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인이 싫다” 평생 천둥벌거숭이일 줄 알았는데…세상 바꾼 까칠男의 사연[인터뷰-이태호 교수]

폴 세잔, '목욕하는 사람'(일부), 1885, 캔버스에 유채, 127×96.8cm, 뉴욕 현대미술관

"흥. 웃기고 있군!"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이 보이는 곳에 있는 카페 게르부아(Cafe Guerbois). 화가 폴 세잔이 테이블을 탁 치고는 대뜸 소리쳤다. 산만한 몸집에 지저분한 수염, 보풀 많은 외투 등 범상치 않은 그의 돌발행동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에두아르 마네와 에드가 드가, 클로드 모네와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같은 카페에 있던 동료 화가들도 하던 말을 멈췄다. 과거와 요즘 예술은 이렇고, 미래 예술은 이래야 한다는 식의 토론 또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세잔은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자리를 박차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우리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누군가는 그런 세잔에 대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에서야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지만, 사실 세잔이 본격적으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건 그가 50대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세잔은 오랜 기간 무명 화가였다. 그뿐인가. 세잔은 긴 세월 관객에게 비판받고, 동료 화가에게까지 고집불통이니, 독불장군이니 조롱받는 예술가였다. 이는 세잔의 삶이 처음부터 꽃길은 아니었다는 걸 방증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외려 딱하고, 꼬장꼬장하고, 텁텁하게 산 기간이 훨씬 더 많았으리라는 걸 짐작하게 한다. 빽 소리를 지르곤 카페에서 대뜸 나가버린, 30대였던 당시 청년 세잔도 쉽지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세잔이 택한 게 은둔이었다. 그는 곧 외부와 사실상 단절한 채 그림만 그리기 시작했다. 사과를 그리고, 산과 마을을 그리고, 그렸던 걸 또 그리면서 사는 삶이었다. 이때만 해도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평생을 주목받지 못하고 산 그에게, 압도적 규모의 성공이 다가오고 있을 줄은.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가 자신의 작업실을 소개하고 있다. [이원율 기자]

지난 4일,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와 서울 연희동의 작업실에서 세잔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이 교수는 문화예술계에서 손꼽히는 권위자 중 한 명이다. 국립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전남대 교수·박물관장, 명지대 교수·박물관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등을 지냈다. 세잔에 대해 연구도 하고 국내 미술계에서의 오류도 짚어냈다.

이날 만난 그는 세잔의 삶을 새롭고도 흥미롭게 해석했다. 당시 시대 배경과 시사점 등도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와 함께 세잔의 길을 다시 걸어보고, 세잔의 여정 중 잘 알려지지 않은 ‘빈틈’ 또한 추적해 봤다.

문명을 싫어한 ‘금수저’
폴 세잔, '자화상'

“세잔은 엄청난 부잣집 아들이었어요. (세잔의 아버지는)모자 장사로 부를 쌓았는데, 그 돈으로 은행을 차렸어요.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의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유럽은 이른바 초기 자본주의 시대였어요. 그땐 국가가 아닌 개인도 은행 주인으로 나설 수 있었지요. 그러니까, (세잔 집안에는)어마어마한 재력이 있었을 거예요.”

세잔은 1839년 프랑스 엑상 프로방스에서 출생했다.

이 교수 말처럼 알고보면 세잔은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다. 꽁한 얼굴의 초상화를 볼 때 들 수 있는 생각과는 다른 부분이다. 세잔이 억세보이는 인상을 가진 이유는 따로 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세잔은 거친 땅인 시칠리아의 혈통을 갖고 있었다. 큰 얼굴과 건장한 체격, 짙은 수염과 단단한 주먹 모두 이 핏줄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세잔의 아버지는 덩치 큰 아들 녀석을 법대로 보냈다. 그렇게 가업을 이을 요량이었다.

폴 세잔, '목욕하는 사람', 1885, 캔버스에 유채, 127×96.8cm, 뉴욕 현대미술관

문제는 세잔이 법에도, 은행 일에도 영 소질이 없어보였다는 점이다. 그가 관심을 보인 건 그림뿐이었다. 고집불통 아들은 결국 1851년, 화가 꿈을 안고 호기롭게 파리 땅을 밟았다. 당시 스물두 살이었다. 하지만 파리에서 예술가로 눈길 끌기는 하늘의 별 따기 같은 일이었다. 세잔은 환영받지 못했다. 그 시절 세잔 특유의 어두침침한 작풍과 별난 성격 모두 도마 위로만 오를 일이었다.

