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아 창립자 잉그바르 캄프라드. [이케아 홈페이지] |
[헤럴드경제=김현일 기자] ‘가구 공룡’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가구 기업 이케아는 총 3개의 공익재단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각 재단이 프랜차이즈 관리법인·자금운용 지주사·브랜드 운영 지주사를 100% 소유하고 있는 구조다.
그룹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겼지만 각 재단 이사회에는 창립자인 잉그바르 캄프라드 가문 출신 인사들이 1~2명씩 이름을 올리고 의견을 낸다. 이를 통해 적대적 인수합병(M&A) 등 외부 공격에 대응하고, 창립자의 경영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꾸준한 기부로 사회공헌도 실천하고 있다. 네덜란드에 위치한 스티흐팅 잉카재단의 경우 누적 기부액이 2600억원에 달한다.
잉그바르 캄프라드는 1995년 이케아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재단 설립이유에 대해 “이케아가 영원히 존속하길 바랐다. 주변에 조언을 구한 결과 재단을 설립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해외에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고 창립자의 경영 정신을 계승하는 핵심 역할을 공익재단이 담당하고 있다.
반면 국내에선 공익재단의 지위와 역할이 상당 부분 축소돼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재단을 통한 그룹 지배가 허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단의 주식 취득과 주총에서의 의결권 행사가 모두 엄격히 제한되기 때문이다. 강력한 규제에 비해 실익은 적어 공익재단의 사회공헌 확대가 위축될 수 있다는 지적이 줄곧 제기돼 왔다.
▶주식은 갖되 의결권 행사는 제한…외부 공격에 방어 불가=지난 2020년 개정된 공정거래법에 따라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소속 공익재단은 계열사 주식을 갖고 있더라도 의결권은 행사할 수 없다. 공익재단이 총수 일가의 지배력 확대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다. 임원의 선임·해임이나 합병 등 특별한 경우에만 특수관계인과 합산해 15% 한도 내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두고 있다.
최근 한미약품그룹과 OCI그룹의 통합 추진 과정에서도 공익재단의 의결권 행사 여부가 주요 쟁점이 되면서 다음달 정기 주총을 앞두고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한미약품의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는 가현문화재단과 임성기재단이 각각 4.9%, 3%의 지분을 갖고 있다. 통합을 반대하는 창업주의 장·차남은 OCI그룹이 대기업집단에 속하므로 두 재단들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한미그룹 측은 “3월 주주총회일 기준 아직 OCI그룹과 통합 절차가 종결되지 않은 상황이라 공익재단의 의결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만약 두 재단의 의결권 행사가 제한될 경우 장·차남 측은 소수의 우호지분까지 더해 표 대결에서 앞설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통합을 추진하는 어머니 송영숙 한미약품그룹 회장과 장녀 임주현 한미약품 사장 측이 불리해지는 셈이다.
국내에서 이처럼 공익재단의 의결권 행사가 제한돼 입법 당시부터 과잉규제라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한 대기업 상장 계열사 관계자는 “행동주의 펀드가 배당 확대 등 무리한 요구를 해오면서 이번 주총에서 표 대결을 앞두고 있지만 우호 지분을 가진 공익재단은 이렇다 할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의결권 행사가 막혀 외부 공격에 대한 방어가 불가능한 셈이다.
1876년 설립된 칼스버그 재단은 학술연구와 문화예술 등의 분야를 지원하며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은 덴마크 코펜하겐에 위치한 칼스버그 재단 건물. [칼스버그 재단 홈페이지] |
반면 해외는 상황이 다르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미국을 비롯해 일본, 독일, 스웨덴 등 주요 국가에선 이처럼 공익재단의 의결권 행사를 금지하는 규제는 없다.
덴마크 맥주회사 칼스버그의 경우 칼스버그 재단이 지분 29%를 소유하고 있는데 주총에서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을 77% 갖고 있다. 의결권을 차등 부여하는 차등의결권 제도를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경영권을 지키며 기업의 영속성을 보장받고 있는 것이다. 스위스 명품시계 브랜드 롤렉스 역시 창립자의 이름을 딴 한스 윌스도르프 재단이 지주사 격인 롤렉스 S.A.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다.
지난 2020년 공정거래법 개정 입법 당시부터 공익재단의 의결권 제한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왔던 최승재 세종대 법학과 교수는 “공익재단 출연자의 의사가 존속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데 우리나라 법제에서는 이 점이 전혀 존중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출연 주식 5% 넘으면 증여세…“세금부담 때문에 출연 위축 우려”=현행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증세법)은 공익재단이 기업으로부터 의결권이 있는 주식을 출연받을 때 총 발행주식 수의 10%가 넘으면 초과분에 대해 증여세를 내야 한다. 상출제 기업집단 소속 공익재단은 그보다 더 적은 5%까지만 면세를 받을 수 있다.
반면 미국은 20%까지 면세를 인정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공익사단법인 및 공익재단법인 인정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총 발행주식 수의 50%까지 취득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해 별도의 상속세 및 증여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국내 현행법이 5%로 면세 혜택을 제한한 것은 기업이 공익재단 등을 통한 편법 증여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오히려 공익재단의 주식취득을 제한해 사회공헌 활동을 위한 재원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경협은 최근 2024년 공정거래 분야 정책과제 중 하나로 이 같은 규제의 개선을 건의했다. 한경협은 “주식 5% 초과분에 대해 증여세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의결권까지 제한하면 주식 기부 축소로 (공익재단의) 사회공헌 재원이 줄어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상출제 소속 기업들이 증여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면세 한도를 넘지 않는 선까지만 공익재단에 출연하게 돼 재원이 부족해질 것이란 지적이다.
▶분쟁 ‘불씨’로 전락한 공익재단 출연=최근 KT&G는 자사주를 KT&G 장학재단 등에 출연한 것을 두고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행동주의 펀드 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FCP)의 공격을 받고 있다. FCP는 KT&G가 자사주 소각 대신 재단에 무상 증여해 경영권 강화에 활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KT&G 이사회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이라는 공익적 목적 등 경영상 필요성이 인정되며 경영진의 지배권 유지를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재단을 두고 있는 주요 기업들은 공익재단에 대한 출연을 두고 이러한 논쟁이 지속될 경우 공익적 목적의 기부 활동까지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최 교수는 “현행법은 출연자의 의도를 구현하면서 지속 가능한 사회공헌이 가능하도록 재설계돼야 한다”며 “공익재단이 기업 경영권 유지에 기여할 수 있다는 우려만 중점에 두고 있어 출연자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공익재단 설립을 통해 사회 환원을 실천하면서 브랜드의 명맥을 잇고 있는 대표 사례로 꼽힌다. 구찌·펜디 등이 케링과 LVMH 등에 팔리고, 베르사체가 미국 패션그룹 마이클 코어스에 매각됐지만 창립자 아르마니는 재단을 세워 브랜드를 지켰다. 재단을 통해 최고경영자와 디자이너를 선임해 그룹의 독립 경영을 유지하며 창립자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국내 재계에선 현행 규제에 대한 완화를 주장하고 있다. 해외 주요 국가들처럼 공익재단의 의결권 행사는 허용하되 사회공헌 의무를 강화하거나 혹은 출연자와 그의 특수관계인이 공익재단 이사로 참여하지 않을 경우에 한해 의결권 행사를 허용하는 등의 개선이 논의돼야 한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