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김우정 [국립극장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옹녀 문안이요.”
등장부터 ‘생기탱천(生氣撑天)’이다. 남편 복은 남 얘기, ‘청상살(靑裳煞), 상부살(喪夫煞)’을 타고 나 열다섯부터 상 치르느라 바빴다. 처량하고 서글퍼도 요염한 색기를 감출 수가 없다. 2월에 핀 복숭아꽃처럼 화사한 얼굴, 초승달 같은 눈썹, 그 사이로 달빛이 내려와 훑고간 듯 반질거리고 매끄러운 자태가 새하얀 상복마저 ‘반사판’으로 만든다. 한 많은 옹녀 뒤로 관짝이 하나씩, 둘씩 줄줄이 들어오자 마침내 알아차린 관객은 웃음을 터뜨린다.
다소 뻔뻔한 ‘옹녀의 신고식’ 장면. 자신의 외모를 칭송하는 대목을 스스로 읊어대다 ‘드센 팔자’의 한풀이로 방향을 틀어버린다. 불과 5분도 안되는 첫 등장 장면에서 옹녀는 팔색조마냥 변신한다. 상부살에 ‘변강쇠의 저주’까지 더해져 줄초상 뒷수습에 삶을 빼앗긴 ‘옹녀 다시 쓰기’의 서막이다.
‘구관이 명관’이라 했던가. 전통을 해체하고 동시대를 입히며 ‘창극 전성시대’의 서막이 열렸지만, ‘강산도 변할’ 10년 동안 누구도 그 아성을 넘지 못했다. 역대 최다 공연 횟수, 평균 객석 점유율 95%, 창극 사상 최초의 유럽 진출작인 국립창극단 최고 흥행 작품 ‘변강쇠 점 찍고 옹녀’(9월15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가 돌아왔다. 2014년 초연 이후 올해로 10년 째다.
이 창극은 ‘음란하다’는 이유로 소실된 ‘변강쇠타령’을 재창작한 작품이다. 한국 공연계의 스타 연출가인 고선웅(서울시극단 단장)과 ‘작창의 신(神)’이라 불리는 한승석이 만나 일찌감치 화제가 됐다. 질펀하고 음탕했던 이야기는 발칙한 유쾌함을 입었고, 전통 악기로만 매만진 음악은 의외로 서사의 묘미를 살린다.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이소연 최호성 [국립극장 제공] |
“그럼 여기서 떡을, 아님 저기서 떡을. 덩덩 덕 쿵덕. ‘또’라니? 이건 의례적인 집들이제.” (변강쇠 대사 중)
“성인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라는 10년 차 변강쇠 최호성의 호언장담은 어김없이 맞아 떨어졌다. 객석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120분의 짧고 간결한 이야기이나 구성이 알차다. ‘옹녀 신고식’으로 출발한 뒤, 옹녀와 변강쇠 캐릭터를 재치있게 보여주고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으로 빠르게 전환된다. 첫 만남에 ‘천생연분’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린 두 사람. ‘속전속결’로 부부의 연을 맺고 ‘색(色)’과 함께 살아간다.
올해 시즌에선 옹녀와 변강쇠로 ‘10년차 커플’ 이소연(40)·최호성(37)과 ‘뉴비(Newbie)’ 김우정(29)·유태평양(32)이 이름을 올렸다. 두 캐스트의 매력이 전혀 다르다. 특히나 상반된 음색과 표현력의 두 옹녀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이소연 최호성 [국립극장 제공] |
이소연의 옹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늘거린다. 바람이라도 불면 ‘휙’ 하니 날아갈 듯한 자태의 그는 상부살로 인해 처량맞다가도 ‘잘 살아보겠다’며 결연한 의지를 다질 땐 금세 좌중을 압도한다. 그의 소리는 영락없이 ‘여름날의 아침’이다. 태양이 뜨거워지기 직전의 상쾌함과 눈부시게 빛나는 밝은 색을 가졌다. 명랑할 땐 한없이 명랑하다가도 애틋할 땐 끝도 없이 애틋하다. 흰 도화지처럼 모든 감정이 자유롭게 묻어난다.
그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색만 밝히는 여자’인 줄 알았던 옹녀의 한숨과 변강쇠를 향한 깊은 사랑이 장면마다 켜켜이 묻어난다. 압권은 ‘동티’ 맞아 장승이 된 변강쇠를 살리기 위해 ‘장승들을 홀려버리는 장면’이다. 이소연이 “아아 ~ 외로워라”라고 등장할 땐, 객석의 누구라도 화를 입기 직전이다. 요염한 자태가 무대를 압살한다.
이소연과 10년 째 호흡을 맞추고 있는 최호성은 ‘변강쇠의 상징’이다. ‘내가 바로 변강쇠’라고 증명하듯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변강쇠의 고단한 서사가 큰 눈에 들어차는 순간 순간을 ‘발견’하는 것도 관전 포인트다. 다년간의 호흡으로 ‘척하면 척’인 두 사람은 능구렁이처럼 색의 경계를 넘어 명불허전의 ‘커플 연기’를 만든다.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국립극장 제공] |
김우정의 옹녀는 해사하고 사랑스럽다. 재기발랄한 몸짓엔 순정만화 속 ‘캔디’ 같은 꿋꿋함이 꾹꾹 담겨 있다. 단단하게 숙성된 소리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옹녀와 닮았다. 김우정과 호흡을 맞추는 ‘변강쇠’ 역의 유태평양은 “물색 없는 환한 미소”가 김우정의 강점이라고 했다. 조건 없이 내주는 해맑은 미소, 작정하고 부려보는 앙탈, 모든 것을 건 순애보는 ‘색골’ 옹녀를 열다섯 춘향처럼 예쁘게 채색한다. 2021년 입단 이후 착실하게 성장 중인 김우정은 뻔뻔하게 자신만의 캐릭터를 또 하나 챙겼다.
