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시대에 뒤떨어진 규범·규정 손질 시급”

주스트 포웰린(Joost Pauwelyn·왼쪽부터) 제네바 국제대학원 교수, 페트로스 마브로이디스(Petros Mavroidis) 미국 콜롬비아대 로스쿨 교수, 캐서린 크라센(Kathleen Claussen) 미국 조지타운대 로스쿨 교수, 마크 우(Mark Wu)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28일 오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자유무역질서의 미래와 WTO 분쟁해결제도’의 주제로 열린 좌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세계무역기구(WTO)가 무역분쟁 제소건에 대해 재판을 하는 기구라고 동일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상소기구가 존재하지 않아도 WTO는 전 세계 교역 국가들의 채널을 열고 연결해주는 제도로 분쟁해결기능 정상화보다는 규범·규정 정비가 우선돼야 합니다.”

통상분야 세계적인 권위자인 페트로스 마브로이디스(Petros Mavroidis) 미국 콜롬비아대 로스쿨 교수는 28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자유무역질서의 미래와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제도’라는 주제로 열린 헤럴드경제 명사초청 좌담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마브로이디스 교수를 비롯해 캐서린 크라센(Kathleen Claussen) 미국 조지타운대 로스쿨 교수, 마크 우(Mark Wu)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주스트 포웰린(Joost Paulwelyn) 제제바 국제대학원 교수 등 세계 석학들이 참여한 이날 좌담회는 분쟁해결제도 등 WTO 주요 기능의 개혁 작업을 가속화하기 위한 건설적인 방안들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미·중 무역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세계경제 질서는 보호무역주의와 경제 블록화 및 급격한 글로벌 공급망 재편 와중에 있다. 이에 수조~수십조 원의 ‘보조금’을 활용한 각국 첨단전략산업 육성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자유무역주의에서 수출 산업에 대한 보조금은 명백한 반칙이지만 세계 무역분쟁의 사실상 ‘대법원’ 역할을 해온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의 기능은 마비된 상태다.

최대 교역국 중 하나인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WTO에서 무역 분쟁을 최종 심리하는 상소기구의 복원이 시급하다. WTO 상소기구는 WTO 설립 협정 부속서인 분쟁해결절차에 관한 양해(DSU)에 따라 설립된 상설기구로 회원국 간 반덤핑 같은 분쟁 발생 시 사법부 역할을 한다. 판사 격인 상소위원 3명이 분쟁 1건을 심리하는데, 2019년 말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상소위원 후임 선임을 저지하면서 기능이 마비된 상태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 전쟁’ 상대국인 중국이 WTO에서 개발도상국 지위를 활용해 여러 혜택을 받았다면서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명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미국은 상소위원을 선임하지 않고, WTO 제도를 개혁하겠다면서 협상을 이끌어왔다. 미국 이외 회원국들은 분쟁해결제도의 개혁 및 기능의 정상화를 목표로 비공식 개혁 논의를 진행 중이다. 오는 11월 치뤄지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나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든 누가 백악관에 입성하든 보호무역주의는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면서 WTO 상소기구 정상화는 기약할 수 없는 상태다.

이날 좌담회에 참석한 세계 석학들은 한 목소리로 상소기구 정상화에 앞서 지난 30여년간 손보지 않은 WTO의 규범·규정을 개정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우 교수는 “WTO가 시대의 흐름에 맞게 그 규범과 규정 자체를 적절히 업데이트를 하지 못했다”면서 “지난 30년 동안 세상은 많이 변했는데 WTO 규범 중 개정된 것은 굉장히 적다”고 지적했다. 이어 “예를들어 새롭게 부상한 중국의 경제 구조를 WTO의 규범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고 새로운 기술과 환경과 관련된 사안들도 제대로 반영이 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크라센 교수는 “각국 정부마다 WTO의 제도와 그 제도가 갖는 목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서로 상이하다보니 이념의 위기가 있었다”면서 “또 민주 국가들은 선거를 치러야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위기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WTO에서 내려지는 그 결정이 여러 해당 국가의 정치적인 압력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정치적인 문제도 기인했다”고 덧붙였다.

마브로이디스 교수는 “기본적으로 WTO의 규정 규범 자체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해 구식화됐다”면서 “지금 현재 WTO의 상소 기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WTO에 지금 상소기구가 직면하고 있는 문의가 만약에 발생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구식화된 규정을 통해 집행을 했을 것”이라며 “WTO 규정, 즉 법률이라고 하는 총탄 자체를 먼저 개정하고 그 다음에 집행에 대한 부분들을 손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WTO 체제 자체를 과거의 WTO의 상태로 계속 유지할 정치적인 의지가 있느냐가 중요하다”면서 “재판 기능과 관련해서는 국제사법재판소의 모델을 따라야 한다”고 제언했다.

연사들은 또 오는 11월 치뤄지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이기든지 WTO 기능에 대해 문제를 삼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화당이든지 민주당이든지 모두 미국 우선주의에서 세계무역질서를 주도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포웰린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서 상소기구 자체의 기능을 중단을 시켰을 때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이 다음번 미국 대선까지 기다리자라고 했지만, 바이든도 마찬가지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간에 WTO의 분쟁 협의를 이전의 구속력 있는 분쟁 해결 절차 그대로 가져가는 거에 대해 원하지 않는다”면서 “미국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시스템을 구축을 해 다자주의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나가야한다”고 덧붙였다.

마브로이디스 교수는 “더 이상 미국이 유일무이한 패권 국가로서 국제사회에서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니다”면서 “따라서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은 미국이 돌아올 때까지 그냥 막무가내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뭔가 임시적인 다른 방편을 통해서라도 다자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것이 맞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연사들은 이와 함께 우리나라가 다자주의체제에서 수혜를 받은 국가로써 WTO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우 교수는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WTO 개혁의 논의 진행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면서 “또 개도국의 기술 지원을 하는 차원에서 펀드를 제공하는 등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포웰린 교수는 “한국은 미국과도 가까운 동맹 관계이고, 유럽, 중국과도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발언 내용에 큰 무게가 실린다”면서 “특히 여러 격차들이 큰 국가들 간에 차이를 줄이는 데 있어서 한국이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스위스처럼 작은 국가이기 때문에 다자주의 체제 하에서 수혜를 받는 국가”라며 “규모가 작은 국가일수록 혼자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다자주의체제에서 생존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배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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