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지기인 신영희 조상현 명창이 전구세계소리축제를 통해 30년 만에 한 무대에 오른다. 두 사람의 만남에 국악계는 다시는 볼 수 없을 ‘고별 무대’라고 입을 모은다. 이날의 공연은 이번 추석 KBS를 통해 다시 볼 수 있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 “그 때가 55~56년 전이었어요. TBC에 가서 녹화를 하는데 웬 점잖은 노인 한 명이 뒤에 있더라고. 평소 녹화 땐 있던 사람도 쫓아냈는데 다들 쉬쉬 하는 거예요. 알고 보니 이병철 회장이었어요.”
1960년대 후반,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1910~1987)과 국창 조상현은 이날 처음 만났다. 조 명창은 이 회장의 ‘최애 소리꾼’이었다. “천 년이 가도 나오지 않을 소리”라고 극찬했고, 서울에 머물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알고 석관동의 집까지 사줬다. 광활한 농토 위에 지어진 용인 별장으로 초대해 조 명창의 ‘예술’을 나누고 칭송한 것도 이 회장이었다. 조 명창은 명실상부 당대 최고의 스타였다.
#2. “패물이 농에만 담아두는 겁니까? 왜 집에만 둬야 합니까? 외출할 때 차고 나가야죠. 예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술을 우리만 좋은 것이라고 하면 누가 알아줍니까. 내놔야죠.”
스승인 만정 김소희(1917~1995) 명창을 설득하기 위해 제자 신영희는 이렇게 말했다. 창극, 연극에 이어 코미디 프로그램 ‘쓰리랑 부부’에 출연하겠다는 결심을 이야기하면서다. 신영희 명창은 ‘국악 대중화’를 일군 첫 세대이자, 세대를 막론하고 대중적 인지도를 가진 첫 스타 소리꾼이다.
일평생 소릿길을 걸어온 스타 명창들을 마주하자, 시간은 끊임없이 거꾸로 흘렀다. 두 사람이 호령하던 오랜 날들엔 우리 소리의 역사가 쌓였다. 조상현(87), 신영희(82) 명창이다. 두 사람이 30년 만에 한 무대에 선다. ‘조상현 신영희의 빅쇼’(8월 18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를 통해서다. 산수(傘壽)를 넘긴 나이에도 두 명창은 여전했다. 당당한 기백, 천하를 호령할 목소리, 거침없는 입담까지 변함이 없었다.
조상현 신영희 명창의 젊은 시절 [전주세계소리축제 제공] |
두 명창의 첫 만남은 20대 청춘 시절로 향한다. 전남 목포에서 처음 만났다. 신영희 명창은 21세, 조상현 명창은 26세였다. 혈기왕성했던 두 소리꾼은 지인이자 동료로 가깝게 지냈다.
“딱 봤는데 키도 크고 잘 생겼더라고요. 무엇보다 목이 타고 났어요. 그 오랜 세월이 지나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어요. 요즘엔 남자 소리꾼들이 전부 여자 스승한테 배워서 여자 소리를 내는데, 조 선생은 진짜 남자 소리를 해요. 통성으로 쭉 뻗는 소리가 기가 막히죠.” (신영희)
1970년대 국립창극단에서도, 나란히 퇴단한 이후에도 둘은 ‘콤비’로 호흡을 맞췄다. 조 명창이 심 봉사를 하면 신 명창은 뺑덕어멈(‘심청전’)으로, 조 명창이 이 도령을 하면 신 명창은 월매(‘춘향전’)를 했다. ‘옹고집전’, ‘장화홍련전’에서도 부부로 호흡을 맞췄다. 당대 스타 조 명창은 늘 ‘남자 주인공’이었고, 신 명창은 개성 강한 ‘신스틸러’였다. 신 명창은 “우리가 아주 잘 맞았다”며 웃었다.