폴 세잔, '레스타크의 붉은 지붕'

“세잔은요. 문명(文明)을 싫어했어요. ‘문명인이 싫다’는 이유로 친구들과 악수도 하지 않을 정도였어요. 신조만큼 성격도 특이했어요. 신경질적이었지요. 그런 증상이 악화해 자기 그림을 불태우기도 한 사람이에요.”

이 교수는 그런 세잔에 대해 외려 ‘휴머니티’(humanity)를 추구한 사람이었다고 정의했다.

막 꽃 피우는 산업화가 수천 년 간 이어진 인간성 내지 인간애를 훼손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 자체를 견딜 수 없는 자였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개인이 대세를 막을 수 있는가. 그렇기에 세잔의 신경증 또한 나빠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세잔은 남프랑스의 작은 항구 마을 레스타크의 풍경을 그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서 부두까지 가스등이 깔리는 걸 보고 ‘더러운 문명이 이 깨끗한 작은 항구 도시에까지 왔어!’라며 한탄했다고 해요.” 이 교수가 덧붙인 사례다.

폴 세잔, '살인', 1867~1870, 캔버스에 유채, 65x80cm, 워커 미술관

1874년, 어느덧 서른다섯 살이 된 세잔은 한 전시에 참여했다.

카미유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등이 가세한 이 행사는 훗날 최초의 인상주의전(展)으로 미술사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다만, 이는 후세의 평가일 뿐이다. 당시 이들이 연 전시회는 시작과 동시에 엄청난 비판 행렬과 마주했다. 특히 세잔. 세잔의 그림을 본 이들은 그에게 병원 치료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진지하게 주장했다. 같이 전시를 연 동료들 틈에서도 ‘세잔은 우리와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는 식의 말이 나왔다고 한다.

“흥. 웃기고 있군!” 꼬장꼬장한 세잔 또한 이처럼 지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세잔은 다시 차츰 혼자만의 세계에 천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1880년대 초. 나이 마흔 줄을 넘긴 그는 파리에서 벗어 본격적으로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山을 그리지 않았다…山이 내 안에 들어왔다”
폴 세잔, '생 빅투아르산', 1904, 캔버스에 유채, 70x92cm, 필라델피아 미술관

“그날도 어김없이 풍경화를 그리던 세잔은, 드디어 새로운 인식을 하기 시작했어요. 세잔 또한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문명화된 부분이 있었을 거예요. ‘자신의 문명화된 눈이 아닌, 자연의 눈으로 풍경을 봐야겠다’ 즉, 자연을 닮은 인간이 되고자 한 거예요. 세잔의 유명한 말이 여기서 나오죠. ‘내가 산을 그리지 않았다. 산의 의식이 내 몸에 들어왔다’. 이는 중국 북송 시대 화가 곽희(郭熙·1020?~1090?)가 저서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한 말과 같아요. ‘샘과 숲의 마음으로 산수를 봐야 한다. 사람의 마음으로 보면 안 된다(임천지심·林泉之心)’는 거예요. 둘은 엄청난 물리적 거리, 800여 년의 시간 간격 등을 두고도 똑같은 생각을 했어요.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여기서 이 교수는 “(세잔이 관련 내용을)공부했을 것”이라며 “당시 (유럽에선)동아시아 문화에 대해 유행으로 표현될 만큼 관심이 많았다”면서 동양의 예술 철학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언급했다.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1895~1900, 캔버스에 유채, 73x92cm, 오르세 미술관

세잔의 은둔은 점차 ‘위대한 은둔’으로 바뀌고 있었다. 세잔은 고정관념 가득한 문명의 시선 대신, 존재 자체에 주목하는 자연의 시선으로 대상을 보기 시작했다. 그는 기어코 새로운 걸 그릴 수 있었다. 그것은 대상의 본질(本質)이었다.

