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서울 대법원에서 열린 신임법관 임명장 수여식에서 신임 법관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뉴시스] |
[헤럴드경제=박지영 기자] “로펌은 우수인재에 좋은 처우를 약속하면서 잡아두려 합니다. 법조경력을 장기간 요구할수록 로펌에 적응한 인재들이 나올 가능성이 낮아지는건 당연하죠.” (현직 재판연구원 A씨)
‘법조일원화’가 법원의 활력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됐다. 예비 법관들의 필수 수업인 전국 로스쿨 민사재판실무 수강생이 6년만에 반토막 났다. MZ세대의 전반적인 공직 선호도 하락과 함께 법조일원화로 임용 문턱이 높아지면서 법관 공급이 급격하게 위축했다는 신호다.
법조일원화는 2011년 법원조직법이 개정되면서 시작됐다. 사법연수원 수료 또는 변호사시험 합격 후 곧바로 판사로 임관하는 것을 막고, 변호사·검사 등으로 경력을 쌓은 뒤 판사에 지원할 수 있게 했다. ‘사회 생활’을 해본 판사로부터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취지다. 2013년 법관 임용에 필요한 최소 법조 경력을 3년으로 정해 도입한 뒤 2018년 5년으로 확대됐다. 2025년 7년, 2029년 10년으로 강화될 예정이다.
▶민사재판실무 수강생 6년만에 ‘반토막’=26일 사법연수원에 따르면 전국 로스쿨에서 ‘민사재판실무’ 수업을 수강하고 기말고사에 응시한 학생들의 숫자가 2018년 1552명에서 올해 824명으로 42% 감소했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 1500명대를 유지했으나 2023년 1158명으로 감소한 뒤, 다시 1년 만에 급감했다.
민사재판실무 과목은 예비 법관 ‘필수’ 수업으로 꼽힌다. 2013년 법조일원화 이후 법관 지망생들은 주로 ‘재판연구원(최대 3년)→변호사 또는 검사 재직’으로 필요 경력을 쌓고 있다. 재판연구원은 민사재판실무, 형사재판실무 성적 우수자를 필기 전형 없이 뽑는 일종의 ‘우선 선발’ 제도를 운영하고 있어 판사 지망생들 사이에서는 2개 수업을 듣는 것이 정석이다. 사법연수원이 전국 민사·형사재판실무 수업에 현직 판사 교수를 출강시킨다.
형사재판실무 수업의 경우 2018년 1862명이었던 기말고사 응시인원이 지난해 1789명으로 3% 소폭 감소하는데 그쳤다. 검사 지망생도 같이 듣는 경우가 많아 감소세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매해 2학기에 열려 올해 수강·응시 인원은 알 수 없다.
재판연구원 수강생 감소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우려가 현실이 됐다는 반응이 나온다. MZ세대의 전반적인 공직 기피와 더불어 법관 임용에 요구되는 법조 경력이 상향되면서 ‘판사 인재풀’ 자체가 수축했다는 분석이다.
로스쿨 재학생으로 올해 재판연구원에 지원한 B씨는 “법관 임용을 위한 전 단계로서 재판연구원의 선호도가 과거보다 낮아지고 있다”며 “재판연구원을 마치고 조금이라도 더 단기간에 법관이 될 가능성이 크다면 지원 유인이 늘어날텐데, 그렇지 않다보니 재판연구원 선호도가 줄어들었다”고 했다. 법조일원화로 인해 ‘임용 불확실성 증가 → 재판연구원 선호도 하락 → 민사재판실무 수강생 하락’ 현상으로 이어졌다는 의미다.
현장에서 예비 법조인을 길러내는 교수도 법조일원화가 판사 인력난에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계정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판사를 권해도 ‘7년, 10년 후는 너무 멀다.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보겠다’는 답이 돌아온다”며 “MZ세대의 가치 기준이 예전과 다르다. 판사를 꿈꾸면서 재판연구원을 한 친구들도 로펌에 발을 들이고 나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10년 넘게 로스쿨 학생들을 가르쳐온 이 교수는 ‘판사’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로스쿨 재학생들의 ‘롤모델’ 선배는 모두 로펌으로 가고, 교수들 중에서도 판사 출신이 많지 않다”며 “판사와 법원에 대해 접할 기회가 없다. 민사재판실무 수업이 사실상 현직 판사와의 유일한 접점인데 실무과목을 듣고자 하는 열기도 많이 식었다”고 했다. MZ세대의 가치관 변화, 법조 일원화로 인한 미래 계획의 불확실성 등으로 ‘변호사’로의 경로의존성만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로펌 7년차, 판사 선택 어려워”=현직 재판연구원과 재판연구원 지원자들도 ‘판사’에 대한 예비 법조인의 인식이 예전과 다르다고 입을 모았다. B씨는 “과거에 비해 로스쿨 상위권 학생들의 진로 선호도가 법관, 검사에 비해 대형로펌에 몰린다”며 “법조경력 10년이면 최소 7년차 로펌 변호사다. 유학을 가고 파트너변호사를 달 기회와 연봉 삭감을 감수하고 법관에 지원할 것 같지 않다”고 설명했다. 필요 법조 경력이 늘어날수록 ‘변호사’로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져 법관이 될 유인이 줄어든다는 의미다. B씨는 “필요 법조경력이 5년 이상으로 늘어나지 않도록 올해 가을 안에 관련 법이 통과되면 좋겠다”고 했다.
또다른 재판연구원 지원자 C씨 또한 “확실히 로스쿨생들은 대형로펌을 가장 선호한다”며 “나이가 있거나 부양 가족이 있는 경우에 더욱 그렇다. 업무 강도는 비슷하지만 판사보다 급여는 높고, 지방 근무 가능성도 낮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직 재판연구원들은 우려의 목소리가 더 크다. 재판연구원 D씨는 “재판연구원 동기들끼리 모이면 자연스레 법조경력에 대해 이야기한다”며 “법조경력 7년이면 평균 연령이 35세로 가정을 막 꾸리기 시작할 시점이다.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쓸 시기인데 새롭게 법관으로 이직하거나, 초임 법관이 돼서 육휴를 써야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울 것 같다”고 했다. D씨는 “여성 법관, 남성 법관 모두에게 해당하는 어려움”이라고 했다. 2013년 29.7세였던 신임법관 평균연령은 지난해 35.4세로 증가했다.
재판연구원 A씨는 ‘법조일원화’ 제도가 도입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지 재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원에서 재판 업무를 돕고, 변호사검사로 활약 중인 지인들을 보니 7~10년의 경력 요구에 회의적인 의견을 갖게 됐다는 것이 A씨의 말이다.
A씨는 “변호사 근무 기간이 길어진다고 해서 ‘다양한 경험’이 충족되는지 의문”이라며 “일반 사람이 겪는 문제를 법관이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취지였는데 법조 경력 ‘상향’만으로 이러한 요구를 채울 수 없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판사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했다. ‘법조 경력’에만 치중한 제도로 법원 구성원 다양화를 꾀할 수 있는 다른 방법에 대한 고민은 소홀했다는 지적이다.
법조경력 강화가 ‘재판 부실’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C씨는 “법조 경력 상향의 가장 큰 문제는 법관 증원의 어려움에 있다”며 “지금도 1명 법관이 처리해야 할 사건 수가 다른 국가에 비해 많다. 지원의 허들이 높아져 새로운 법관을 기용할 수 있는 인재풀이 적어지면 결국 기존 법관의 업무 부담이 가중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C씨는 “법관 증원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법조 경력 상향은 타당하지 않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