60여년 같은 길을 걸어왔고 ‘시대의 명창’으로 서로가 서로를 지켜봤다. 조 명창이 불현듯 기억이 스친 것처럼 한 마디 던진다.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나의 과거를 다 아는 사람이에요. 우린 서로 너무 잘 알죠.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아요. (웃음)” (조상현)
두 사람의 한 무대는 올해로 20주년을 맞는 전주세계소리축제를 통해 성사됐다. 1995년 두 사람이 함께 했던 ‘KBS 빅쇼’ 무대의 재현으로, 이번 무대는 이후 추석특집으로 편성돼 KBS를 통해 방송(‘조상현·신영희의 소리로 한 세상’)된다.
조 명창이 이 무대에 서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수년 전 한 국악경연대회 금품수수 혐의로 2003년 검찰에 기소, 2008년 무형문화재 자격까지 반납한 이후엔 통 무대에 서지 않았다. 그 시절을 돌아보며 조 명창은 “무형문화재를 반납했지만 내 예술은 못 가져간다”고 했다. 억울함도 적지 않았다. 몇 해 전엔 유네스코 판소리문화전당 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조 명창의 문화재 복권 운동도 일기도 했다.
조 명창이 다시 대중 앞으로 나온 것은 전주세계소리축제의 ‘11고초려’ 덕분이다. 조 명창은 “날 만나러 11번을 찾아왔다. 삼고초려는 들어봤어도 이런 정성은 보지도 못했다”며 혀를 내둘렀다. 지난해 전주세계소리축제 ‘심청가’ 완창 무대가 성사된 배경이다. 당시 신 명창은 ‘춘향전’ 완창을 선보였다. 사실 조 명창은 판소리 완창 무대를 좋아하지 않는다. 일평생 몇 번 하지도 않았다. “너댓 시간 완창을 했다고 자랑할 게 아니라 단 몇 분을 부르더라도 예술을 해야 한다”는 그의 소리 철학 때문이다. 신 명창 역시 “소리의 본질을 깊이 깨우치지 않은 채 달달 외워 긴 시간 완창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한다.
당연히 두 명창의 완창 무대는 달랐다.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집행위원장인 김희선 국민대 교수는 “지난해 완창 무대를 통해 선생님들의 여전한 기량과 건재함을 봤다”며 “30년 전 모습이 중첩되면서 우리 판소리사에 길이 남을 방송 아카이브를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1990년대 영상을 끄집어내 무대로 재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두 명창이 ‘빅쇼’로 다시 만나자 국악계에선 ‘시대의 명창’들이 함께할 ‘마지막 무대’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두 사람도 “아마도 두 번 다시 같이 하긴 어렵지 않겠냐”고 했다.
이번 무대가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조 명창은 “백 번, 천 번을 서도 무서운게 무대”라며 “대사 한 마디도 무섭고 두렵다”고 했다. 신 명창도 마찬가지다. 그는 “나이를 먹으니 자신감도 떨어졌고, 옛날처럼 소리를 야들야들하게 못한다”고 했다. 그럴지라도 오랜만의 한 무대는 두 명창에게도 벅차다. 신 명창은 “30년 만에 조 선생과 한 무대에 서려다 보니 들떠있다”고 했다.
조상현 신영희 명창 [전주세계소리축제 제공] |
천하를 호령하고, 시대를 풍미했다.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조 명창은 열두 살에 강산제 보성소리 계승자인 정응민(1896~1964) 문하에서 소리 공부를 시작했다. ‘보성 소리’는 서편제 시조인 강산 박유전(1835~1906)을 잇는 유파다. 조 명창은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한 가운데에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물론 무수히 많은 정재계 인사들이 그와 함께 사각 프레임 안에 섰다. 눈이 좋지 않아 늘 선글래스를 끼고 다니는 그는 “박정희 대통령 만날 때만 선글래스를 벗었다”며 “정계, 재계, 예술계에 이르기까지 난 누릴 만치 다 누린 사람”이라며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조 명창이 평가하는 대통령들에 대한 한 줄 평이 인상적이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은 참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고, 김대중 대통령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했다.
