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이 남긴 10번 교향곡 스케치의 일부를 악보화한 것 [베토벤박물관, 더 컨버세이션]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250개의 음표, 40여 개의 프레이즈(음악적 문장)로 구성된 서너 마디의 선율. 연주 시간은 불과 11초.
1827년, 생의 마지막 순간 베토벤은 열 번째 교향곡을 쓰는 중이었다. 클래식 음악 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9번 교향곡 ‘합창’을 완성한 지 3년 만이다.
피아니스트 겸 음악평론가인 조은아는 “당시 베토벤은 ‘새로운 종류의 음악적 중력’을 발견하는 중이라고 했을 만큼 열의를 보였지만, 곡을 미완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며 “베토벤이 남긴 토막토막 떨어진 불완전한 스케치는 후대 음악학자들에게 좋은 연구 자료”라고 말했다.
베토벤의 음악적 유산은 AI(인공지능)에게도 영감을 줬다. 세대와 국적을 초월한 ‘불멸의 히트곡’을 쓴 악성 베토벤(1770~1827)의 탄생 250주년을 맞던 해, 음악계와 과학계의 대대적 협업인 ‘베토벤 교향곡 10번:AI 프로젝트’(Beethoven X: The AI Project)가 시작된 것이다. AI는 베토벤의 짧은 스케치로 20여분 짜리 스케르초와 론도 악장을 완성했다. 이 곡은 2021년 10월 9일 본 베토벤 오케스트라 연주로 베토벤의 고향인 독일 본에서 초연됐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은 퇴근길 콘서트(5월 28, 30일) ‘과거와 미래의 교향곡:AI의 선율’을 통해 베토벤 10번 교향곡 AI 프로젝트 3악장을 들려줬다. 지휘를 맡은 데이비드 이 부지휘자는 “10번 교향곡은 베토벤 5번 교향곡의 카피라고 느껴질 만큼 흡사했다”고 했다.
요즘 AI 음악가들이 하루가 다르게 맹활약 중이다. 음악 영역에서 AI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바로 ‘작곡’. 학습 자료가 무수히 많은데다 이를 기반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음악을 창작해낼 수 있어서다. 대중음악계에선 이미 AI 작곡가 이봄이 데뷔해 활동 중이고, AI 작곡가가 예능 프로그램의 BGM(배경음악)도 만들어내고 있다.
클래식 음악 분야는 AI 작·편곡가가 마음 놓고 활약할 수 있는 장르다. 조은아 평론가는 “클래식 음악은 AI 딥러닝이 가장 활성화된 영역”이라며 “수 백년간 축적된 방대한 데이터, 정형화된 화성법과 대위법, 수치화가 가능한 규칙적인 리듬과 일관된 조성, 논리적 문법을 갖춘 완결된 프레이즈로 AI가 학습하기 좋은 장르”라고 했다.
무엇보다 생성형 AI를 활용한 콘텐츠가 증가하며 ‘저작권 침해’ 논란이 화두가 되는 때에 클래식 음악 장르는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롭다. 저작권 보호기간이 사후 70년인 만큼 수 백년 전 세상을 떠난 작곡가들의 음악은 최고의 학습 자료가 되는 있는 셈이다. 국제저작권관리단체연맹(CISAC)에선 AI 창작 관련, “보상 없이 저작물을 학습하는 것을 허용해선 안된다”는 입장이다. 이에 연맹에선 ▷창작자 승인 ▷AI 학습 비용 지불 ▷AI 업체의 투명성 등 세 가지 원칙을 두고 저작권 법안을 만들어가고 있다.
서울시향이 AI를 주제로 공연을 기획한 것도 이를 ‘시대의 흐름’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서울시향 관계자는 “클래식 분야에서도 AI 활용에 대한 관심이 높은 데다 이전에 외국에서 AI를 활용한 편곡이나 미완성곡을 완성한 시도들이 있어 공연을 기획하게 됐다”고 했다.
