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목(왼쪽 세번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송미령(두번째)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강호동(네번째) 농협중앙회장이 지난달 25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하나로마트 성남점에서 물가 현장 점검을 하고 있다. [연합] |
[헤럴드경제=김용훈 기자] 고물가·고금리 속 고환율(원화 가치 하락)까지 고착화하면서 한국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국제유가 상승 등 고물가 상황에 더해 원화 가치 하락까지 더해지면서 수입 물가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박을 더욱 심화할 전망이다.
재정당국은 이른바 '3고(高)'의 파고 속에 4·10 총선에서 정치권이 내놓은 수많은 공약과 1~3월 대통령 주재 민생토론회에서 발표된 수십조원 규모의 지출 약속들을 이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59조원의 역대급 세수 결손 등 재정 여건을 감안하면 약속 이행의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봤다.
3월 19일 서울의 한 주유소 유가정보. 이상섭 기자 |
7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 따르면 지난 5일(현지시각) 5월 인도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0.32달러(0.37%) 오른 배럴당 86.91달러에 거래를 마감했다. 지난해 10월 20일 이후 최고치다.국제유가는 지난달 28일 이후 이달 5일까지 6거래일을 내리 뛰었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을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국제유가는 2~3주 시차를 두고 국내 물가 영향을 준다.
금리 역시 인하 가능성이 희박하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오는 12일 통화정책방향 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현 수준(3.50%)에서 동결할지, 조정할지 논의한다.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3.1%)이 두 달 연속 3%를 웃돈 데다, 가계대출 증가세도 완전히 꺾이지 않은 만큼 한은이 이번 회의에서 서둘러 기준금리를 낮추기 어려운 상황이다.
고금리-고물가가 장기화하는 흐름 속에서 고환율(원화 가치 하락)까지 고착할 조짐이다. 연초 수출경기 호조, 외국인 투자자의 '바이코리아' 등으로 달러화가 순유입되고 있지만, 되레 원·달러 환율은 글로벌 강(强)달러에 1350원선까지 치솟았다. 1300원대 환율이 '뉴노멀'로 자리 잡으면서 수입물가 상승을 통한 인플레이션 압력은 한층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의 '3고' 대응에도 빠듯하지만, 재정당국은 총선을 치르면서 언급됐던 적지 않은 지출·감세 약속까지 짊어져야 하는 상황이다.
21일 오후 서울 시내 한 건물에 전력량계가 설치돼 있다. 한국전력은 2분기 적용 연료비조정단가를 현재와 같은 킬로와트시(kWh)당 5원으로 적용했다. 전력 당국은 이번에 연료비조정요금을 제외하고 기본요금, 전력량요금, 기후환경요금도 따로 인상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2분기 전기요금이 동결됐다. [연합] |
지난해 59조원의 역대급 세수결손이 발생한 가운데 올해 상반기 고물가를 대응하기 위해 투입한 예산과 향후 깎아주겠다고 약속한 세금을 감안하면, 나라 살림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재정당국은 작년 8월 이후 이어진 3%대 고물가를 잡기 위해 전기요금 등 올 상반기 공공요금을 동결하고, 1분기 영세 소상공인 126만명에 업체당 최대 20만원의 전기요금이 지원하기도 했다. 한국전력은 2분기(4∼6월)까지 연료비조정단가를 현재와 같은 킬로와트시(kWh)당 5원으로 유지했다. 한전이 원가보다 싼 전기를 공급하면서 40조원대 누적적자가 발생한 상태다.
먹거리 물가를 잡기 위해 정부는 이미 상반기 올 한해 전체 쓰기로 한 예산을 모두 소진했다. 정부는 작년 추석 670억원을 들여 성수품 할인지원을 시작한 이후 올 들어 설 성수기에 690억원을 들여 할인행사를 지원했고, 이어 4월까지 할인지원 납품단가 지원에 434억원을 쓰겠다고 밝혔다. 그래도 물가가 잡히지 않자 정부는 지원금을 1500억원 추가했다. 올해 관련 예산은 1080억원이었다.
유류세 인하조치도 총선 이후인 4월 말로 연장한 상태다. 하지만 최근 국제유가 불안으로 2개월 추가연장할 것이란 전망이 높다. 다만 정부로선 그 만큼의 세수가 덜 걷히게 되는 셈이다.
이미 깎아주기로 약속한 세금도 적지 않다.
정부는 상반기 카드사용액 증가분에 대해 20% 소득공제를 적용해 내수 회복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부담금을 정비한 것도 의도와 달리 나라 살림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당초 올해 정부의 부담금 징수계획은 24조6000억원에 달한다. 그러나 각종 부담금이 이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고정 수입이 된 탓에 이를 대체할 재원이 없으면 관련 사업은 축소되거나 없어질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민생토론회 후속 조치 2차, 경제분야 점검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 |
전문가들은 정부의 재정 여력이 부족한 탓에 여야의 총선 공약 이행도 사실상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봤다.
국민의힘은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비과세 혜택 확대 ▷차세대 기술 지원 등 '자산세 감세'에, 더불어민주당은 ▷근로소득 세액공제 기본공제 확대 ▷중소·벤처기업 R&D 예산 복원 ▷전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지원금 지급 등 '재정지출'에 무게를 두고 있을 뿐 나라 곳간이 비는 건 똑같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세금 감면이나 예산 확대 등 좋은 구호가 담긴 공약이 쏟아지고 있지만, 당위성과 형평성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며 "어느 쪽이 선거에서 이기더라도 재정 부담과 정책 혼선이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24차례의 민생토론회에서 언급된 정책도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하는 작업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한양대 김태윤 행정학과 교수는 "감세 기조에 재정균형 또는 흑자재정을 원리로 삼고 있는 지금 정부에서 민생토론회를 통해 저렇게 많은 재정사업을 내놔도 되는지 의문"이라며 "다 이행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