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과 그의 아내 헬레네 메르시에가 국빈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해 9월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 도착했다. [AP] |
[헤럴드경제=정목희 기자]‘주얼리 브랜드 쇼메가 디자인한 메달, 루이비통 로고가 새겨진 시상식 메달 받침대와 메달 보관 케이스, LVMH가 만든 유니폼을 입고 펜티 뷰티 화장품으로 메이크업을 한 메달 시상 자원봉사자들, 남성복 브랜드인 벨루티가 제작한 프랑스 선수단 단복, VIP 행사장 테이블에 올라가는 모에헤네시의 와인과 주류…’
2024년 파리 하계 올림픽을 위해 LVMH의 메종 쇼멧이 만든 올림픽 메달이 LVMH 파빌리온에 전시돼 있다. [AP] |
26일 시작된 2024 프랑스 올림픽에는 프랑스 명품그룹 루이비통 모에헤네시(LVMH)의 브랜드가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구촌 선수들이 기량을 펼치는 최대 축제인 올림픽에서 루이비통, 디올, 티파니, 태그호이어, 쇼메, 벨루티 등 무려 75개의 럭셔리 브랜드를 소유한 세계 최고 갑부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이 또 하나의 ‘쇼’를 펼치는 셈이다.
2024 파리 하계 올림픽에 쓰일 LVMH가 만든 메달 시상 자원봉사자 유니폼이 LVMH 파빌리온에 전시돼 있다. [AP] |
LVMH의 파리 올림픽 후원 금액은 1억5000만유로(약 2260억원)로 알려진다. 루이비통 본사는 퐁네프 다리와 가까워 센강을 따라 진행될 개막식 퍼레이드에서도 눈에 띌 전망이다.
아르노 회장의 장남인 앙투안 아르노 LVMH 환경 및 이미지 책임자는 “프랑스 브랜드로서 일을 올바른 방식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베르나르 아르노(왼쪽 세번째) LVMH 회장이 파리 루이비통 재단에서 열린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AFP] |
LVMH가 곧 프랑스라는 개념을 각인시킨 럭셔리 제국의 아르노 회장은 이른바 금수저다. 그는 프랑스의 MIT로 불리는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한후 29세에 아버지의 건설회사를 물려 받았다. 건설 부문을 매각하고 부동산 개발업으로 전향한 후 지중해 연안에서 휴가용 콘도 새발 사업으로 첫번째 대박을 냈다.
아르노 회장은 1981년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당선되자 돌연 미국행을 택한다. 그는 미국 생활 때 택시기사의 말을 듣고 명품의 가치에 눈을 떴다고 한다. ‘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게 뭐냐’고 묻자 택시기사가 ‘프랑스 대통령 이름은 모르겠고, 크리스챤 디올은 안다’라고 답을 했는데, 한 나라의 대통령은 몰라도 명품 브랜드는 안다는 말에 아르노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아르노 회장의 명품 제국은 1984년 그의 나이 35세 때 단돈 1프랑(약 200원)에 크리스챤 디올의 모기업인 섬유기업 부삭(Boussac)을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이 회사는 당시 경영난으로 공적자금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프랑스 정부가 매각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르노 회장은 인맥을 총동원해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그는 부삭그룹를 인수한 지 3년 만에 4400억원의 흑자회사로 전환시켰다.
당시 아르노 회장은 부삭 임직원 1만6000명 중 1만2250명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해 정부에서 부채를 탕감 받았다. 하지만 부삭을 손에 넣은 그는 디올과 고급 백화점 봉마르쉐만 빼고 나머지 브랜드는 매각하거나 없애버렸다. 이 과정에서 부삭의 고용인원은 약 8000명으로 쪼그라 들었다. 이 사건으로 아르노 회장에게는 ‘터미네이터(말살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또 한명의 명품 사업가인 앙리 라카미에 LVMH 전 회장은 이 ‘터미너이터’에게 회사를 넘겨주게 된다. 라카미에 전 회장은 1987년 6월 패션 브랜드 루이비통과 샴페인 회사 모엣헤네시를 합병해 LVMH를 탄생했다. 하지만 알랭 슈발리에 모에헤네시 회장과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사이 동업자로 영입한 젊은 사업가 아르노가 지분을 확보하고 LVMH 경영권을 장악해버렸다. 무차별적 M&A로 부삭과 루이비통을 손에 넣으면서 아르노의 별명은 ‘캐시미어를 두른 늑대’가 됐다.