공연에선 AI가 손을 댄 대표적 클래식 음악인 베토벤 10번 교향곡과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비발디 ‘사계’ 중 ‘봄’과 역작을 남긴 세 작곡가의 원곡을 함께 연주했다. AI가 완성한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 베토벤 10번 교향곡을 한국에서 연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악단에선 이번 공연의 제목을 정하는 데에도 챗GPT를 활용했다. 서울시향 관계자는 “서울시향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공연 전반의 내용을 주요 키워드로 입력해 제목을 추천해달라고 했다”며 “여러 개의 제목 중 고른 것이 ‘과거와 현재의 교향곡:AI의 선율’이었다”고 귀띔했다.
베토벤이 남긴 10번 교향곡 스케치의 일부 [베토벤박물관, 더 컨버세이션] |
AI가 작·편곡한 교향곡들엔 흥미로운 공통점이 발견됐다. AI가 거치는 학습 과정, ‘사람 창작자’가 제공한 입력값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6년 전인 1822년 두 개 악장으로 작곡한 교향곡을 완성한 사례가 그렇다. 작곡가 겸 프로듀서인 루카스 켄터는 중국 화웨이 사의 의뢰를 받아 AI를 활용해 미완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AI가 마무리한 ‘미완성’ 교향곡은 2019년 2월 런던 캐도건 홀에서 초연됐다.
AI가 학습한 다양한 음악적 요소는 ‘미완성’ 교향곡의 악보 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박주용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AI가 완성한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은 슈베르트 음악의 특징인 음색, 음정, 리듬 등의 데이터를 컴퓨터에 입력, 이를 기반으로 변형 과정을 거치며 악보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AI는 90곡에 달하는 슈베르트의 곡을 공부했고, 슈베르트에게 영향을 미쳤던 여러 작곡가들의 음악도 충분히 익혔다. 덕분에 이 교향곡 3악장의 도입은 1악장과 닮았지만, 스메타나와 차이콥스키, 멘델스존 등의 음악과 닮은 악구도 종종 등장한다.
AI의 ‘미완성’ 교향곡에 대한 ‘인간 음악가’들의 평가는 혹독했다. 조은아 평론가는 “AI가 완성한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은 어떤 곡을 학습했는지 유추가능할 만큼 다양한 작곡가의 음악이 들린다”며 “이 곡이 나왔을 당시 음악 전문지 ‘스트라드’에선 ‘인공지능은 아직까지 미학적으로 순진하다’고 평가했다”고 말했다.
서울시향 퇴근길 콘서트 ‘과거와 미래의 교향곡:AI의 선율’ [서울시향 제공] |
한국 초연으로 이 곡을 선보인 데이비드 이 지휘자는 “간혹 어떤 부분에선 절대로 슈베르트일 수 없는 악구가 나와 연주하는 스스로에게도 의문이 생겼다”며 “이게 슈베르트가 맞는 건지 잘 모르겠는 정도의 흐름은 괜찮은데, 아예 ‘틀린’ 것, 절대 나오면 안되는 부분이 나올 때는 이게 뭔가 싶었다”며 웃었다.
두 곡을 처음 연주한 서울시향 단원들의 반응도 흥미로웠다. 단원들은 AI가 마무리한 ‘미완성’ 교향곡에 대해 ‘형식미의 결핍’과 ‘기승전결의 무맥락’을 꼬집었다. 특히 이 곡은 슈베르트 스타일에 여러 작곡가의 교향곡을 짜깁기한 인상도 준다.
데이비드 이 지휘자는 “보통 오케스트라는 정해진 레퍼토리를 반복적으로 연주하게 되는데, AI의 곡은 새로운 곡이기에 과하게 집중을 해야 한다”며 “AI의 곡엔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부분들이 존재해 연주를 하면서도 고민을 하게 된다”고 했다. 게다가 AI의 곡은 완성도가 떨어져 연주에 있어서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AI가 만든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이 서울시향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지난 2016년 성시연 지휘자가 이끌던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모차르트 vs 인공지능’이라는 제목으로 콘서트를 열었다. 당시는 이세돌 9단과 알파고가 세기의 대결을 벌였던 해였다.
