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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강승연·홍승희·김광우 기자] #. 2019년 입행해 외환과 소상공인 기업대출 업무를 담당하게 된 은행원 A씨는 해외주식과 국내선물옵션 투자를 시작했다가 손실을 봤다. 이를 만회하려고 가상자산 투자에 나섰지만 손실은 더 커졌다. 결국 카드대금 등 채무변제 독촉에 시달리게 된 A씨는 고객 돈에 손을 대기로 마음 먹었다.
고객이 대출받은 1억원을 잠시 보관하던 계좌에서 2000만원을 몰래 인출하거나, 해외 거래처 물품대금 송금 업무를 처리하는 척하며 해당 자금을 가족 명의 계좌로 빼돌린 것이다. 범행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객 휴대폰 문자 통지 설정까지 변경하기도 했다. 이렇게 10개월 간 13차례 횡령한 돈은 총 5억2000만원에 달하며, 주로 가상자산 투자금으로 사용됐다.
‘12억8360만원, 10억9480만원, 7억212만원…’ 최근 6년간 은행권에서 벌어진 횡령·배임 사고금액이다. 고객 계좌에서 돈을 인출하거나 폐쇄회로(CC)TV를 피해 은행 지점에 보관된 현금을 빼돌리는 등 수법은 다양했다. 재판으로 넘겨져도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등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30일 헤럴드경제는 대법원 판결서 인터넷 열람 시스템을 통해 검색된 최근 6년간(2018년~2024년 6월) 은행원 횡령 사건 1심 판결문 12건을 분석했다. 이는 2022년 발생한 우리은행 700억원대 횡령 사건을 제외한 것이다.
이들 사건에는 횡령 외에도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 행사, 배임 등 혐의가 추가 적용됐다. 횡령금액은 적게는 4000만원대에서 많게는 12억원대까지 있었다.
형법상 횡령죄의 법정형은 5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 벌금이고, 업무상횡령죄는 10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또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횡령으로 취한 이득액이 5억원 이상이면 3년 이상 징역, 50억원 이상이면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 징역으로 가중처벌된다.
하지만 이들 사건 중 9건(75%)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실형은 단 3건(25%)에 불과했다. 실형을 받더라도 2심으로 가서 형량이 깎이기도 했다. 솜방망이 처벌이 은행원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유발해 횡령을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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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 횡령 사건의 공통점은 은행의 시스템을 잘 아는 이들이 담당 중인 업무에 대한 관리상의 허점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VIP 고객의 자산관리 업무를 담당하던 은행원 B씨의 경우, 피해고객의 입출금 권한을 위임받아 통장 및 도장이 날인된 출금전표를 보관하게 된 것을 악용했다. 1년 9개월 간 14회에 걸쳐 고객 계좌에서 총 10억9480만원을 몰래 빼낸 것으로 드러났다.
한 은행 지점의 외화출납 업무를 담당하던 C씨는 외화금고 열쇠를 소지하면서도 아무런 감시를 받지 않는 상황에서 범행을 했다. 6개월 간 총 45회에 걸쳐 은행 외부로 몰래 반출한 외화는 7억원에 달했다.
30년 가까이 은행원으로 근무했던 D씨는 예금 입출금 업무를 담당하면서 업무 편의상 보관하던 피해 고객의 도장을 이용해 출금전표를 위조하고, 해당 고객의 계좌에서 몰래 1억1000만원을 인출해 생활비로 썼다.
범행 동기 상당수가 가상자산 등 투자 손실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최근 가상자산·주식 열풍이 불자 돈을 빼돌려 수익을 얻은 뒤 다시 채워놓으면 된다는 식의 ‘한탕주의’가 작동했다는 지적이다.
실제 횡령 자금의 사용처를 보면 판결문에 기재된 사건 10건 중 5건(50%)은 가상자산, 주식 등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보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은행 돈에 손을 댄 사례다. 시재금을 빼돌려 불법도박 사이트에 넣은 은행원도 있었다. 그 외에는 시모 또는 본인의 채무 변제, 생활비 등을 목적으로 횡령을 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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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이 직무상 기회를 이용해 횡령·배임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양형시 고려될 수 있는 요소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횡령·배임범죄 양형기준은 금융, 증권 등 전문직 종사자가 직업수행의 기회를 이용해 범행한 경우를 특별양형인자 가중요소로 보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실제 재판에서 집행유예 선고가 많이 나오는 데는 횡령금 변제를 통해 범행으로 인한 피해를 회복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이 꼽힌다.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은행 연봉과 퇴직금이 변제에 도움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피고인들 대부분이 범죄전력이 없는 초범이고, 범행 이전에는 건실하게 직장생활을 해왔다는 점도 유리한 양형요소로 작용했다.
분석 대상 사건 중 횡령금액이 12억8360만원으로 가장 컸던 E씨는 고객 정기예금 가입시 미리 작성받아 보관하고 있던 예금해지 전표로 정기예금을 중도해지하는 방식으로 돈을 빼돌렸지만, 횡령액을 모두 변제하고 반성한다는 점,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다는 점 덕분에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반면 해외 주요국들은 은행원의 횡령 범죄를 엄하게 처벌하고 있다. 법제처의 세계법제정보센터에 따르면, 미국은 연방법의 규제를 받는 은행 임직원의 횡령에 대해 30년 이하 징역 또는 100만달러(약 13억원) 이하 벌금 등 일반 횡령에 비해 무거운 형량을 내리고 있다. 싱가포르는 은행원의 횡령·배임에 대해 최대 20년 이하의 징역 및 벌금으로 가중처벌한다.
국내에서는 금융회사 임원별 내부통제 책임을 나눠 명시한 ‘책무구조도’ 도입을 골자로 하는 금융회사 지배구조법이 내달 3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책무구조도 도입으로 금융사고에 대한 임원의 처벌 근거가 생기는 만큼, 금융권 전반의 내부통제 강화 효과가 기대되고 있다.
다만, 반복되는 은행원 횡령 사건처럼 일선 지점에서 벌어지는 개인의 일탈을 원천 차단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은행 조직문화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하며 조직문화 감독을 예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