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현지시간) 이슬람 최고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 인근 미나에 정기 성지순례 인파가 몰려 있다. 이날 메카 일대에서는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폭염으로 성지 순례객 최소 31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집에 오는 길에 숨진 순례객을 많이 봤어요. 거의 수백 미터(m)마다 하얀 천으로 덮인 시신이 누워 있었지요.” (인도네시아 출신의 44세 아흐마드 씨)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성지순례(하지) 기간 1100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폭염 속 인파가 몰릴 것에 대한 준비가 미흡했다는 순례객들의 증언이 나왔다.
22일(현지시간) 미국 CNN방송은 성지순례를 다녀온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현지에서 순례객을 보호할 의료진과 기본 시설, 물 등이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가령 21일 사우디에서 런던으로 온 지라르 알리(40) 씨는 “사람들이 기절하는 일이 다반사였다”며 “이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니 하지에 집중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사람이 너무 많고 의료진이 부족했다”며 “그들은 최악 중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길 기다렸고, 그래야만 조치를 할 것 같았다”고 했다.
아흐마드 씨는 길에서 의료진과 구급차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며 “지역 주민이나 단체에서 물을 배급할 때마다 순례자가 즉시 몰렸다”고 증언했다.
CNN은 하지 기간 부모를 잃은 미국인의 사연도 전했다.
사이디 우리 씨의 부모는 여행사 패키지 상품으로 평생 꿈이었던 성지순례를 떠났지만, 메카의 아라파트 산에서 실종됐다고 한다.
우리 씨는 여행사가 성지순례에 필요한 적절한 교통수단이나 증명서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여행 중 필요한 식량과 물품도 부족했다고 분노했다.
하지는 무슬림이 반드시 행해야 할 5대 의무 중 하나다. 매년 이슬람력 12월 7~12일에 치러진다.
무슬림은 일생에 반드시 한 번은 메카와 메디나를 찾아 성지순례를 해야 하는데, 사우디 당국은 국가별 할당제를 통해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이 때문에 관광비자 등을 통해 사우디에 입국한 후 허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성지순례를 시도하는 인원도 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몇 년간은 하지 기간이 여름과 겹쳐 폭염으로 심혈관 질환, 열사병 등으로 숨지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 집계된 공식 사망자 수는 약 500명이다. 하지만 외신들은 실제 사망자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올해 온열질환 등으로 인한 순례객 사망자 수를 1170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AFP 통신은 사망자를 1126명으로 집계했다.
16일(현지시간) 이슬람 최고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 인근 미나에서 정기 성지순례를 하던 남성이 폭염에 지쳐 쓰러져 있다. 이날 메카 일대에서는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폭염으로 성지 순례객 최소 31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 |
한편 사우디는 이러한 일에 대해 자국 책임이 아니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21일(현지시간) AFP통신에 따르면 사우디 고위 관료는 성지순례 사태와 관련해 “국가가 (관리 책임에)실패하지 않았지만, 위험을 간과한 일부 사람들의 오판이 있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극심한 폭염과 힘겨운 기상 조건에서 발생한 사태”라고 했다.
사우디 정부가 성지순례 사태 이후 입장을 내놓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