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빛나 기자] 급등락을 반복하며 변동성이 커진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엔화가 공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저금리 엔화를 해외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는 일본의 ‘와타나베 부인(외환투자자)’이 서둘러 짐을 싸면서 시장의 혼돈을 키웠다는 지적이 나오면서다.
2000년대에도 와타나베 부인이 운영하던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으로 아이슬란드, 브라질 등의 금융시장이 붕괴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멕시코 페소 위기론이 나오면서 시장의 공포감을 키우고 있다.
일본인들은 고수익보다 안전 자산을 선호하는 투자 성향을 보여 왔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 거품이 붕괴된 1990년 이후 초저금리 기조가 유지되자 엔화를 빌려 고금리 국가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라는 독특한 투자가 대규모로 행해졌는데, 이 투자자를 ‘와타나베 부인’이라고 칭한다. 와타나베는 일본에서 흔한 성이고 투자자 중 주부가 많아 부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엔 캐리 트레이드 규모는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1990년 이후 최대 수조달러(수백조에서 수천조원)로 불어난 것으로 추산하는 정도다. 거의 공짜로 빌린 돈은 고수익을 쫒아 미국채 뿐만 아니라 부동산, 신흥시장 등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면서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펜데믹 직후 시점에 급격히 청산되는 패턴을 보이며 글로벌 불안을 키우는 요인이 됐다.
아이슬란드와 브라질이 대표적인 사례다. 2000년대 초반 와타나베 부인은 엔화로 아이슬란드 크로나화에 대거 투자했다. 그러다 2006년 미국의 통화정책 변화가 예상되면서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시작됐고 아이슬란드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2006년 3월부터 수 개월동안 아이슬란드 주식시장은 20% 가까이 폭락했다. 크로나화 가치도 폭락을 이어갔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아이슬란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신세가 됐다.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17년 만에 금리 인상을 결정한 19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엔화를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
브라질 헤알 시장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기에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대거 유출되면서 붕괴됐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100을 넘지 않았던 뉴욕증시 ‘공포지수’로 불리는 변동성지수(VIX)는 2008년 10월 320.6까지 치솟았다. 그 해 8월 헤알/엔 환율은 440대에서 12월 250대로 주저 앉았다.
이번에는 멕시코 페소가 위기에 놓일 수 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엔 캐리 트레이드는 멕시코 페소 등 라틴 아메리카에서 거의 10년간 인기를 끌고 있다”며 “달러당 17페소 이하로 떨어지는 페소 강세에도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지난 3월 블룸버그가 집계한 데이터에 따르면 페소의 리스크 대비 수익을 나타내는 위험 보상비율은 일부 다른 통화들보다 높았으며, 가장 수익률이 좋은 통화로 평가 받기도 했다.
블룸버그 칼럼니스트 존 오서스는 빅 테이크 데일리 팟캐스트에서 “2000년 이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 투자 수익보다 엔화를 빌려서 페소화에 투자한 경우 수익이 더 많았을 것”이라며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5일 엔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트레이드 대상이 됐던 멕시코 페소의 환율은 단 하루 만에 6% 넘게 하락했다. AP통신은 “시장 변동성이 특히 커진 이 시기에 캐리 트레이드는 당분간 투자자들에게 ‘예측 불가’ 요인으로 존재할 것 같다”고 전했다.
JP모건이 추적하는 주요 10개국(G10), 신흥시장, 글로벌 캐리 트레이드 바스킷의 수익은 5월 이후 약 10% 감소했으며, 이로 인해 올해 수익이 모두 사라졌다.
이미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거의 빠져나갔다는 지적도 나온다. JP모건은 엔화를 포함한 글로벌 캐리 트레이드의 4분의 3이 청산된 것으로 분석된다고 밝혔다. JP모건은 “현재 글로벌 캐리 트레이드의 보상이 위험에 비해 매력적이지 않을 것 같다”고 전했다.
과거만큼 와타나베 부인의 이탈이 경제 침체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8일(현지시간) 맥쿼리는 투자 노트에서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좋았던 엔 캐리 트레이드의 갑작스러운 청산은 금융시장에서 ‘심정지’였다기보단 “심계항진’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또 맥쿼리는 “주요국 통화정책이 추가로 탈동기화하는 등의 충격이 더 오지 않는다면 엔 캐리 청산이 낳은 파문은 훨씬 더 잦아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