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치원 삼성전기 패키지개발팀장 상무가 반도체 패키지 기판을 소개하고 있다. [삼성전기 제공] |
[헤럴드경제=김현일 기자] “제가 25년 정도 반도체 업계에서 연구개발을 해왔는데 처음엔 반도체 하면 ‘웨이퍼’였어요. 서브스트레이트(substrate·기판) 엔지니어들의 상실감은 컸죠. 지금은 많이 바뀌었어요. 반도체 기판의 중요도가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황치원 삼성전기 패키지개발팀 상무)
인공지능(AI) 열풍을 타고 고성능 반도체를 찾는 수요가 급증하면서 반도체 칩을 떠받치는 ‘숨은 조연’ 반도체 기판도 함께 주목을 받고 있다.
반도체 기판은 반도체 칩과 메인보드 사이에서 전기 신호가 원활히 오갈 수 있도록 중간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반도체 칩을 ‘두뇌’에 비유한다면 반도체 기판은 뇌에서 전달하는 정보를 각 기관에 연결해 전달하는 ‘신경’과 ‘혈관’이라고 할 수 있다.
AI 시대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도래하자 반도체 칩이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반도체 기판의 존재감은 급부상했다. 시장조사업체인 프리스마크는 반도체 기판 시장이 2024년 4조8000억원에서 2028년 8조원으로, 연평균 약 14%의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한다.
삼성전기 반도체 패키지 기판에 투입되는 원자재. [삼성전기 제공] |
급기야 시장의 관심은 차세대 기판 기술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유리기판이 대표적이다. 아직 상용화 전이지만 기존 플라스틱 기판을 대체할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란 기대감에 유리기판 개발을 선언한 삼성전기 등 관련 기업들의 주가가 올 상반기 강한 탄력을 받기도 했다.
삼성전기는 지난 22일 출입기자단을 대상으로 가진 제품학습회에서 반도체 기판 중 하나인 ‘플립칩 볼 그리드 어레이(FC BGA)’를 소개했다.
이름부터 매우 복잡한데 볼 그리드 어레이(BGA)는 칩 표면에 공(볼) 모양의 금속 돌기를 격자무늬(그리드)로 배열(어레이)하는 방식을 뜻한다. ‘뒤집다’라는 뜻을 가진 플립(flip)에서 알 수 있듯 플립칩(FC)은 말 그대로 칩을 뒤집었다는 의미다.
종합하면 FC BGA는 공 모양의 금속 돌기를 배열한 칩을 거꾸로 뒤집어 아래에 있는 기판과 맞닿게 하는 방식이다. 이때 금속 돌기가 둘 사이에서 신호를 연결하는 범프 역할을 한다.
칩을 뒤집어서 기판과 직접 밀착시켰기 때문에 칩과 기판 간의 거리가 줄어 그만큼 신호 전송속도가 빠르고 신호손실은 적은 것이 특징이다. 동시에 제품 자체의 두께를 줄일 수 있는 이점도 있어 다른 반도체 패키지 기판보다 층을 높게 쌓을 수 있다.
반도체 기판 ‘플립칩 볼 그리드 어레이(FC BGA)’. [삼성전기 유튜브] |
이러한 강점이 있다보니 고성능 반도체를 만들 때 FC BGA는 필수품이 됐다. PC를 비롯해 서버, 네트워크, 자동차, 휴머노이드 로봇 등 고성능 반도체를 필요로 하는 곳이 갈수록 늘어나 FC BGA 인기도 고공행진 중이다. 모든 전자기기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부품이 된 셈이다. 삼성전기가 FC BGA 사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이유다.
1991년 기판사업을 시작한 삼성전기는 2022년 10월 국내 최초로 서버용 FC BGA 양산에 성공했다. 서버용 FC BGA는 반도체 기판 중 기술 난이도가 가장 높은 제품으로 분류된다. 전 세계에서 하이엔드급 서버용 기판을 양산하는 글로벌 업체는 손에 꼽을 정도다.
이날 설명회에서 황치원 상무는 “과거 시스템 반도체는 인텔이 주름잡고 있었지만 지금은 고객사들이 요구하는 사항이 제각기 다르다. 이제는 최종 고객(엔드 고객)이 직접 자체 설계해 만들고 있는데 이 점이 우리에게 엄청난 기회 요인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황 상무는 또한 “엔드 고객사와 직접 다이렉트로 칩 디자인에 대해 논의(디스커션)하는 경우가 꽤 많아지면서 우리한테 오는 기회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황치원 삼성전기 패키지개발팀장 상무가 반도체 패키지 기판을 소개하고 있다. [삼성전기 제공] |
삼성전기는 대만 유니마이크론과 일본 이비덴 등에 비해 후발주자로 꼽힌다. 그러나 올해 7월 미국 반도체 기업 AMD에 고성능 컴퓨팅(HPC) 서버용 FC BGA 공급 계약을 맺고 제품 양산을 시작하며 역량을 키우고 있다.
AMD 외 고객사 확보를 묻는 질문에 황 상무는 “전 세계 고객사가 타깃”이라며 “거의 모든 고객과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기는 클라우드 시장 성장에 따른 고성능 서버 및 네트워크, 자율주행 등 하이엔드 반도체 기판 시장에 집중해 2026년까지 고부가 FC BGA 제품 비중을 50% 이상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원래 반도체 기판 위에 반도체 칩을 하나 올렸지만 최근 업계는 반도체 성능을 높이기 위해 하나의 기판 위에 여러 반도체 칩을 올리고 있다. 그만큼 반도체 기판의 면적도 커지고 위에 쌓아 올리는 층수도 늘어나게 됐다.
서버용 FC BGA는 일반 PC용 FC BGA보다 기판 면적이 4배 이상 크다. 층수도 20층 이상으로 2배 이상 높다. 다만 기판이 커지고 높아질수록 제품의 안정된 수율을 확보하기란 어렵다. 그만큼 기술적인 면에서 후발업체의 진입이 어려운 분야로 평가된다.
서버용 FC BGA는 일반 PC용 FC BGA보다 기판 면적이 4배 이상 크다. 층수도 20층 이상으로 2배 이상 높다. [삼성전지 제공] |
황 상무는 “많은 칩을 쌓아올리려면 (표면이) 평평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볼록하면 갖다 버려야 한다”며 “단순히 크게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대면적을 구현하기 위해 평탄하게 하는 기술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삼성전기는 110㎜ 이상의 초대면적 기술과 26층 이상의 초고층 기술 등을 구현하며 반도체 기판 시장의 이같은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아울러 부품의 입출력 단자 수가 늘어나고 연결해야 할 신호가 많아지면서 한정된 기판 면적 안에 회로를 더 미세하게 구현하는 기술도 경쟁 요소로 떠올랐다. 일반적으로 8~10㎛(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미터) 수준의 얇은 선 폭이 요구되는데 삼성전기는 머리카락 두께의 20분의 1 수준인 5㎛ 이하 수준의 회로선 폭을 구현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황 상무는 “엄밀히 말하면 (삼성전기는) 후발주자가 맞지만 어느 업체보다 뒤지지 않을 기술력에 집중하고 있다”며 “향후 전장과 서버, AI, Arm 중앙처리장치(CPU) 등이 반도체 기판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