원조 ‘한류 스타’라 할 만큼 해외 공연 때마다 외국인들을 홀렸다. 1977년엔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3시간 반 동안 춘향가 완창을 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다 감격하더라고요.” 국내외를 홀린 ‘당대 최고’ 타이틀은 쉬이 얻은 것이 아니다. 타고난 재능과 함께 끊임없는 정진과 노력이 있었다. 그는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면 줄곧 소리만 했다”며 “그래서 외로운 길을 걸었다”고 돌아봤다. 전주대사습놀이 첫 대통령상 수상자도 바로 조 명창이다.
“그땐 대통령상도 전주대사습놀이 하나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11개나 돼요. 명창이 일 년에 11명이 나온다는 거예요. 10년이면 110명이에요. 요즘엔 다 명창이래, 그게 무슨 명창이에요.”
조상현 신영희 명창 [전주세계소리축제 제공] |
신 명창은 진도에서 태어나 열한 살 때부터 아버지인 신치선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그의 별칭은 ‘유달산 다람쥐’다. 새벽 4시가 되면 아버지와 함께 유달산에 올랐다. 신 명창은 “유성강 밑에 위치한 굴에 들어가 한두 시간 정도 노래하고 나왔다”며 “사람들이 유달산 다람쥐가 산에 올라가서 노래한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이후 안기선, 상월중선, 강도근, 박봉술, 김상용 명창을 거쳐 만정과 만났다. 조 명창의 대통령상 수상 이듬해인 1977년, 신 명창은 남원 춘향제 명창부 대상을 받았다. 1979년부턴 본격적으로 연극을 시작, 국악인으로는 처음으로 백상예술대상 연기대상 특별상(1986년)을 받았다.
1970~80년대 소리꾼은 ‘대중 스타’였다. TV를 틀면 명창들의 소리를 대중가요처럼 즐겼다. 김희선 교수는 “국악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일상에 살았던 예술이었다”고 했다. 신 명창이 출연했던 ‘쓰리랑 부부’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사랑한 프로그램이었고, 시원하게 북을 치며 ‘어른의 쓴소리’를 했던 신 명창은 스타 중의 스타였다. 당연히 편견 어린 시선도 적지 않았다. 신 명창은 “지탄도 많이 받았다. 엄중한 책임도 있겠지만,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다”고 돌아봤다.
두 명창은 후학 양성에 매진하는 지금도 소리를 처음 했을 때처럼 끊임없이 연습하고 공부한다. 조 명창은 “요즘 소리꾼들은 노래만 하지 공부를 안한다”고 핀잔한다. 그는 “노래하는 것과 소리하는 것은 다르다. 노래는 인위적이고 소리는 자연적인 것”이라며 “물소리와 천둥소리, 바람소리처럼 판소리도 자연이다. 자연 그대로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게 소리”라고 했다. 신 명창도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제자가 나한테 ‘선생님은 항상 노래를 흥얼거리고 항상 연구하고 연습하는게 신기하다’고 하더라고요. 열 번 한 사람과 스무 번 한 사람은 달라요. 많이 해야 해요.” (신영희)
두 명창의 소릿길엔 꺾이지 않는 신념과 가치관으로 채워져 있다. 시대가 사랑한 명창들의 소리 철학은 무척이나 닮았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해요. 남이 10시간 할 때, 천 번, 만 번 해야 하는 게 소리예요. 이렇게 만들어진 판소리는 나의 동반자예요. 영원한 동반자이자 영원한 나의 생명이죠.”(조상현)
“‘재주는 덕의 종, 덕은 재주의 주인’이 제 좌우명이에요. 잔재주 부리지 말고 살라는 뜻이죠. 소리는 내 생명이고 내 인생이에요. 편안히 살기보단 소리하다가 무대에서 쓰러져 죽는게 소원이에요. 70년을 했지만 여전히 소리가 좋아요. 그래서 아직도 연습하며 공부하는 거예요.”(신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