이번 무대를 통해 커플이 된 유태평양과의 호흡은 특히나 좋다. 풋풋한 신혼부부 케미를 보여주는 커플답다. 유태평양의 변강쇠는 조금 더 철이 없고, 감정 표현도 솔직하다.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유태평양은 술, 도박, 싸움질을 일삼는 변강쇠를 보다 입체적으로 빚어냈다. 이처럼 국립창극단의 간판 스타는 매 작품 자신을 완벽하게 증명한다.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김우정 유태평양 [국립극장 제공] |
캐릭터성이 강한 변강쇠와 옹녀의 삶엔 시대를 살아낸 기층민들의 ‘먹고사니즘’과 성(性) 담론이 엮이며 유쾌한 발칙함을 만든다. ‘맹랑히도 생긴’ 서로의 성기를 관찰하는 적나라한 ‘기물가’부터 은근하게 녹여낸 영리한 은유적 화법이 섞여 작품의 다양한 매력을 만든다. 노골적 ‘섹드립’이 아닌 한 두 마디로 집약한 함축적 언어와 대본의 모든 뉘앙스를 살려내는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는 ‘18금(禁) 창극’에 격을 더하는 일등공신이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창극의 근본’이라 할 만하다. 창극을 한 번도 접한 적 없는 사람도, 창극을 잘 아는 사람도, 창극에 처음 도전하는 창작자에게도, 창극 좀 만들어본 창작자에게도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국립극장 제공] |
이 창극은 모든 면에 있어 보기 드문 ‘육각형 창극’의 전형이다. 쉴새 없이 흘러가는 빠른 전개, 재치있는 말의 향연, 오래된 이야기 속에 담긴 해학, 시공간을 뒤틀어버린 세련된 무대와 연출, 국악기만으로 기승전결과 감정의 묘미를 살리는 음악에 노련한 배우들의 연기까지, 어디에도 ‘아쉬움’은 찾을 수 없다.
작품의 중심은 변강쇠와 옹녀지만, 그들 외에도 작품 곳곳에 ‘킬링 포인트’가 넘쳐난다. 그간 창극단 무대에서 주인공과 감초 역할을 도맡았던 간판 단원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와 ‘명연’을 펼치고 들어간다.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국립극장 제공] |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변강쇠의 양기를 탐닉하려는 호색할매 서정금과 대방여장승 김금미, 변강쇠를 되살리려는 ‘힙’한 의녀 조유아와 민은경, 지리산이 ‘거대한 떡방앗간’이 된 것을 한탄하는 천왕봉 신령 이시웅, 변강쇠를 ‘세워서 죽여’ 장승을 만들어버린 황해장승 최용석, 장승부터 의녀까지 1인다역을 해낸 왕윤정, 변강쇠에게 변을 당하고 옹녀에게 야릇한 행동까지 하는 함양장승 이광복은 물론 쌍가위를 들고 날렵한 발재간에 품바 비트박스까지 선보인 구순의 윤충일 전 단원까지 과분할 정도의 연기와 소리가 내내 이어진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라가는 것도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보다 재밌게 볼 수 있는 방법이다.
‘화룡점정’은 ‘창극단 프린스’인 김준수를 다방면에 활용한 것이다. 김준수는 ‘관지기’부터 투전꾼, 곱상한 나뭇꾼에 장승까지 연기하고 소리 한 자락 뽑아내며 주연 배우 못지 않게 매 신(scene)을 삼켜버린다. 그가 등장할 때마다 공연을 찾은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팬들은 소리 없는 손박수와 얕은 함성으로 환호했다. 공연의 전체 흐름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한 배려였다.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의녀 민은경 [국립극장 제공] |
변강쇠와 옹녀의 서사만으로는 빈약할 수 있는 창극은 2막에 접어들며 장승들의 이야기와 의녀 등장으로 보다 풍성해졌다. 팔도강산의 장승들을 통해 고선웅 연출가는 창극단 인재들을 아낌없이 활용했다. 밤이나 낮이나 서서 지내는 데다 온갖 욕망을 거세한 ‘고달픈’ 장승들이 ‘색골남녀’ 변강쇠와 옹녀를 향해 표현하는 분노는 독특한 웃음 포인트다. 게다가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꾸듯 선글래스까지 끼고 나오는 21세기형 의녀는 예고 없이 튀어나와 웃음 공격을 퍼붓는다. 조유아가 막춤을 추는 장면에선 무대 아래 악단 사이에서 웃음이 터지는 모습까지 만날 수 있다.
다소 허망하게 끝맺을 수 있는 이야기는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며 마침표를 찍는다. 고단하고 피폐했던 민초의 삶 속에서 ‘색’에 미친 변강쇠와 옹녀의 여정은 황당무계한 비극이 아닌 다가올 미래를 향한 긍정이 담긴다. 유태평양은 이 작품에 대해 “웃을 일 없는 때에 한바탕 웃을 수 있는 창극”이라고 했다. 공연을 마치면 관객들의 표정이 유달리 밝다. ‘히트작’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