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벚꽃동산’ 박해수, ‘결핍은 나의 힘’…“배우로서 인정받으려는 욕구 커” [인터뷰]

연극 ‘벚꽃동산’으로 다시 한 번 홈런을 친 배우 박해수는 “단 며칠 밖에 남지 않은 무대 위 삶은 울음을 참는 날들이 될 것 같다”고 했다. [LG아트센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제가 샀습니다. 당신들의 화려한 추억동산을.” (연극 ‘벚꽃동산’ 중 황두식의 대사)

잘 차려진 슈트를 입고, 모엣 샹동을 손에 든 21세기형 자본가. 운전기사의 아들로 태어난 황두식에게서 ‘계급의 피라미드’가 역전된다. 구세대의 몰락과 신흥계급의 부상을 그리며 피날레를 향해가는 그 순간의 바로 이 대사. 연극 ‘벚꽃동산’을 꿈꿀 때 박해수(43)가 해보고 싶은 한 줄이었다.

연극의 막바지에 LG아트센터 서울에서 만난 박해수는 “‘내가 샀어요’라는 이 대사가 무척 어렵게 느껴졌다”며 “지금도 분명히 어려운데, 첫 순간엔 잘해야겠다는 부담이 있었고, 자의식을 버리고 싶어도 버려지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무대는 늘 새로웠다. 똑같은 대사, 똑같은 배우들이 만나는 장면일지라도 매번 달랐다. 박해수는 “같은 대사인데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배우들의) 감정이 매일 매일 다르다 보니 계산 없이 들어가 내 안의 것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놓게 됐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쁜 연출가로 꼽히는 사이먼 스톤, 27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전도연, ‘오징어게임’, ‘종이의 집’으로 글로벌 배우가 된 박해수가 뭉쳤다. 연극 ‘벚꽃동산’을 통해서다. 그는 꼭 한 번 무대에서 만나고 싶었던 ‘칸의 여왕’ 전도연과의 눈맞춤은 “매순간 경이롭다”며 “단 며칠 밖에 남지 않은 무대 위 삶은 울음을 참는 날들이 될 것 같다”고 한다. 연극은 오는 7일 막을 내린다.

“공연 후엔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서로를 놔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쉽네요.”

불과 한 달 밖에 되지 않는 여정에서 연극 ‘벚꽃동산’은 내내 화제였다. 매회차 매진을 기록했고, 한 명의 배우가 아닌 10명의 배우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자신을 빛냈다. 지난해 ‘파우스트’에 이어 일 년여 만에 무대로 돌아온 박해수는 이번에도 압도적이다.

안톤 체호프의 동명 유작을 무대로 가져온 ‘벚꽃동산’은 사이먼 스톤의 연출 작법이 온전히 투영돼 태어났다. ‘고전의 현대화’는 물론 ‘지역화’를 탁월하게 빚어내 온전한 ‘한국형 벚꽃동산’을 만들었다. 그 뒤엔 배우들이 있었다. ‘자수성가한 신흥 자본가’의 표상인 황두식 안엔 박해수가 자리한다.

“사이먼 스톤과의 리서치 과정을 통해 나와 로파인(원작 ‘벚꽃동산’ 속 황두식)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나의 삶과 로파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제 생각들을 나눴죠. 그러면서 제 기억 속의 아버지를 꺼내게 됐어요. 우람했던 아버지가 왜소해지는 모습을 만났던 어떤 시절의 나, 아버지에 대한 결핍과 인정욕구를 드러낸 부분들을 사이먼이 포착해내더라고요.”

연극 ‘벚꽃동산’ [LG아트센터 제공]

완벽하게 구축된 ‘인물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찾은 인물은 ‘박해수화’됐다. 그는 “황두식은 현실적인 인물이자, 과거에 얽매여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실 전 결핍이 있는 사람이에요. 제 기억 안엔 아주 무서웠던 아버지가 있었고, 아버지에게 배우로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황두식과 저의 교집합이죠. 때론 투박하고, 사랑에 대해 서툰 표현들을 하는 것도요. 다만 과시욕은 없어요. (웃음)”

황두식이라는 이름 역시 박해수가 직접 지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은 직접 짓는 일이 없다. 만약 나의 아버지라면 나의 이름들을 뭐라고 지었을까 생각하며 ‘식’자를 넣었다”며 “‘살아가면서 밥은 먹고 살아라‘라는 바람을 담은 이름이었다”고 했다.

