장년 이상(55세) 이상의 부는 각각 10%, 30% 늘었다. 청년의 금융과 부동산 자산은 모두 50% 이상 증가했다. 중년은 금융이 20%, 부동산이 40% 커졌고, 장년 이상은 부동산으로만 자산을 40% 불렸다.

2019년 이후 미국 자산시장을 보면 집값은 40% 가량 올랐지만 증시는 100% 이상 상승했다. 미국 S&P500이 최근 5000을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차입을 수반하는 부동산은 자산 형성이 덜 된 청년이 뛰어들기 쉽지 않은 자산이지만 증시는 진입장벽이 낮다. 코로나19 대유행 기간 동안 정부가 지급한 각종 보조금과 수당 등으로 미국 청년들은 증시에서 자산을 크게 키울 수 있었다.

중년 이상도 청년 못지 않게 증시 상승의 덕을 봤다. 보유자산 규모가 커 청년 보다 증가율은 낮지만 액수는 훨씬 크다. 2019년 기준 미국 인구의 37%를 차지하는 40세 미만은 전체 부의 5.7%만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의 퇴직연금은 주식 비중이 높다. 중장년이라도 노후자금이 든든하면 소비를 줄일 이유가 적다. 소비가 활발히 이뤄져 경기가 좋아지면 청년에게 새로운 양질의 일자리가 생긴다.

우리나라를 보자. 주요 10개국의 13개 주가지수의 2019년 이후 현재까지의 수익률에서 코스피와 코스닥은 거의 꼴찌다. 청년들이 주식으로 자산을 크게 불릴 수 없었다는 뜻이다. 우리 청년들이 증시 대신 뛰어든 곳은 부동산과 코인이었다. 부동산은 차입이 중요하다. 차입능력은 소득에 비례한다. ‘영끌’을 해도 소득이 적은 청년들이 양질의 부동산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청년에 코인이 가장 만만한 자산이 됐다. 증시 부진 덕분에 우리 가상자산시장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가 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동성이 큰 탓에 코인 투자로 큰 수익을 실현한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결국 지난 4년간 미국과 우리나라의 부의 격차는 청년들 사이에서 더 크게 벌어졌다. 그나마 미국 주식에 투자한 이들이 현명했다. 경제적 희망을 모국이 아닌 미국에서라도 찾았으니.

중장년은 경제력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중상층은 최근 몇 년간 집값 급등 수혜를 톡톡히 봤다. 높은 차입 여력으로 양질의 자산에 접근하기도 용이했다. 반면 중산층 이하는 청년 층과 마찬가지로 그렇지 못했다. 이들은 노후 준비도 부족하다. 미국과 달리 퇴직(연)금은 거의 불어나지 않았다. 중장년에게도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어려운 삶이다. 이를 지켜본 청년들도 자신의 미래라고 여기지 않을까?

노후가 불안하면 소비를 줄일 수 밖에 없다. 중산층 이하 중장년은 갈수록 소비여력이 약해질 가능성이 크다. 소비여력이 큰 중상층은 가성비 낮은 국내 보다 해외에서의 소비를 선호한다. 최근 공개된 지난 해 여행사들의 실적을 보면 경이로울 정도다. 막막한 노후는 피하면서 원하는 소비를 하고 싶지만 경제적 희망을 갖기 어려운 청년의 선택은 무엇일까. 이들의 비혼, 무자녀 선택를 탓하기 어렵다.

증시가 나라의 미래를 좌우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 나라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로는 꽤 유용하다. 미국 증시가 많이 오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혁신이다. 인터넷, 모바일, 그리고 최근 인공지능(AI)까지 금세기 세계를 움직인 혁신들은 거의 모두 미국에서 비롯됐다. 미국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은 혁신의 성과로 주주들의 인정을 받으려 한다.

혁신은 기대다. 미국 증시는 전세계의 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미국 증시는 혁신의 결실을 주주들과 나누는데도 인색하지 않다. 경영권을 유지하려면 주주들의 지지가 중요하다. 주주들의 지지는 주가가 오르거나 배당이 넉넉해야 기대할 수 있다. 경영권과 주주권의 적절한 긴장은 기업가치와 시장가치 사이의 간극을 줄인다. 대주주가 아닌 주주의 목소리를 간섭으로 인식하는 우리와는 차이가 크다.

우리도 한때 혁신이 있었다. 메모리반도체, 가전, 스마트폰, 조선 등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창업주에 이은 2세대 경영진들의 혁신으로 얻은 성과다. 현재 1위 트로피들은 거의 다 반납한 상태다. 글로벌 3위 자동차기업을 보유한 것이 그나마 다행일 정도다. 세계 최고의 상속·증여세 부담, 과도한 규제 등이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일리는 있지만 과연 이런 외부 요소들이 부진의 근본 원인일까.

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준비 소식이 증시에서 이른바 ‘저PBR’ 주식이 급등세를 보였다. 그런데 지난해 ‘저PBR’주 주가 상승을 독려했던 일본의 전례를 보면 상승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낮아져 저평가가 해소되면 그 다음은 성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자본수익비율(ROE) 개선이다. 성장을 하려면 혁신이 필요하다. 혁신 없는 주가 상승은 오래가기 어렵다.

사실 전문가들은 기업밸류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가 그리 높지 않다. 핵심은 지배구조 개선인데 대주주들이 동의할 가능성이 낮아 보이기 때문이다. 해외에서는 당연한 자사주 소각 의무화도 기업들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경영권 방어에 어려울 수 있다는 이유다. 경영권은 보장하는 게 아니라 지키는 것이다. ‘기업 밸류업’을 위해서는 경영권 가치를 발현될 수 있는 주주권 보장이 이뤄져야 한다.

전설적 명의 편작은 춘추시대 첫 패자(覇者) 제환공(齊桓公)의 병을 초기에 미리 진단한다. 자각증상이 없던 환공은 이를 묵살했고, 결국 병이 골수에 이르러 손을 쓰지도 못한 채 사망한다. 병은 깊어지기 전에 치료하는 게 최선이다. 근원은 놔둔 채 겉으로 드러난 상처만 치유한다면 환자의 예후는 오히려 더 절망적일 수 있다. 새해에는 정부가 우리 증시의 근본적 문제를 통찰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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