“세잔은 원형(原型)을 보고 싶어했어요. 세잔은 문명을 싫어한 만큼 자연이 파괴되는 모습 또한 보기가 싫었을 거예요. 자꾸 변해가는 걸 쫓아가는 인상주의 화풍 또한 중심을 잃고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여태껏 회화는 대상의 겉모습을 재현하는 데 치중했다. 누구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잔의 손에서 그 진리가 박살나버렸다. 대상의 겉보다 중요한 건 안이며, 껍데기보다 의미 있는 건 알맹이다. 결과적으로 세잔은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아도 되는 현대 미술의 문을 열고 만 것이었다.

혁명가가 된 세잔은 나이 오십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합당한 평가를 받았다. 수많은 젊은 화가들의 우상이 될 수 있었다.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바실리 칸딘스키 등 새로운 회화의 선구자 모두가 ‘세잔 키즈’를 자처하게 됐다. “세계 미술사를 통틀어 단 한 명의 가장 위대한 화가를 꼽으라면…. 나는 세잔을 말한다.” 이 교수의 평이다.

폴 세잔, '목매달아 죽은 사람의 집'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 이태호 교수에 따르면 제목은 '팡뒤 씨의 집'이 돼야 한다.
'Maison du Pandu' 문패. [이태호 교수]
폴 세잔이 그린 집 'Maison du Pandu' 일대 전경. 그림과 현장을 비교하면 오른쪽 집은 없어졌고, 중앙에 집들이 들어서 원경 마을 가리고 있음. [이태호 교수]

덧붙여 이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잘못 퍼진 세잔의 작품명도 소개했다. 그것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일명 ‘목매달아 죽은 사람의 집’(La Maison du Pendu)이다.

과거 이 교수는 미술 기행 코스 중 하나로 프랑스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간 적이 있다. 그는 여기에 있는 ‘목매달아 죽은 사람의 집’ 실제 모델 집을 보기 위해 나섰는데, “도저히 찾을 길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어쩌다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곳은 ‘팡뒤 씨의 집’으로 불리고 있었다. 실제로 세잔의 그림 왼편에 그려진 3층 건물 표지판도 ‘목매달아’의 ‘La Maison du pendu’가 ’아닌, ‘팡뒤네 집’인 ‘Maison du Pendu’로 P가 대문자로 쓰였다는 점 또한 확인했다. 이 교수는 누군가 그림 제목을 영어로 잘못 번역했고, 이를 국내의 누군가가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미술사가 이태호, ‘미술 교과서’ 바꿀 수 있을까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가 자신의 작업실을 소개하고 있다. [이원율 기자]

이렇게만 보면 이 교수의 전공 분야가 서양 미술사일 것으로 막연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 교수는 자신도 회화과를 전공한 화가다. 국전(國展)에 입상하고, 몇 차례 개인전을 연 적도 있다. 무엇보다도 이른바 ‘우리 미술’ 전문가로도 명성이 높다. 그는 옛 주먹도끼 시절부터 근현대 회화 등 한국 미술사 전반의 맥을 짚는 데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 특히 미술사가로서 특유의 독창적 시선, 파격적 주장으로 주목을 받은 적도 적지 않다.

“젊을 적 그림을 그릴 때는 저 또한 세잔을 닮고 싶었어요. 그림이 (보기에)편해서 그랬지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세잔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자료가 적었어요. 1980년대 초에도 세잔의 채색 도판을 구하기가 힘들었지요. 군대에 다녀온 후 (학교에)미술사학과가 생겼어요. 그림 (이론)공부부터 한 후 그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겸했지요. 중간에 국립 중앙박물관에 (학예연구사로)들어가 전공을 확 바꿨고, 국립 광주박물관과 전남대 교수·박물관장으로 간 뒤에는 민중 미술 쪽 일을 많이 했어요.”

그런 이 교수는 논문도 강렬했다.

고구려 고분 벽화를 주제로 그가 쓴 글이 있다. 우리 역사인 고구려 시기 산수화 형식의 회화가 발견돼 중국보다 산수화의 역사가 빨랐다는 내용이다. 누구도 한 적 없는 신선한 주장이자, 우리나라 입장에선 더더욱 소중한 연구 자료였다.

