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만어사 전경 |
물고기는 농어업에 의존했던 고대 사회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 풍요와 생명을 의미했고 왕권의 상징으로 쓰이다 보니 이를 신격화해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고대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 사이에서 발생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선 생활 터전인 두 강을 물고기 두 마리에 비유해 쌍어(雙魚) 신앙이 탄생했다.
쌍어 신앙은 바빌로니아 시대에 왕권의 상징으로 유행하면서 주변국으로 퍼져 기독교에도 영향을 끼쳤다. 인도 대륙에도 흡수돼 힌두교와 불교의 민간 신앙에도 영향을 미쳐 티베트 불교를 통해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에 전파됐다.
만어사 전경 |
두 마리의 물고기, 쌍어 문양은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의 오병이어(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기적의 상징으로 사용됐다. 불교에서는 물고기가 부처를 보호하는 동물로 여겨 팔보(八寶) 중 하나로 생각해 티베트 불교에선 물고기를 먹지 않게 된다.
‘물고기산(魚山)에 부처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뜻의 어산불영(魚山佛影)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옛 가락국의 물고기 신앙(神魚)과 설화에 연관된 이야기다. 가락국 수도 김해에는 신어산(神魚山)이 있고 그 인근 밀양에는 만어산(萬魚山)이 있다. 산 이름에 물고기(魚)가 들어간 특이한 산들이다. ‘부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만 마리의 물고기 사찰'이라는 만어산 만어사를 갔다.
만어사 대웅전 |
불교에선 물고기를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라 여겨 ‘모든 중생을 해탈시킨다’는 의미로 사찰 종각에는 목어(木魚)를 걸어두고 있으며 스님들의 목탁도 목어에서 유래했다.
쌍어 문양이 절마다 그려져 있을 정도로 국가 문양으로 사용한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 공주를 통해 물고기 신앙이 가락국에 퍼졌고 다시 일본에 전달되게 됐다.
김수로 왕릉에는 두 마리의 물고기가 조각돼 있고 김해 은하사에 쌍어 부처님을 모시는 수미단이 있다. 가락국의 터전이었던 김해시를 비롯해 경상남도 여러 불교 사원 등에 쌍어 문양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남아있을 정도로 가야 시대 대표 문양이 됐다.
대웅전 석조여래좌상 |
경남 밀양시 만어산(萬魚山)에 있는 만어사(萬魚寺)는 삼국 시대 금관가야 수로왕이 서기 46년 창건했다.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여러 사찰들의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나쁜 방해꾼으로서의 독룡(毒龍)’이 만어사 창건 설화에도 등장하며, 설화에서 ‘만어사’란 이름도 유래했다.
삼국유사 ‘탑상(塔像)’편에 실려 있는 ‘어산불영(魚山佛影)’ 조에 실린 연기 설화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수로왕 때 가락국 연못에 살고 있던 독기를 품은 용(毒龍)이 사람을 잡아먹던 만어산 다섯 여자 귀신(나찰녀, 羅刹女)과 짜고 비와 천둥과 우박을 4년 동안 내려 인근 백성들의 농사를 망치는 등 행패를 부렸다. 수로왕은 주술(呪術)로써 그들의 악행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인도 쪽을 향해 부처에게 설법을 청했다. 부처가 6비구와 1만의 천인(天人)들을 데리고 와서 설법(說法)을 펼쳐 독룡과 나찰녀의 항복을 받고 모든 재앙을 물리쳤다.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도 불법의 감화를 받아 이 산중으로 모여들어 경쇠 소리를 내는 신비로운 돌이 됐다. 수로왕이 이를 기리기 위해서 절을 창건했다.
물론 김수로왕 시대에 허황옥에 의해 인도 불교가 들어왔다고 하지만 창건 시기라고 하는 서기 46년보다 늦은 48년에 허황옥이 가락국에서 왔다. 이 이야기들은 이후 중창(창건)을 거치면서 창작돼 혼재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전설로는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의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낙동강 건너 김해에 있는 무척산(無隻山, 703m)의 신통한 스님을 찾아가서 새로 살 곳을 마련해 줄 것을 부탁했다. 스님의 조언대로 길을 떠나 머물러 쉰 곳이 만어사였는데 왕자가 길을 떠날 때 수많은 종류의 고기 떼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그 뒤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변했고 수많은 물고기 떼는 크고 작은 화석으로 굳어 버렸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는 이곳 만어산이 고대 인도에 있었던 북천축국에서 전해오는 부처님의 영상과 흡사한 기이한 행적이 있는 신령스러운 곳이라고 해 고려 명종(1170~1197) 11년 동량 보림이 만어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도 굴속의 돌이 금옥소리를 내는 것과 부처의 영상이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보이지 않기도 하는 이적(異蹟) 두 가지를 확인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만어산의 한 굴속에 있는 크고 작은 암석들은 모두 경쇠소리가 난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설화가 만들어진 듯 하다.
만어사 어산불영 |
만어사는 절 자체보다는 절집 미륵전 바로 아래에 있는 크고 작은 고기 모양의 돌들이 부처 영상이 어린다는 산정을 향해 일제히 엎드려 있는 모양새로 유명하다. 이것은 물고기들이 변해서 된 만어석(萬魚石)이라 하며, 두들기면 맑은 쇳소리가 나기 때문에 종석(鐘石), 맑은 소리가 난다고 해서 경석(磬石)이라고 한다. 그 돌무덤이 무려 너비 100m에 길이가 500m나 된다.
만어사 어산불영 |
설화를 확인이라도 해보려는 듯 돌들을 두드려보는 이들이 있어 나도 따라 해본다. 두어 개의 돌을 두드려봤더니 곧바로 속이 비어 있는 듯 맑은 소리가 울린다.
