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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화폐 트럼프와 미국의 기회
지난 7월 27일,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열린 비트코인 콘퍼런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했던 연설은 미국 정치의 일대 사건이었다. 이 연설은 미국의 가상화폐 커뮤니티를 들썩이며 그의 경쟁자인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 캠프를 흔들어 놨다. 어쩌면 2024년의 당선 운도 트럼프 쪽으로 기울었는지 모른다.
그뿐이 아니다. 트럼프의 연설은 디지털 기술과 사이버 보안의 새 시대와 (제대로만 된다면) 양자 정보과학의 새 시대를 열 수도 있다.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그날 저녁 트럼프가 내슈빌에서 제시한 웅장한 주제를 되짚어봐야 한다. 그것은 미국을 “지구의 가상화폐 수도”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 발언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와 유럽의 암호 화폐 투자자와 사용자에게는 뜻밖일 수도 있다. 한국은 혼자서 모든 비트코인 캐시 토큰과 상장 선물 시장의 10%를 장악하고 있고, 아시아는 현재 신생 가상화폐 스타트업의 26.8%를 차지하고 있다. 유럽은 신생 스타트업 수에서 2024년 상반기 기준 전 세계 31.4%를 차지해 미국과 캐나다를 모두 제쳤으니 그럴 만하다.
하지만 이 발언은 트럼프의 내슈빌 연설을 듣던 청중들의 귀에 가상화폐의 동앗줄로 들렸다.
그는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와 가상화폐 거래소에 적용되는 연방 규제를 다시 손질하고 약 140억 달러 규모의 비트코인 전략 보유고를 조성하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그는 게리 겐슬러 증권거래위원장을 해임하고, 그의 표현대로 가상화폐 산업의 “박해”를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내슈빌에서 열린 비트코인 컨퍼런스 2024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트럼프가 비트코인 2024 컨퍼런스에서 연설한 후 비트코인은 거의 7만 달러까지 상승했다. 트럼프는 연설에서 미국이 ‘가상화폐를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
트럼프의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 포용은 사상 최대 사기 사건인 2022년 샘 뱅크먼-프리드의 가상화폐 거래소 FTX 파산 이후, 가상화폐가 부활하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당시에는 FTX의 폐지가 가상화폐 시장의 종언을 고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반면 오히려 샘 뱅크먼-프리드먼 사건을 계기로 가상화폐가 무너질 것을 예상하거나 심지어 바라는 사람들이 실망하게 될 거라고 경고하는 필자와 같은 무리도 있었다.
우리가 옳았다. 가상화폐 투자는 FTX가 몰락한 후 30%나 급등했다. 가상화폐에는 기초 실물 자산이 없으므로 “특별할 게 없다”라는 회의론이 여전함에도, 트럼프는 수천만의 투자자, 수천의 부유한 잠재 기부자를 등에 업고 지금까지 정계가 대체로 무시하고 있던 커뮤니티에 문을 열어줬다.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한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을 비롯해 현재 가상화폐는 2만3000개가 넘으며, 전 세계 500개 이상의 거래소에서 거래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가상화폐는 단 7개뿐 이었다. 현재 세계 가상화폐의 가치는 2.5조 달러로, 미국인의 40%가 어떤 종류든 가상화폐를 보유하고 있고 그중 70%는 40세 미만의 투자자다.
즉, 미국인이 9300만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아직 양 당 중 어느 쪽도 개척하지 못한 투표 블록(voting bloc)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함성에 가상화폐 커뮤니티가 보낸 열렬한 화답의 메아리는 카멀라 해리스 캠프에서 울리던 시끄러운 알람 벨을 꺼버렸다.
이에 억만장자 투자자인 마크 큐반을 비롯해 충격에 빠진 해리스의 동맹군들은 서둘러 해리스의 선거 고문과 가상화폐 투자자 간 회의를 마련했다. 회의는 어느 모로 보나 폭망이었다. 가상화폐 경영자들은 불운한 해리스의 대리인들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지난 3년 반 동안 바이든-해리스 행정부에 당한 멸시와 괴롭힘으로 느꼈던 절망감을 쏟아냈다.
