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를 실리콘 밸리에 돌려줍시다.” 미국이 반도체에서 본심을 드러냈다. 지난달 21일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부 출범을 알리는 행사에서였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부 장관은 반도체 산업의 발상지인 미국에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자며 노골적으로 밝혔다. 이날 인텔은 2030년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에서 세계 2위를 차지하겠다고 했다. 지금 삼성전자의 자리다.
예견은 됐다. 재작년 미국이 주도하고 한국, 대만, 일본이 참여한 ‘칩(Chip)4’ 동맹은 일종의 국가간 편먹기였다. 중국을 고립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이후 흐름은 묘하게 흘러갔다. 미국은 2022년 반도체법을 발효했다. 지원금 지급을 통해 미국내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도 투자의향서를 제출했다. 전세계적으로 600개 기업이 넘는다. 기업 요청 자금 규모도 700억 달러(약 93조원)를 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보조금 규모인 527억 달러(70조원)를 넘는다. 이러다보니 지원대상이 안되거나, 되더라도 지원금 규모가 신청액 대비 떨어질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부 장관 [AP] |
지나 러몬도 장관도 “신청 기업 다수가 자금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예고하기도 했다. 미국은 자국 기업부터 챙기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 기업인 BAE시스템즈, 마이크로칩 테크놀로지, 글로벌파운드리스 등 3곳에 먼저 지원됐다. 인텔도 100억 달러가 넘는 자금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아직 한국기업 지원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받기는 하겠지만, 기대금액은 낮아지고 우선순위는 다소 밀리는 분위기다.
미국은 인공지능(AI) 흐름을 탄 반도체 부흥을 위해 인텔과 MS, 아마존, 구글 등 미국 빅테크들과 연대한 ‘팀 아메리카’를 외치고 있다. 실제 마이크론은 지난달 5세대 HBM(고대역폭 메모리) 제품인 HBM3E 양산을 시작했고, 이례적으로 엔비디아가 고객사라고 밝혔다. 인텔은 고객사로 MS를 확보했다. 한마디로 AI칩 설계와 생산을 미국 기업끼리 하려는 것이다.
일본도 반도체 부활에 적극적이다. 일본 정부는 소니, 토요타 등 대기업 8곳을 묶은 반도체 회사 라피더스를 세웠다. 라피더스는 2028년부터 캐나다의 텐스토렌트와 함께 2㎚(나노미터·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 공정의 AI 반도체를 공동 개발해 양산한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최근엔 소니, 덴소 등 일본 기업과 세계 1위 파운드리 회사인 대만 TSMC와 손을 잡았다. 지난달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제 1공장을 준공했다. 일본 정부는 여기에 4760억엔(약 4조2300억원)의 보조금을 제공하기로 했다. 설비투자액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이다. 2027년엔 제 2공장 건설도 계획하고 있다. 2공장까지 합치면 일본 정부 보조금은 한화로 10조7000억원에 이른다.
일본이 대만 TSMC와 협력했지만, 이는 사실상 일본 반도체 생산의 르네상스를 예고한 것이다. 사이토 경제산업상도 “첨단 반도체의 안정적인 공급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만으로서도 동맹 압박의 부담과 중국의 대만본토 공격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분산투자 전략으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TSMC 로고 [로이터] |
일본에서의 공정은 12~28나노급의 레거시(비첨단) 공정이다. 최첨단 공정은 대만 본토에서 하는 이원화 전략이다. 실제 8일, 대만 언론에 따르면 TSMC는 대만에서 최첨단 2㎚ 공장, 첨단 패키징 공장 등 10개를 추가로 지을 계획으로 전해졌다. 인공지능(AI)용 반도체 수요 급증에 따른 2~3㎚ 이하 최첨단 공정은 철저히 대만에서 한다는 전략인 것이다.
한국도 정부는 물론 여야 모두 반도체산업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현 정부는 출범 이후부터 ▷투자세액공제 상향 ▷반도체 국가산단 조성 ▷반도체 인력(15만명) 양성 등 지원정책을 펼치고 있다. 최근엔 4월 총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권 공히 반도체 지원 공약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 [헤럴드DB] |
설계(팹리스), 생산(파운드리), 소재·장비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 간에는 필요 및 이해 관계에 따라 협력은 다양하게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적으로 이제 반도체는 ‘각자도생’의 길에 확실히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마이크론이 SK하이닉스에서 D램과 HBM 설계 업무를 담당하던 전 직원을 영입했지만 한국 법원이 제재한 사례처럼 기업간 인력 쟁탈전도 치열할 것이다.
미국, 일본, 대만은 물론 미국의 견제가 심한 중국도 화웨이를 중심으로 반도체 굴기를 지속 중이다. 반도체 생산라인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선 인도 역시 무시 못할 존재로 떠오르고 있다.
AI시대를 맞아 반도체는 이제 각국 산업의 핵심무기가 됐다. 이같은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기술 초격차는 기본이고, 교과서적인 이야기다. 이제 좀더 현실적으로 팀 아메리카, 일·대만 협력, 중국의 굴기에 맞서 ‘팀 코리아 ’로 한국 반도체를 지켜내야 한다. 반도체를 둘러싼 이해관계에 따른 독주와 협력이 노골화된 마당에 이제 굳이 자국 이익을 숨길 필요도 없다. 필요하다면 국내 반도체 기업끼리도 똘똘 뭉쳐 대응해야 한다.
한국의 메모리시장 1위, HBM시장 점유율 90%에 안도하고 있으면 안된다. 파운드리는 TSMC 가 막강한 1위이고, 인텔마저 위협하는 상황이다. 지금 우리는 기술, 특히 AI혁명이 촉발한 반도체 발전으로 삶이 급변하는 ‘변혁의 순간’에 살고 있다. 정부와 기업 모두 냉철하게 판단하고, 영민하게 대응하고, 과감히 실행해야 한다. 도태는 한순간이다.
권남근 뉴스콘텐츠부문장 겸 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