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024년 세법개정안을 내놨다. 상속·증여세법 개정이 핵심이다. 일부 컨텐츠 제목을 보면 마치 법이 이미 바뀐 듯한 제목들이 많다. 정부의 세법 개정안은 어디까지나 안(案)이다. 세율·세목 법정주의에 따라 법 개정 절차를 밟아야 한다.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국회 의석 과반을 가진 야당은 ‘부자만 감세’라며 펄쩍 뛰고 있다.
야당도 25년이나 묵은 상속·증여세법 손질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자산가격 상승에 따른 중산층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이유다. 거대 야당이지만 대통령의 거부권을 감안하면 단독 법 개정은 어렵다. 여야의 타협이 필요해 보인다. 제도를 합리적으로 고치되 국민 여론도 반영할 ‘묘수’가 절실하다.
▶ 개편은 불가피했지만…부자일수록 혜택 더 커
*정부는 세부담 적정화를 이유로 상속·증여세 부담 완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
당초 정부안이 상속세 세율은 고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20%인 최대주주 할증만 폐지해도 최고세율이 60%에서 50%로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세율을 직접 건드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최고라는 오명을 벗어야 한다는 명분에 기댄 것으로 보인다. 균형(?)을 위해 최고세율 구간을 낮추면서 최저세율 구간은 높였다.
최고와 최저, 어느 쪽의 혜택이 더 클까? 최저세율(10%) 구간이 1억원에서 2억원으로 낮아지면 1억원 당 세금이 1000만원 줄어든다. 최고세율(50%) 구간이 없어지면 과세표준이 30억원을 초과할 때 세금이 10%포인트 줄어든다. 1억원 당 1000만원이다.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과표를 1억원 높여보자. 과표가 3억원이면 현행 5000만원, 정부안 4000만원이다. 과표가 32억원이면 현행 11억4000만원, 정부안 11억1000만원이다. 감소액이 3000만원으로 더 많다. 과표가 높을수록 혜택이 더 커지는 구조다.
증여세 세율은 상속세 세율을 사용한다. 상속세율을 고치면 증여세율도 함께 달라진다. 증여 후 10년 이 지나면 상속재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세율이 낮아지면 사전증여 부담도 줄어든다. 사전 증여는 중산층 보다 자산가들에게 흔하다.
▶자녀공제 파격 확대 이유는
*자녀공제 확대는 세부담 경감이 이유지만 유산취득세의 일부 대안일 수도 있다. |
이번 정부안을 중산층 부담 완화로 보는 이유는 자녀공제의 파격적 확대다. 5000만원에서 5억원으로 무려 10배를 올렸다. 민주당은 자녀공제 대신 일괄공제 한도를 현재 5억원에서 10억원으로 올리자는 입장이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기존에는 일괄공제(5억원)가 자녀공제 보다 유리했다. 정부안은 자녀가 1명만 있어도 일괄공제 보다 많은 공제를 하자는 내용이다. 자녀가 3명이면 배우자와 합해 22억원을 공제받을 수 있다. 공제액수가 클수록 세액은 감소한다. 자녀수가 많을수록 1인당 피상속 자산은 줄어든다. 상속세 과세표준은 상속자산 총액기준으로 정해진다. 이 때문에 피상속자 취득자산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유산취득방식을 도입하자는 주장이 한때 힘을 얻었다. 하지만 새로운 제도 도입은 광범위한 법개정이 필요할 수 있다. 유산취득세 도입을 유보한 대신 자녀공제를 크게 높인 것으로 보인다.
▶부자 더 감세…숨은 이유들
서울에 아파트 한 채 가진 중산층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논리가 세법 개정안의 핵심 동력이다. 이번 개정안대로면 중산층의 얻게 될 혜택이 커질까? 이를 위해서는 일단 중산층의 정의부터 살펴야 한다.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가진 이도 중산층이라고 치자. 그러면 서울의 아파트 한 채를 빚도 없이 물려줄 정도면 중산층일까? 아니면 그 이상일까? 다른 선진국 대비 미비한 사회안전망과 노령빈곤 우려를 감안할 때 노후 비용을 치르고 남은 주택의 순자산가액이 10억원(현행 상속세 공제 한도)을 넘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자녀공제 파격 강화도 부자들에게 더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부자일수록 자녀를 더 많이 낳기가 경제적으로 유리하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지난해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에게 의뢰한 ‘저출산 정책 평가 및 핵심 과제 선정 연구’를 보면 출산지원금 정책으로 유의미하게 출산이 늘어난 소득 분위는 소득 상위 21~40%인 4분위뿐이다. 1~3분위(하위 60%)는 현금 지원에도 양육비 부담이 여전히 크다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소득을 3개층(상위·중위·하위)으로 나눠 2010년 대비 2019년 출산율을 비교한 결과도 상위층의 출산율이 24% 감소할 때 하위층은 51%나 급감했다. 소득하위 40% 대비 소득상위 40%의 출산 배수도 2배를 넘은 지 오래다.
▶부자 존중 vs. 양극화 해소
자본주의에서 부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정당하게 부를 일구고 경제발전에 기여도 했다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경받는게 마땅하다. 부자라도 무리한 제도적 부담을 지고 있다면 합리적으로 조정하는게 당연하다. 특히 다른 나라 대비 지나치게 불리한 규제는 부와 인재의 해외유출을 촉발할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부자만 감세’인 경우는 문제다. 국가는 누진세 체계를 통해 소득재분배와 경제 균형을 추구한다. 지나친 양극화는 경제활력을 떨어뜨리고 사회 불안을 조장한다. 헌법에 근거도 있다.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적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헌법 119조 2항)
상속·증여세율 조정은 필요하다. 자산관련 세 부담은 낮아질수록 자산이 많은 이들의 혜택이 더 커진다. 인구 고령화로 중산층과 서민 대부분은 상속은 커녕 노후준비도 부족한 경우가 많다. ‘부자만 감세’가 되지 않으려면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배려도 충분해야 한다. 상속·증여세가 아닌 다른 제도 개선으로라도 보완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세수감소에 대한 대책도 치밀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재정 지출이 충분하지 않아 경기가 위축되면 그 피해를 더 많이 보는 쪽도 부자 보다는 중산층·서민이다.
경제도 결국 정치다. 올해 세계는 역대 가장 많은 선거를 치르고 있다. 최대 공통변수는 역시 경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