비벡 라마스와미, 트럼프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 밴스 상원의원 등 가상화폐에 밝은 인물들이 힘을 보탠 트럼프의 가상화폐 쿠데타는 선거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러나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그의 가상화폐 포용 전략을 이용해 양자 암호의 위력을 비롯한 디지털 기술의 미래를 구축할 거라고 가정할 때, 가상화폐 혁명의 참모습은 트럼프가 내슈빌에서 언급하지 않은 부분에 숨어 있다.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는 거래 안전성을 위해 분산원장기술(DLT)이라는 특별한 암호화 기술을 사용한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DLT를 이해하려면 컴퓨터 네트워크 전체에 걸쳐 수십만 번씩 복제된 스프레드시트를 떠올려 보라. 그런 다음 분산 네트워크가 이 디지털 스프레드시트를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는 한편, 이 동일한 데이터베이스를 공유하고 지속적으로 조정한다고 가정해 보라.
이 데이터베이스는 어느 한 장소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므로 이 정보에 대해서는 해커가 손상할 수 있는 중앙화된 버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수백만 대의 컴퓨터가 동시에 이 데이터를 호스팅하기 때문에 누구나 네트워크에 연결돼 있기만 하면 접근이 가능하다. 공유 원장 안에서 거래가 이루어질 때마다, 그리고 모든 원장이 네트워크 안의 모든 컴퓨터와 매칭되고 나면, 각 거래는 블록으로 알려진 것 속에 다른 거래들과 함께 암호화되기 때문에 데이터는 보호된다. 이렇게 새로 생긴 암호화 블록이 기존 블록들에 추가되어 블록의 체인을 이룬다. 여기서 블록체인이라는 용어가 나온 것이다.
가상화폐는 블록체인이나 DLT를 사용하는 쪽을 선호한다. 개별 참가자는 익명성을 유지하되 모든 당사자가 거래 즉시 이를 추적, 검증 및 합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블록체인의 용도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 탈중앙화된 아키텍처는 온갖 종류의 데이터를 보호하고 인증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월마트, JP모간은 이미 자체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독자적 네트워크는 파트너, 협력사 혹은 고객만 참가할 수 있고, 초당 수천 건의 거래를 수행한다.
이런 식으로 활용된 블록체인 기반 기술은 계속 업데이트되는 탈중앙화된 회계 시스템을 통해 환자와 고객의 기록을 보호함으로써 의료 산업과 금융 산업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블록체인은 지금 미 국방부의 방대한 군수 문제를 풀어낼 해법이라고 홍보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재임 시절인 2017년, 연방 정부 내 타 기관들이 블록체인의 잠재적 장점을 연구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법안에 서명하기도 했다.
기술 분야의 권위자인 조지 길더는 그의 저서 ‘구글의 종말’에서 블록체인 기술이 데이터의 공유와 보안에서 기존의 중앙 집중화 시스템을 대체함에 따라 구글 같은 기업이나 다른 중개자의 도움 없이도 인터넷상의 정보와 거래가 다시 연결되어 그가 “대분산(Great Unbundling)”이라 표현한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거래 비용이 극단적으로 낮아지고 [독립적인] 회사들이 네트워크로 바뀌며, 경제 권력이 분산되고, 부의 창출과 더 번영하는 미래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함정이 있다. 양자라고 불리는 함정이다. 양자 물리학에 기반을 두어 오늘의 고전적 컴퓨터보다 훨씬 강력한 내일의 양자 컴퓨터는 이미 개발 단계에 있다. 비트 값이 0 혹은 1인 현재의 컴퓨터처럼 비트로 된 이진법 대신, 양자 컴퓨터는 0과 1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자비트(quantum bit) 또는 “큐비트(qubit)”를 사용한다. 이것은 계산에 필요한 연산 횟수를 급격히 줄여주어, 비대칭 암호 시스템이 블록체인을 포함해 거의 모든 전자 정보의 보안을 유지하는데 사용하는 복잡한 알고리즘을 복호화하는 목적 등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더 뛰어난 연산 능력을 가능케 한다.
