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 광산 인근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이 28일 조선인 노동자 관련 전시물이 있는 새로운 전시 공간을 공개했다. 작은 전시실에 노동자 모집·알선에 조선총독부가 관여했음을 설명하는 패널 등이 설치됐다. 사진은 조선인이 모집, 관 알선, 징용 등 다양한 형태로 사도 광산에 동원됐음을 보여주는 패널. [연합] |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한국 정부가 일본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관련해 일본 정부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강제동원’ 문구를 명시하라는 요구를 했는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외교부가 ‘강제동원’, ‘강제노동’ 문구를 넣으라고 요구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고 “한일간 합의는 막판까지 불투명했고 모든 것은 최종단계에서 합의됐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논란의 핵심 사안에 대한 답변을 회피하고 있다. 야당 의원들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회의를 개최해 진상을 파악하겠다는 입장이다.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논란의 핵심은 “전체 역사를 반영하라”는 우리의 입장을 일본 정부가 받아들여 등재 전 선조치를 했다는 우리 정부 판단의 적절성이다.
세계유산위원회(WHC) 위원국인 한국은 일본이 조선인 노동자 전시물을 사도광산 인근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설치하고 매년 추도식을 개최하겠다는 조치를 받아들여 등재에 찬성했다. 한국의 동의로 표 대결 없이 사도광산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그러나 28일 개장된 현지 전시실에는 “1938년 4월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징용령으로 모집, 관 알선, 징용이 한반도에 도입됐다”는 설명만 적혀있을 뿐, 전시관 어디에도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로 동원됐다는 것을 명시하는 ‘강제동원’이나 ‘강제노역’ 등 문구가 없다. 조선총독부가 관여했다는 사실을 암시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실은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 등재 전에 선제적으로 조선인 노동자 전시실을 여는 등 선(先) 조치를 했다”며 “등재 전에 일본 측의 행동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데 의미를 부여했다. ‘강제동원’ 표현보다 ‘실제 조치’에 중점을 둔 것이다.
시선은 사도광산 등재 전 한일 간 협상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전시물에 ‘강제동원’ 문구를 넣으라는 요구를 했는지 여부에 쏠렸다. 특히 요미우리 신문은 “한일 양국 정부가 현지 전시 시설에서 ‘강제노동’ 문구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당시의 생활상 등을 설명하는 것으로 사전에 의견을 모았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대로라면 우리 정부가 ‘강제노동’을 명시하지 않겠다는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된다.
외교부는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에 대해 “전혀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강제노동’ 문구를 요구했느냐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30일 “실제 전시 내용을 한일이 협의해 구성할 때 우리측은 강제성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 많은 내용을 요구했으며, 일본이 최종적으로 수용한 것이 현재 전시 내용”이라며 “이러한 부분은 협상의 상세 내용이라 자세히 설명할 수 없으나, 우리가 끝까지 여러 가지를 요구하여 협상은 막판에 타결됐다”고 밝혔다.
앞서 외교부 당국자는 “2015년 발언문에서 강제성이 확보된 만큼 강제성은 여러 사실로 설명하는 부분에 중점을 두어서 협상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설명을 종합하면 협의 과정에서 ‘강제동원’ 문구를 명시할 것은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전시물에 강제성이 드러나는 내용을 추가하라는 입장을 관철시키는 데 주력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강제동원 배제에 합의했다’는 요미우리의 보도는 사실무근이지만, 이것이 ‘강제동원’ 문구를 요구하지 않은 것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없다.
문제는 ‘강제노역’에 대한 입장을 번복했던 일본의 전례가 있다는 점이다. 2015년 군함도(하시마섬)의 세계유산 등재 당시 일본 정부가 “한국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선에서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을 했다”고 밝혔지만, 등재가 결정되자마자 기시다 후미오 당시 외교장관이 “‘Forced to Work’라는 표현은 강제 노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입장을 바꿨다.
당장 일본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29일 ‘강제노동’ 표현을 빼기로 협상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외교상 오고 간 얘기에 대한 자세한 답변은 삼가겠다”며 모호한 답변을 내놓아 논란은 더욱 커졌다.
결과적으로 이번 사도광산 등재 동의에 따른 외교적인 부담은 한국 정부의 몫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화됐다.
야권에서는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며 조치에 나섰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외통위와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수석전문위원에게 경위파악을 지시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와 관련해 “관련 언론보도를 접하고 국회에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외통위 소속 야당의원들은 전날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의힘이 개회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야당 단독으로 개회 요구서를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