사이먼 스톤의 제작 과정은 독특하기로 유명하다. 10여년 전 한국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나 보던 ‘쪽대본’이 배우들에게 주어진다. 배우들은 번역된 대본을 받자마자 화상 미팅을 통해 리딩 과정에 돌입했다.

박해수는 “사이먼의 제작 방식을 체험해보고 싶었다”며 “줌 리딩을 하기 위해 마이크 세팅, 500% 키운 화면 크기 등 연습실 시스템을 최적화해 배우들의 얼굴을 사이먼이 직접적으로 볼 수 있도록 했다”고 돌아봤다. 스톤 연출가는 리딩을 통해 배우들을 관찰하고 영감을 교류하며 대본 수정 작업을 거쳤다.

“배우들과 함께 토론하고 의견을 낸 부분이 고스란히 캐릭터와 만나는 것을 보는 것이 무척 재밌는 과정이었어요.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내 익숙해졌고, 역시 ‘천재는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해수는 사이먼 스톤의 ‘최애 배우’다. 스톤 연출가는 “박해수는 내가 세계에서 가장 좋아하는 배우”라고 했다. 정작 박해수는 “연습 전에는 박수 치고 웃으면서 좋아하는데, 연습이 끝날 땐 ‘안녕’하고 가버려 ‘날 싫어하는 건 아닌가’, ‘날 피하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나중에 만나 이야기하니, 사이먼은 제가 대사에 목매지 않고 그냥 달려들어 연기하는 모습을 좋아해줬던 것 같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유지하길 바랐고요. 그리고 사실 전, 겉보기엔 강한 풍채와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되게 여리거든요. 그런 이중성을 좋아해줬어요. (웃음)”

배우 박해수 [LG아트센터 제공]

사이먼 스톤이 유일하게 디렉션을 준 대사는 딱 하나뿐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눈앞에 둔 황두식의 감정이 박해수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장면이다. “전부 다 부숴버려”라고 말하던 순간. 사이먼 스톤 연출가는 그에게 “정치인이 선언하듯이 하라”고 청했다.

“처음엔 아련함을 담았어요. 집을 부순 것에 대한 아련함과 서글픔이 담겨있었죠. 그런데 어떤 감정 상태가 아닌 그저 폭발적으로, 정치인이 유세하듯이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대사를 말했더니 나라는 인물에 대한 부정과 슬픔이 더 많이 느껴지더라고요.”

자신을 담아낸 무대는 고스란히 치유의 순간으로 마주하게 된다. 박해수는 “내 안에 잔뜩 쌓인 것이 있었음을 인지하고 인정하면서 풀리는 부분이 있다”며 “살면서 경험한 결핍이 이렇게 발현되는구나 싶어 치유하기도 하고, 진짜 박해수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씩 찾아온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고 했다.

2007년 연극 ‘안나푸르나’로 데뷔한 박해수는 오랜 무명을 거쳤고, 지난 몇 년 사이 ‘넷플릭스 공무원’이라 불릴 만큼 세계적인 얼굴이 됐다. 그는 “무대 경험은 10년 이상이 되지만, 드라마와 영화는 아직 10년이 안된다”며 “영화와 드라마를 열심히 하고 싶다. 적어도 10년은 해봐야 매체의 특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지금도 개봉과 공개를 앞둔 작품이 많다. 현재 넷플릭스 ‘악연’, ‘대홍수’, 하정우가 감독으로 함께 한 ’로비’가 대기 중이고, 인터뷰 전날 버터플라이’의 촬영을 마무리했다. 누구 못지 않게 많은 선택을 받는 배우지만, 그는 끊임없이 ‘더 좋은 배우’가 되기를 욕망한다.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기에, 계속해서 많은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맡고 있는 역할 안에서의 인정이죠. 공허하고 위험하고 두려워하는 존재를 연기한다면 충분히 두려워하고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고, 힘들어하는 캐릭터라면 충분히 힘들어했다는 것을 (관객에게) 인정받고 싶어요. 유명해지거나 연기를 뽐내고 잘난체를 하려는 인정이 아닌, 직업적 인정욕구를 배우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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