이후에도 그는 거침없이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1990년대 중후반 셀린느와 로에베를 인수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펜디와 불가리, 로로피아나 등을 인수했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이 지난해 1월 파리 LVMH 본사에서 2022년도 그룹 실적을 발표하고 있다. [AFP] |
아르노는 CEO에 오른 후 30여 년 동안 LVMH를 와인, 양주, 패션, 가죽제품, 향수, 화장품, 시계, 보석, 고급 여행 및 호텔 숙박까지 판매하는 75개의 레이블을 보유한 명품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명품 브랜드가 서로를 강화시킬 수 있다고 예측했다. 강한 브랜드가 약한 브랜드를 보완해주며, 정체성을 확립하고 시장에서 성장할 시간을 준다고 생각했다. 아르노 회장은 “새로운 브랜드를 영입하면 그룹 전체가 그 브랜드의 후방 업무를 지원할 수 있다”며 “디올을 인수한 후 얻은 아이디어”라고 말했다.
아르노 회장의 공격적인 인수가 늘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1999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브랜드 구찌를 노리다가 피노프랭탕르두트(현 케링그룹)에 빼앗겼다. 구찌 인수 실패 이후 아르노 회장은 에르메스를 얻기 위해 지분을 17%까지 사 모았다. 하지만 에르메스가 가족 지주 회사를 설립해 경영권을 방어하고 공시 의무 위반으로 아르노를 고발해 반격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가 지난달 아르노 회장에게 앞으로도 더 많은 브랜드를 인수할 계획이 있는지를 묻자, 그는 “미래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지만, 당연히 지금 말할 수는 없다”며 “꼭 (인수를) 해야할 필요는 없지만, 몇몇 브랜드가 (LVMH그룹과) 매우 잘 맞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일부 프랑스 언론은 ‘아르노가 경솔한 미국식 사업 접근법을 가졌다’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도 “아르노 회장은 유럽의 자본가이지만 미국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거나 대중의 주목을 끄는 공개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소셜미디어(SNS) 활동도 일절 하지 않는다. 블룸버그는 아르노를 “트위터를 하지 않는 세계 최고 부자”라고 묘사했다.
아르노 회장은 지난해 포브스지가 선정한 ‘2023 억만장자’ 순위에서 2110억달러(약 280조원)의 재산으로 1위에 올랐다. 올해 3월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에서도 순자산 2010억달러로 빅테크 기업 경영인들을 제치고 세계 최대 부호에 올랐다. 이후 주가가 하락하며 7월 25일 기준 순자산 1818억달러로 3위를 차지하고 있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Oxford Union 유튜브 영상 갈무리] |
지난 2022년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공개한 아르노 회장과 고(故)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의 대화는 아르노 회장의 경영 철학을 잘 보여준다.
-“30년 뒤에도 사람들이 아이폰을 쓸까요?”(아르노)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LVMH 브랜드 제품들이) 30년 후에도 건재할까요?”(잡스)
-“모르긴 해도 사람들은 30년 뒤에도 변함없이 고급 샴페인에 취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상품이 아니라 역사의 일부를 팔고 있으니까요”(아르노)
그가 말한 ‘고급 샴페인’은 LVMH의 주류 회사 모에헤네시의 대표 ‘돔 페리뇽’을 떠올리게 한다. 돔 페리뇽은 17세기 프랑스 수도사가 만든 샴페인으로 역사적 의미가 담긴 브랜드로 내세울 법하다.
