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전 ‘영앤리치’가 되는 시간…‘조선판 록페’가 왔다

신윤복 ‘상춘야흥’ [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솔향기 머금은 송절주 한 잔에 남산의 정취를, 구수한 탁배기 한 잔에 오래전 선율을 담는다. 싱그러운 초여름, 국립극장 앞마당에 풍류가 넘실댄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이 공연장 밖으로 나온다. 시즌 첫 공연 ‘애주가’(6월 1~2일)를 통해서다. ‘애주가’는 야외 광장에서 음악과 술을 나누는 음악회다. 악단 최초의 ‘야외 음악회’이자, MZ(밀레니얼과 Z세대의 합성어)들의 성지인 록페스티벌의 ‘조선 버전’. ‘듣도 보도 못한’ 형태이며, 국악관현악 사상 전무후무한 형식이다. 멋과 운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음악 따라 술 따라 누구나 ‘풍류대장’이 되는 시간이다.

사실 음악과 술이 함께 하는 공연이 대단히 희귀한 것은 아니다. ‘애주가’가 신선한 것은 선택받은 장르가 ‘국악관현악’이기 때문이다. ‘애주가’는 일종의 ‘조선판 록페(록페스티벌)’다. ‘엄숙한 공연장’을 벗어나 자연을 벗 삼아 전통주와 함께 국악관현악, 실내악, 성악을 즐길 수 있다.

연출을 맡은 정종임은 이번 공연에 대해 “옛 선조들이 즐기던 풍류를 21세기 버전으로 만든 자리”라고 했다.

‘애주가’ 연출을 맡은 정종임, 채치성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장, 박경민 단원 [국립극장 제공]
국악관현악과 닮은 전통주…다섯 가지 술에 젖는 시간

공연의 핵심은 술과 음악의 페어링이다. 이 공연을 위해 국립국악관현악단과 국순당이 손을 잡았다. 2~3곡 마다 휴식시간을 통해 곡에 맞는 술을 만날 수 있다. 국악관현악이라는 정통성과 지향점을 쏙 빼닮은 주류다.

공연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술은 총 다섯 종류다. 정종임 연출가가 사전에 국악관현악을 들으며 각각의 술들을 마신 뒤, 엄선해 골랐다. 보통의 음악 페스티벌이 전 세계 맥주와 최신 주류 트렌드를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애주가’에선 21세기 전통주 트렌드를 읽을 수 있고 전통주와 국악관현악이 어울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날 수 있다.

다섯 종류의 술은 저마다 맛도 향도 다르다. 공연의 첫 잔은 ‘아는 맛’의 힘을 보여준다. 100% 우리쌀로 빚어내 누구에게나 익숙하고 거부감 없는 생막걸리로 시작한다. 그리 깊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아 호불호 없이 ‘친근한 맛’이라는 장점이 다소 생소한 전통주와 국악관현악 페어링의 벽을 허문다.

맑은술을 떠내지 않고 그대로 걸러 짠 술의 맛은 묵직하다. 옛날 막거리 고(古)는 빛깔은 흐리고, 향은 진하며, 맛은 구수하다. 정종임 연출가는 이 술에 대해 “경상도, 제주도, 황해 지역에서 쓰는 막걸리의 방언인 ‘탁배기’가 잘 어울리는 술”로 “과메기나 홍어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탁배기는 1960년대에 정통 쌀막걸리의 제작방식을 복원했다. 100만 명의 생명이 태어났고, 민주주의 시민 혁명이 나라를 바꾼 ‘격동의 현대사’ 한복판에서 복원된 이 술은 “한국의 역사를 지닌 맛으로, 아쟁과 어울리는 묵직함을 가졌다”고 정 연출가는 귀띔한다.

‘생백세주’와 ‘조선의 하이볼’도 상륙한다. 두 가지 술은 진하고 구수한 막걸리를 산뜻하게 씻어내줄 술이다. 한 마디로 ‘분위기 전환용’이다. 세 번째로 내놓을 이 술들은 관객들이 취향에 따라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생’ 백세주는 기존의 백세주보다 달달하고, 은은하지만 진한 향이 특징이다. ‘조선의 하이볼’은 백세주에 탄산수, 레몬을 섞어 만들었다. 조선의 젠지(Z세대·1995년 이후 출생)들이 즐겼을 것만 같은 세상 어디에도 없던 우리식 하이볼이다.