요컨대, 다른 형태의 DLT와 똑같은 암호 구축 블록을 사용하는 블록체인은 보안 웹 브라우징, 가상사설망(VPN) 등 여타 디지털 기술과 마찬가지로 양자 컴퓨터의 위협에 노출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반적인 블록체인 기술은 검증 시 쇼어 알고리즘이 분해할 수 있는 암호 방식인 타원곡선 암호(ECC)를 사용한다.
그런 공격이 가상화폐에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을까? 퀀텀얼라이언스 이니셔티브(Quantum Alliance Initiative)에서는 2022년, 양자 컴퓨터 공격이 DLT 기반의 가상화폐에 미칠 영향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끝마쳤다. 우리 연구에 따르면 비트코인에 대한 대규모 해킹과 평가절하만으로도 그 전체 비용은 3조 달러를 넘어설 것이며, 그 경제적 파문은 전 세계 경제에 퍼질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블록체인의 미래에 대한 진짜 위험은 이런 심각한 보안 취약성이 미처 다 파악되기도 전에 블록체인이 중요 디지털 인프라 구축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형 보험회사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 모든 고객 데이터를 블록체인 기반의 네트워크에 넣어두었는데, 3년이 지나자 양자 보안 네트워크를 설치하기 위해 모든 걸 다 뜯어 없애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다행히 양자 기술은 문제기도 하지만 해결책이기도 하다. 이미 은행, 정부, 민간 클라우드 전달자(cloud carrier)는 양자난수생성기를 사용하고 있다. 블록체인 소프트웨어와 모든 암호화 데이터에 양자 암호 키를 넣으면 고전 컴퓨터와 양자 컴퓨터 모두에 대해 해킹 불가한 보안이 가능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실은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가 얼마 전 양자내성암호 알고리즘 표준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이 표준은 강력한 방식으로 블록체인의 보안을 강화할 수 있다.
비대칭 암호화가 어려운 수학 문제를 이용해 고전 컴퓨터를 당황케 만드는 것처럼, 양자내성암호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이용해 양자 컴퓨터를 당황스럽게 한다. 과제는 이 두 해결책, 즉 양자 암호와 양자내성암호 모두를 DLT 아키텍처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시작됐다. 가령 영국의 경우, 낮에는 의학 전문가, 밤에는 양자내성암호의 투사로 활동하는 피터 워터랜드 박사가 이끄는 퀀텀 레지스턴트 레저(Quantum Resistant Ledger)라는 회사가 양자내성 DLT를 개발하고 있다. 또 다른 영국 기반의 회사 유비퀴코인(Ubiquicoin) 역시 “양자 컴퓨팅 사이버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최초의 블록체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최근 과학 학술지에 실린 여러 논문은 양자내성 블록체인 솔루션을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국가 양자 이니셔티브 법안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 뒤에 왼쪽부터 크리스토퍼 리델 백악관 정책 조정 부보좌관, 마이클 크라치오스 미국 최고기술책임자, 대통령의 딸이자 STEM 정책 문제에 관여해온 이방카 트럼프 고문. [백악관 제공] |
이 모든 이야기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가상화폐 공세는 어디에 들어갈까?
2018년 당시 미국 최초의 국가양자이니셔티브(National Quantum Initiative)에 서명하고, 연방 정부가 자신의 디지털 발자국을 발전시키며 그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블록체인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다룬 법안에 서명한 것이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가상화폐, 블록체인, 양자, 이 모든 기술을 한데 모아 세계 금융, 그리고 디지털, 포스트 디지털 미래의 새 시대를 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날 내슈빌에서 성패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건 비단 2024년 대선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미국의 미래, 그리고 세계 경제의 미래 역시 그 갈림길에 있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