그의 이 말은 역사를 브랜드에 입힌 LVMH가 ‘명품 불패 신화’를 이어갈 것이라는 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줬다.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지난해 6월 중국 쓰촨성 청두에 있는 명품 매장을 방문하고 있다. [@NmqbChinaNews X(엑스·옛 트위터) 영상 갈무리] |
명품은 원래 유럽 왕실과 귀족 등 극소수 고객을 위한 수공예 제품을 일컫었다. 명품이 대중에게 다가온 것은 공업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명품의 대중화에 기여한 일등공신은 아르노 회장이다. 그는 명품을 ‘최고 품질의 상품’으로 재정의했다.
아르노 회장은 명품을 갖고 싶어하는 욕구를 자극하는 마케팅에 이를 활용했다. 상류층 거주지에 있던 명품 매장을 백화점이나 면세점으로 확대해 중산층도 명품에 접근할 수 있게 하고 동경하게 했다. LVMH 상품을 파는 매장은 전 세계 5600여 곳에 달한다.
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명품의 평민화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글로벌 시장을 상대로 큰 돈을 벌었다. 아르노의 ‘명품론’ 두 팔 벌려 환영한 곳은 중국이다. 중국은 LVMH의 든든한 응원국이 됐다. 중국이 대외 개방을 가속화하던 1992년 루이비통은 베이징 팰리스호텔 지하에 1호 매장을 냈다. 매장이 생기자마자 중국 대륙은 명품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아르노는 첫 매장을 열기 위해 중국을 방문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내가 중국에 갔을 때는 차도, 건물도 없었다”며 “호텔인데도 뜨거운 물이 안 나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길거리에서 본 사람들의 대부분은 마오쩌둥 복장을 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아르노는 중국이 유럽·미국에 이어 거대한 명품 소비 시장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는 중국인 음악가와 배우들을 브랜드 홍보 대사로 채용하고, 만리장성과 같은 장소에서 패션쇼를 개최했다. 매장은 현지 특색을 살린 디자인으로 꾸몄다. 예컨대 2022년 호랑이해에 쓰촨성 청두에 있는 루이비통 플래그십 매장 외관에 거대한 호랑이 꼬리를 디자인해 넣었다.
글로벌 투자은행 HSBC의 추산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해 기준 미국에 이어 LVMH의 두 번째 소비시장이다. 중국 본토에만 54개의 루이비통 매장이 있으며, 지난해에는 23개의 LVMH 브랜드가 58개의 매장을 여는 놀라운 성과를 이뤘다.
아르노가 장녀인 델핀 아르노와 함께 지난해 중국을 방문하자 현지인들은 그를 보려고 매장으로 몰려들었다. 중국 소셜미디어에서는 아르노가 상하이의 음식점에서 무엇을 주문했는지와 현지 임원들과 함께 걷는 사진 등이 빠르게 공유됐다.
당시 아르노는 몇몇 중국인들이 자신에게 아기를 축복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며 “조금 이상한 경험이었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이 그의 장녀 델핀 아르노 크리스챤 디올 최고경영자(CEO)와 함께 있다. [@XQueenCrew Yuxin X(엑스·옛 트위터) 영상 갈무리] |
아르노 회장은 한 달에 한번 루이비통 본사의 개인 식당에 다섯 자녀를 불러 90분 동안 점심을 먹는다. 이 자리에서 아르노 회장이 태블릿PC로 준비한 토론 주제를 읽으면 자녀들은 각자 의견을 내야 한다. 주제는 기업의 브랜드별 개편 여부, 샴페인을 생산할 포도밭 관리, 이탈리아 핸드백에 대한 토론 등 다양하다.