‘떠먹는 전통주’는 행위 자체로 선비의 풍류를 만끽하게 한다. 배꽃이 필 무렵 담는 이화주는 ‘배꽃’처럼 하얗고 뽀얗다. 쌀이 귀하던 시절 쌀로 만든 누룩을 쑨 이화주는 그 시절의 ‘영 앤 리치(Young and Rich)’들이 마신 최고급 막걸리다. 고려시대 이화주의 농후함을 되살린 이 술은 그릭요거트처럼 걸쭉하다. ‘떠먹는 술’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시대를 앞서간 ‘힙스터 선비’들과 마주하게 한다.

‘대미’를 장식할 송절주는 대표적인 ‘선비의 술’이다. 쌉싸름한 솔향기를 품은 술은 남산의 야외무대에도 안성맞춤. 둘레길을 따라 자리한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초여름 저녁 향과 송절주의 향취가 어우러져 ‘애주가’ 무대의 화룡점정을 찍는다. 알싸한 맛과 혀끝에 감도는 솔향에선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선비들의 희노애락을 만나게 된다.

공연의 주인공이 되는 술들은 대부분 어느 순간 사라졌던 전통주를 복원한 것이다. 정 연출가는 “옛술을 복원해 대중에게 소개하는 이 술들이 과거의 악기로 어제와 오늘을 연결하며 동시대와 호흡하는 음악을 하는 국악관현악과 닮았다”고 했다.

정수영 ‘백사회야유도’ [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제공]
70분의 음악 향연…오감만족의 시간

공연 시간은 약 70~80분. 음악은 국악관현악 3~4곡, 실내악 4곡, 이날치 출신의 소리꾼 신유진과 소리극 단체 타루의 창극 배우 정보권이 듀엣으로 부를 초연곡 ‘권주가’로 구성된다.

프로그램은 “국악관현악의 격조를 지키며 흥이 날 수 있는 곡들”로 구성한다. ‘따분하고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지워주며 바람 따라 술 따라 귀에 착착 감기는 선율과 어깨춤이 절로 나는 신명을 피워낼 곡들이다. 특히 공연장 안에선 작게 연주할 수 밖에 없었던 악기들의 묘미를 살릴 수 있도록 했다. 남산 아래에서 시원하게 포효할 타악기의 흥을 제대로 만끽할 시간이다. 작곡가 이고운에게 위촉한 ‘권주가’ 역시 “야외에서 함께 즐길 수 있는 곡이 될 것”이라고 정 연출가는 덧붙였다. 지휘는 원영석이 맡았다.

술과 음악이 만난 공연인 만큼 음악과 음용 순서를 조화롭게 매칭하기 위해 고심도 컸다. 가장 잘 어울리는 ‘베스트 페어링’은 존재하나, 저마다의 입맛과 음악 취향에 따라 선호는 달라질 수 있다. 때문에 제작진은 관객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추천’하는 정도로 술과 음악의 조합을 귀띔할 계획이다.

공연장을 떠난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무대는 해오름극장 앞 시원하게 뻗은 광장에서 만날 수 있다. 공연의 구성에 맞춰 무대는 두 곳으로 준비했다. 커다란 메인 무대가 악단의 자리이고, 조금 작은 무대에선 실내악과 독주자의 무대가 기다리고 있다.

‘오감 만족’ 공연이 넘쳐나는 시대이나, ‘애주가’는 그야말로 진정한 오감형 공연이다. 정 연출가는 “술잔을 감싸쥐는 촉감, 혀를 간질이는 전통주의 미감, 귀를 즐겁게 하는 국악관현악의 청각, 파란 하늘 아래로 푸릇해진 남산자락과 첨단LED 파사드가 조화를 이룬 시각, 남산의 풀내음과 대를 이어온 전통주의 알싸한 내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를 당부했다.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