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백악관 재입성이 확정된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국내 증시가 비실비실한 모습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내 증시 ‘큰손’으로 불리는 외국인 투자자의 ‘코리아 엑소더스(대탈출)’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는 데다, 국내 증시를 떠받치던 ‘동학개미(국내 증시 소액 개인 투자자)’의 이탈세마저 더 가속화하는 모습이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미국 증시가 ‘트럼프 랠리’를 통해 ‘사상 최고치’ 기록을 연이어 경신하는 가운데, 코스피 2400선과 코스닥 700선이 깨지고, 심리적 저항선으로 불리던 ‘5만전자(삼성전자 5만원 대)’까지 결국 붕괴하는 등 국내 증시의 심각한 부진 현상은 투자자들에겐 더 큰 실망감으로 연결되는 분위기다.
▶한때 삼성전자 시총 300兆 붕괴…韓 증시, 美·日·中·대만 랠리 속 소외=15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오전 10시 현재 코스피 지수는 전 거래일 대비 22.08포인트(0.91%) 하락한 2396.78을 기록 중이다. 지수는 전장보다 5.81포인트(0.24%) 내린 2,413.05로 출발해 낙폭을 키우고 있다.
지수가 장중 2400선을 내준 것은 지난 ‘검은 월요일(블랙 먼데이)’로 불렸던 8월 5일(2386.96) 이후 처음이다. 당시 미국발 경기 침체 공포에 코스피가 급락한 바 있다.
같은 시각 코스닥 지수도 전장 대비 11.83포인트(1.74%) 떨어진 669.73이다.
전날엔 국내 시가총액 1위 삼성전자 주가가 전 거래일 대비 1.38% 내린 4만9900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이는 지난 2020년 6월 15일 종가 4만9900원와 같다. 주가는 지난 7일 종가 5만7500원을 기록한 뒤 5거래일간 13.22% 하락한 끝에 심리적 지지선으로 여겨졌던 5만원 선마저 내줬다. 삼성전자 시가총액은 297조8921억원으로 300조원을 하회했다.
외국인은 지난달 30일부터 전날까지 12거래일 연속 총 3조원 이상 삼성전자를 순매도하며 주가를 끌어 내렸다. 외국인 투자자의 한국 증시 이탈 현상은 코스피 시장 전체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다. 지난 7월 12일부터 지난 14일까지 약 4개월 간 코스피 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는 17조7207억원 규모의 순매도세를 기록했다.
국내 증시 향방을 좌우하는 것으로 알려진 외국인 투자자의 탈출 행렬 속에서 코스피 지수도 지난 7월 12일 종가 기준 2857.00포인트에서 전날 2418.86포인트로 15.34%나 하락했다. 지난 7월 11일 2891.35포인트로 종가 기준 연중 최고 수준을 기록했던 코스피 지수가 2500 선이 붕괴한 뒤, 2400 선마저도 걱정해야하는 수준까지 내려 앉는 데 넉달 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비슷한 시기 국내 투자자의 해외 주요 투자처와 비교해본다면 국내 증시의 소외 현상은 두드러진다.
연초 이후 13일까지 세계 각각 주가지수 등락률을 보면 국내 증시 투자의 인기가 떨어진 근본적인 요인이 낮은 수익률이란 점은 더 분명해진다. 코스피 지수가 9.47% 하락할 때 미국 다우(+16.59%)·S&P500(+26.29%)·나스닥(+30.70%), 일본 닛케이225(+16.32%) 중국 상하이종합(+16.10%), 홍콩 항셍(+18.08%), 대만 자취안(+28.04%) 지수 등은 모두 두 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하면서다.
▶‘1달러=1400원 대’ 환율마저 발목=전 세계 주요국 통화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하락 중인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는 외국인 투자자의 국내 증시 매도 압력을 키우는 모습이다.
전날 원/달러 환율은 장중 1410원 선을 넘어서는 등 2년 만에 최고 수준까지 올랐다. 전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의 주간 거래 종가는 전날보다 3.1원 오른 1406.6원을 기록했다.
