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광장] 민주주의 이익 카르텔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다. 민주주의는 유구한 역사에도 성공을 담보하는 제도는 아니다. 최근까지의 역사를 보더라도 민주주의가 성공한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오히려 예외적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그 예외적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아시아에서 한국과 일본, 대만(중화민국) 정도만 그 예외로 인정받는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국가별 민주주의 수준의 측정 방식은 대략 10개 미만으로 볼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자매 회사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의 ‘민주주의 지수’와 스웨덴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브이뎀 연구소)의 민주주의지수를 들 수 있다. 두 곳 모두에서 한국은 확실히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특정 전문가들의 조사를 수치화하고 있어 해당 국가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는지는 알 수 없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스웨덴의 민주주의와 선거 지원 국제 연구소(IDEA)에서는 민주 감사(democratic audit)의 형식으로 ‘국제 민주주의 현황’(GSoD)이라는 조사 보고서를 발행하고 있다. 여기서는 전문가들의 조사에 따라 설정한 점수 부여 방식이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참여한 조사와 의견을 담은 질적인 보고서를 발행해서 시민들의 토론을 유도하는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곳에서 인문적 연구와 자료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그만큼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최근 십 년 내의 상황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전 정부와 현 정부 역시 이 의문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많은 집단과 개인들은 각자의 이익과 생각, 이념에 따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contra omnes)에 나서고 있고, 정부는 그 중재 역할을 잘했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그 투쟁에 동참했거나, 동참하고 있는 게 아닌지 회의가 든다. 만약 민주주의 시스템이 잘 작동되었다면 지금까지의 많은 갈등은 발생하지 않았거나 쉽게 해결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국회와 정당도 자신의 역할을 못 하고 있다. 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조직이기 전에, 정쟁과 이익을 대변하는 이익 카르텔의 모습만을 보인다.

연전에 작고하신 한 원로 교수가 허탈한 표정으로 했던 말이 생각난다. 민주주의가 별거 아니더라고요. 그냥 숫자 싸움이에요. 그렇다. 민주주의는 형식적으로 다수나 과반 득표로 결정되는 제도다. 그렇다고 민주주의가 숫자로만 승부를 낸다면 그 정신은 사라진 것이다.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형식적으로 정해진 절차를 거쳐 다수 득표만 하면 어떤 내용이나 고려도, 어떤 소수도, 어떤 반대자도 개의하지 않고 모든 것을 없애고,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수의 독재는 이렇게 탄생한다.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를 위기로 내몬다. 사라지는 것은 반대자나 소수가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다.

국회와 정당에서 표 대결 승리에만 골몰하는 득표 지상주의는 지자체와 공공조직, 각급 학교와 회사, 시민단체에까지 고스란히 전달된다. 각자 자신들의 방식으로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를 위해 투쟁하며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정당화한다. 도대체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한 민주주의인지는 생각지 않는다. 선거가 지난 후 패자들은 빼앗긴 이익을 찾기 위한 싸움을 준비할 것이고, 그것을 이익 카르텔의 싸움이 아닌 민주 투쟁이라 할 것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그래서 민주주의를 의심했다. 그가 비민주적이고 어리석었다고 비난해도,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민주주의 정신은 개인과 소수의 권리를 최대한 지키면서 다수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국가, 즉 정부와 의회는 그것을 감독할 장치가 돼야 한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얘기한 것도 그런 의미다. 이해 당사자 양쪽에서 최대한의 공통점을 찾는 과정이 민주주의 정신이다. 표결은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일 뿐이다. 민주주의에서 인문 정신과 문화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문 정신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존재이고, 칸트가 말했듯이 그 자체 목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정신이다. 인문주의가 인본주의가 되는 것은 이런 토대에서 가능하다. 인간과 인간의 교류를 문화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물과 벌레들의 모임에는 본능만이 있을 뿐 문화가 없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됐다는 말은 그를 벌레로 대했다는 말이며, 그와는 교류와 소통을 할 생각이 없다는 말과 같다.

상대를 없애야 할 벌레가 아닌 소통의 당사자로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이다. 민주주의가 단순 결정을 위한 편리한 도구가 아닌 것은 그 정신 때문이고, 선거와 투표는 그바탕에서 유효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합법을 가장한 야만적 억압의 도구이자 이익을 나누기 위한 카르텔의 공모가 될 수 있다.

조우호 덕성여대 독어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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