돌에서 종소리가 난다는 만어사 경석은 한 여름에도 얼음이 언다는 밀양 얼음골과 땀을 흘린다는 사명대사의 표충비와 함께 밀양의 3대 신비로 꼽히기도 한다.
3만여 년 전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암괴류는 빙하기에 돌들이 풍화와 침식과정을 겪으면서 쌓여 만들어진 너덜바위 지대이며 2011년 천연기념물 제528호로 지정됐다.
대웅전과 삼성각 앞마당에 삼층석탑이 있다. |
만어사는 삼국유사에도 등장하고 신라 시대에는 왕들이 불공을 올리는 장소로 이용됐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지금은 대웅전·미륵전·삼성각(三聖閣)·요사채 등과 마애불이 있을 뿐인 아담한 절이다. 유일한 보물인 대웅전 앞마당 3층 석탑은 고려시대인 1181년의 중창(창건) 때 건립한 것으로, 전통적인 석탑 형식으로 균형이 잘 잡히고 견고하게 정제돼 있다.
미륵전 |
대웅전과 조금 떨어져 바위산 밑에 2층 형식의 통층구조 미륵전(彌勒殿) 안에는 높이 5m 정도의 뾰족한 자연석(미륵바위)이 불상을 대신하고 있다. 용왕의 아들이 변했다는 미륵바위는 침식과 풍화과정에서 부서지지 않고 남은 돌알, 즉 핵석(核石)이라고 한다.
미륵전 안에 위치한 미륵바위 |
미륵바위에 기원하면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이 득남을 할 수 있다고 전해져서 그러한지 미륵바위 앞쪽에 크고 작은 소원을 빌며 쌓아올린 돌탑들이 많다.
만어사 소원돌 |
2006년 개봉한 이병현과 수애 주연의 멜로영화 ‘그해 여름’에서 만어사에 관한 전설과 만어석이 나온다. TV 예능프로에서 만어사의 ‘소원돌’이 등장해 주목받기도 했다. 만어사 ‘소원돌’은 영험한 전설이 있어 자신의 소원을 빌고서 돌을 들어봐서 돌이 들리면 소원이 이뤄지지 않고, 돌이 움직이지 않으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절 앞마당 한편에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평평한 바위 위에 배구공보다 작은 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호기심에 들어봤더니 들어 올려진다. 다시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고 들어봤더니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전설처럼 소원이 들어졌나 보다. 혹시나 해서 검증 차원에서 지나가는 관광객에게 들어보라고 권했다.
만어사 소원돌 |
소원을 빌고 소원돌을 들었는데 움직이면 어쩌나하는 두려움 때문에 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소원이 이뤄졌으면 하는 강한 기대감이 내 마음을 작동시켜 돌을 움직이지 않게 했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플라시보 효과’나 ‘믿는 대로 된다’, ‘마음가는 대로 이뤄진다’ 등 말들이 떠오른다. 소원돌의 효능은 신앙적 믿음과 심리적 기대에 의해 좌우될 수도 있지 않을까. 민간 토착신앙과 불교가 결합된 또 다른 유형을 보게 됐다.
만어사 종각 |
김수로왕 탄생 설화는 고대 왕국 건국신화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늘로부터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 6개의 알이 있었고 알에서 차례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먼저 태어난 아이를 수로라고 했고 가락국(금관가야)의 왕으로 추대됐다. 다른 아이들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됐다. 이렇게 6가야가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가야 연맹을 형성했다는 신화다.
소위 삼국유사에 나오는 천강난생설화(天降卵生說話)다. 그러나 가락국(42~532년)은 설화나 신화 이전에 엄연히 500여 년 동안 낙동강 하구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신라와 끊임없이 영토 전쟁을 벌이며 존재했던 국가다. 우리 기억 속에 가락국이 신화와 역사가 뒤범벅돼 있듯, 만어사도 신화와 역사가 결합되고 민간 신앙과 불교가 뒤섞여 있었다. 불교가 한반도에 전파된 이후 지역 토착 신앙과 융합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는데 이러한 결합은 백성들의 종교,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지역 사회의 신앙적 필요를 반영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공사 중인 만어사 |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듯 조그만 사찰에 굴착기 기계 소리가 요란하고 공사용 자재들로 어수선하지만 언덕 위의 마애석가불의 온화한 미소만큼은 너무 편안하다.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 외부에서 큰 바윗돌을 옮겨와 음각으로 화려하게 새긴듯한 마애 석가불이 만어산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신령스런 스님이 있었다는 김해 무척산이 지척이요, 낙동강 하류 쪽의 신어산이 그 너머에 있으니 만어산 마애불을 쌍어신앙의 중심에 세운 것 같다.
마애석가불 |
마애불 앞에서 바라보니 낙동강과 밀양강이 만나는 삼량진읍 마을과 평야, 그리고 그 너머 삼량진을 둘러싼 봉우리들이 담백한 산수화처럼 시원하게 들어온다. 새벽녘이나 봄비 내리는 날에는 만어사 주변에 피어오르는 운해가 천지를 뒤덮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특히 단풍과 어우러진 가을 운해는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영남 알프스 높은 산봉우리들이 감싸고 있는 만어봉을 뒷배로 하고 낙동강과 밀양강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굽이굽이 앞산에 걸치는 만어사 운해를 밀양8경 중 하나로 꼽는 것은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진주 촉석루와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명루(名樓) 중 하나라 일컬어지고, 밀양8경 중 하나인 밀양강변의 영남루를 아쉽게도 보지 못했다.
자연과 전설이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공간에 깃든 역사와 문화를 생각했다. 고요한 절집에서 잠시나마 마음의 안식을 찾는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해야 했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