“과거 미국 학계에서 중국의 초기 산수화 관련 연구가 이뤄졌어요. 중국의 경우 송나라 때 산수화적 형식이 완성되는 것으로 나오지요. 그런데요. 보다보니 (송나라보다)먼 과거인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산과 나무 그림이 있는 거예요. 이와 관련한 연구에서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산수화적 형식 또한 찾을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시기적으로 볼 때 고구려가 앞선 거예요. 그래서 사실은 고구려가 시발점이다, 이런 논문을 썼지요.”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의 작업실 모습. [이원율 기자]

이 교수는 이런 식으로 계속 연구에 임했다.

세잔이 그랬듯 모두가 당연하게 보는 걸 당연하게 보지 않고,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보는 걸 한 번 더 검증하는 식이었다. ‘무슨 작품이든 직접 보지 않고선 관련 글을 쓰지 않는다.’ 그의 신조였다. 이 교수는 그사이 명지대 교수·박물관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나아가 경기도와 충청남도에서 문화재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송도기행첩'에 수록된 작품 ‘영통동구’(영통동 입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월간 민화]

그런 이 교수는 최근에도 기존의 지성에 반기를 든 주장을 했다.

표암 강세황의 걸작 화첩으로 알려진 〈송도기행첩〉이 사실은 표암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말이 진실로 확인되면, 현재의 미술 교과서 상당수가 내용을 수정해야 할 만큼 파장이 커질 수 있다.

“우연히 지난해에 〈송도기행첩〉 전체와 (함께 쓰인)글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화첩에는 강세황이 그렸다는 이야기가 어디에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문집을 뒤졌더니 거기에도 강세황이 이를 그렸다는 식의 흔적이 하나도 없어요. 다 살펴봤지만 제 결론은 이거예요. 강세황이 그리지 않은 게 확실하다. 약간의 조작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낙관이 찍혀 있어야 할 자리의 종이가 오려진 점 등이 그래요. 그리고 강세황의 글을 이 화첩에서 볼 수 있다는데, 확인해보니 이 또한 강세황의 자작시가 아니에요. 아마 당시 개성 유수 오수채가 한 화가에게 작업을 맡겨 그림을 그리고, 강세황이 때마침 그쪽을 찾았기에 ‘온 김에 글씨나 써주시오’라고 (부탁)했던 것 같아요. 이 과정에서 강세황은 (자기 작품이 아닌 만큼)자기가 지은 시가 아닌 걸 썼을 테고…. 또한 화풍도 정밀하게 비교하고 확인해봤어요. 이건 (강세황의 작품이)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이렇게 판단하게 된 거예요.”

“세잔도 정말 즐겼다…힘껏 즐기고 몰입하자”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가 만든 작품들. [이원율 기자]

스스로 업계에서 은퇴했다고 말하는 이 교수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운 글과 그림 작업을 하고 있다.

모두가 발이 묶인 채 숨죽여 살아야 한 코로나19 시기에는 3년간 스케치 등을 포함해 6000여점의 작품 활동도 했다.

이 교수는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에 개설된 ‘민화 전공’에서의 일을 새로운 소임으로 생각하고 미래를 찾고 있다. 그는 “요즘 들어 특히 민화가 떠오르는 만큼, 이곳에서도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라고 했다.

이태호, '호기심', 1973

세잔을 이야기할 때도, 자신의 여정을 이야기할 때도 이 교수는 종종 “미술사를 전공하길 잘했다”는 말을 했다. 그는 “인간이 더욱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이끌어주는 중요한 요소가 예술인 것 같다”며 “작가의 삶과 작가의 시절, 당시의 고민과 시대정신. 이런 쪽을 천착하고, 파고들다 보면 새로운 생각이 열릴 수 있다”는 말도 강조했다.

끝으로 이 교수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태도로 말한 건 ‘즐거움’이었다.

“세잔은 고통스러웠을까요? 아닐 거예요. 세잔은 예술을 정말 즐겼어요. 즐기는 마음이 없었다면, 결코 그 경지까지 오르지 못했을 거예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힘껏 즐기고, 있는 힘을 다해 몰입하면 결실을 이룰 수 있다는 것. 세잔의 삶, 나아가 예술의 세계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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