이를 두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아르노 회장이 럭셔리 제국을 이끌 후계자 선정을 위한 오디션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아르노는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다섯 명 중 누가 회장직을 인수할 능력이 있는지 봅시다”라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아르노는 두 번 결혼해 딸 하나와 아들 넷을 뒀는데, 모두 LVMH 산하에서 일하고 있다. 현재까지는 장녀 델핀의 점수가 가장 높아 보인다. 델핀은 지난 1월 핵심 계열사인 크리스챤 디올의 CEO 자리에 올랐다. 이에 외신들은 “현재까지 델핀이 선두에 있다”고 평했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의 넷째 프레데릭 아르노 태그호이어 최고경영자(CEO)와 다섯째인 장 아르노 루이비통 시계 부문 마케팅 디렉터가 대화하고 있다. [@Historic Vids X(엑스) 영상 갈무리] |
둘째 앙투안 아르노는 크리스찬 디올 SE 부회장이며, 셋째 알렉산더 아르노는 티파니앤코 부사장, 넷째 프레데릭 아르노는 태그호이어 CEO, 다섯째 장 아르노는 루이비통 시계 부문을 담당하는 등 모두 계열사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아르노 회장의 후계자 지명에 대한 추측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난해 LVMH CEO 은퇴 연령을 75세에서 80세로 올렸다. 아르노는 1949년생으로 올해 만 75세다. 아르노가 최근 넷째 프레데릭을 또 하나의 지주회사 부사장으로 지명한 것을 보고 일부 분석가들은 프레데릭이 유력한 후계자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시드니 톨레다노 전 크리스챤 디올 CEO는 “아르노 회장은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라며 “승계 시점에 경영 상황을 고려해 최적이라고 판단되는 자식을 선택할 것”이라고 했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이 지난해 6월 중국에서 블룸버그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Bloomberg TV X(엑스) 영상 갈무리] |
명품 브랜드의 수장으로서 아르노 회장의 시그니처 스타일은 모던 클래식이다. 패션부터 제스처, 소통 방식에 이르기까지 아르노는 절제되지만 적극적인 자신만의 스타일을 일관성 있게 내보인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는 인터뷰 당시 아르노의 모습을 “날씬하고 흠 잡을 데 없으며, 디올 네이비 블레이저와 검정 터틀넥, 검정 슬렉스와 베를루티 로퍼를 신고 은색 루이비통 탕부르 시계를 차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시계의 가격은 1만8500유로(2797만원)다.
평소 공식 행사에서 아르노는 깔끔한 블랙 슈트와 화이트 셔츠, 가끔 실크 타이로 포인트를 줘 품격을 높인다. 세심한 스타일링을 통해 그의 프로페셔널한 이미지가 부각되고 LVMH그룹의 고급스러움이 강조된다.
또 아르노 회장의 악수는 자신감의 상징으로 해석되곤 한다.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단단하고 강한 악수를 하는 모습으로 결단력 있는 리더의 자질을 발산한다는 것이다.
아르노의 걸음걸이는 신중하고 어조는 차분하다. 이는 그의 냉정하고 분석적인 경영 스타일과 일치한다. 인터뷰와 연설에서 아르노는 간결하고 명료한 언어를 사용하며, 청중에게 핵심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하려 노력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베르마르 아르노 LMVH 회장 [AP] |
아르노 회장의 차분하고 명확한 소통 방식은 LVMH그룹의 이미지 브랜딩이 되기도 한다. 그는 또한 후계자 문제를 공개적으로 고민하며 자신의 건강과 권위를 강조하는 발언을 자주 하는데 이는 그가 여전히 그룹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술에도 조예가 깊다. 그는 수십년에 걸쳐 예술품을 수집해 지난 2014년 루이비통재단 미술관을 개관했으며 수준급의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는 “아르노가 일하는 사무실에도 엔디워홀이 그린 세 점의 그림이 걸려 있다”며 “한쪽 구석에는 피카소의 그림이 사무실 구석에서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전했다.
2019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후 복구 작업에 2억1200만달러를 기부하는 등 사회적 책임에도 적극적이라는 평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