공연에선 AI 작곡가 에밀리 하웰의 ‘모차르트 풍 교향곡’ 1악장과 모차르트 교향곡 34번 1악장을 연달아 들려준 뒤, 관객에게 ‘더 아름다운 곡’을 고르라는 블라인드 테스트도 진행했다. 에밀리 하웰은 미국 UC산타크루스 대학 데이비드 코프 교수진이 개발한 인공지능 작곡 프로그램이다. 클래식판 ‘세기의 대결’의 결과는 모차르트의 압승. 경기아트센터 관계자는 “당시 모차르트가 선택을 받자 이세돌이 알파고를 이겼을 때의 감동이 다가왔다”고 말했다.
AI와 음악 창작의 만남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비욘 울바에우스(Björn Ulvaeus) CISAC 회장은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정기총회에서 “AI 창작은 혁명”이라며 “AI가 크리에이터의 역할을 대체하지 않고 돕는 데에 활용한다면 훌륭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과학계에서도 현재 단계에선 인간 창작자와 AI의 협업을 통해서만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박주용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AI 창작은 컴퓨터에 맡기면 자동으로 곡이 나오는 게 아니다”며 “하나의 곡을 만들기 위해 인간이 주는 입력값이 중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음악을 다듬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 역시 루카스 켄터가 오케스트레이션(관현악화)을 하고, 인간 작곡가의 창작물처럼 감정을 부여하는 한편, 인공지능의 실수를 바로잡는 과정을 따로 거쳤다. 이 과정만 무려 한 달이 걸렸다.
서울시향 퇴근길 콘서트 ‘과거와 미래의 교향곡:AI의 선율’ [서울시향 제공] |
AI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예술 창작의 영역에선 AI의 ‘완전 정복’은 불가능하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음악을 비롯해 미술, 문학 등 예술의 영역은 단지 결과물의 완성도 만을 평가하는 분야는 아니기 때문이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사람들은 단지 베토벤의 음악에서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베토벤이 특정 악상을 선택한 의지, 화성을 사용하는 방식의 창의성, 음악적 고집은 물론 청력을 잃은 상태에서도 음악을 만들어내는 불굴의 의지에서 큰 감동을 느낀다”며 “AI가 아무리 뛰어난 작품을 만든다 해도 인간이 만든 예술 작품 만큼 강력한 서사와 감동이 없어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AI가 재창작한 2050년 버전의 비발디 ‘사계’를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 임가진도 “클래식이 신기한 것은 아무런 말이 없지만 감동과 전율이 온다는 것이다.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기억을 더듬게 하는 영적인 힘이 있다”며 “그것은 사람이 만든 곡에서만 느껴진다”고 말했다.
다만 AI는 인간 음악가들의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박주용 교수는 “오래 전부터 인간은 과학기술을 위협적이라고 생각해 왔으나 기술 자체가 사람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며 “기술은 사람의 창의성을 더 잘 발휘하게 하는 도구”라고 강조한다.
음악계 전문가들도 비슷한 생각이다. 조은아 평론가는 “인간 음악가들은 화성법, 대위법 등 작곡의 기초체력을 익히는 데에 청춘을 많이 소진한다”며 “인공지능을 활용해 그런 시간을 단축시키고 창조적인 영역에서 영감을 찾는 데에 도움을 받는다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류태형 음악평론가는 “기술은 앞으로 더 정교해질 것이고, 각자의 스타일 별로 논문을 여러 순서로 섞듯이 만들어내는 음악도 생겨날 것”이라며 “다가올 음악 미래는 AI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게 되리라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