헤럴드경제가 인베스팅닷컴을 통해 확인한 주요20개국(G20) 통화의 최근 1개월 간 달러 대비 가치 절상·절하율에 대해 분석한 결과,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최근 1개월 간 4.26% 절하되며 멕시코 페소화(6.88%)에 이어 꼴찌에서 두 번째를 기록했다. 트럼프발(發) 강(强)달러 현상 속에서 2기 트럼프 행정부에서 공언한 ‘보편 관세’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대미(對美) 대형 무역흑자국 멕시코와 한국의 통화 가치 절하 속도가 가장 빨랐던 셈이다.
이로써 ‘악순환’에 대한 우려도 커진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원/달러 환율 상승은 외국인 투자자에겐 국내 증시 매력도가 낮아져 탈출을 고려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며 “외국인 ‘엑소더스(대탈출)’가 환율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고, 결국은 또 다시 국장에 대한 매력도가 낮아지는 고리가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코스피 급락처럼 보이는 것이 삼성전자 급락에 따른 착시 효과란 지적도 나온다. 그만큼 삼성전자 외 다른 종목 주가는 더 하락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조언이다. 전날 삼성전자 주가는 전거래일 대비 4.53% 내린 5만600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이는 종가 기준 지난 2020년 6월 15일(4만9천900원) 이후 최저가다.
박소연 신영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가 코스피 지수에 착시를 주고 있다”며 “삼성전자를 제외한 코스피지수는 2650선 정도여서,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코스피 지수가 그렇게까지 많이 빠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박 연구원에 따르면 삼성전자를 제외한 코스피 지수의 12개월 후행 주가순이익비율(PBR)은 0.8배이고 최근 3년 저점은 0.73~0.76배였다. 그는 “이를 해석하자면 단기적으로 삼성전자 이외 종목의 하락 룸(여지)이 더 커지는 국면이 나올 수 있다”며 “이런 징후가 나온 이후에야 코스피지수의 락바텀(Rock Bottom·최저점)을 볼 수 있다”고 경고했다.
▶거래량 ‘뚝’…증시 엔진마저 꺼질까 우려=문제는 외국인 투자자 뿐만 아니라 개인·기관 투자자 등 국내 증시를 지탱하고 있는 투자 주체들이 한꺼번에 국장에 대한 관심을 접고 이탈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1월만 해도 20조원 수준이었던 코스피·코스닥 일평균 거래대금은 이달 들어 15조원대로 쪼그라들었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는 코스피 하루 거래대금이 7~8조원 수준으로 줄어들기도 했다. 대선 이후 차기 트럼프 행정부의 수혜주를 찾는 ‘트럼프 트레이드’가 활발히 이뤄졌지만, 하루 거래대금은 여전히 10조원을 넘나드는 수준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증시 대기 자금인 투자자예탁금은 연초 59조4948억원에서 지난 8일 49조9023억원으로 10조원가량 줄었다.
‘국장 대신 미장(미국 증시)’이란 말이 이젠 투자자 사이에선 당연한 말이 됐다는 점도 뼈아픈 지점이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국내 투자자들의 미국주식 보관 금액은 지난 7일(1014억6570만달러) 처음으로 1000억달러를 돌파했다. 지난 11일 기준으론 1035억1011만달러까지 규모가 커졌다. 올해 초 673억6297만달러 수준과 비교했을 때 53.66%나 증가한 셈이다.
미국주식 매수·매도 결제건수도 지난 2022년 말 869만8000여건에서 올해는 지난 12일까지 1046만9000여건으로 크게 늘었다.
‘트럼프 트레이드’의 최대 수혜 투자처로 꼽히는 가상자산의 급부상 역시도 국내 증시엔 또 하나의 타격으로 평가된다. 특히, 트럼프 당선 이후 가상자산 대장주 비트코인 가격이 끝없이 치솟으면서 거래대금 역시 폭증 중이다.
미 가상자산 거래소 코인베이스에서 1비트코인은 13일(현지시간) 사상 최초로 9만3000달러 선까지도 넘어서기도 했다. 국내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에서 1비트코인 가격은 1억3000만원 대에 거래되기도 했다.
전날 가상자산 정보 사이트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국내 5대 가상자산 거래소(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고팍스)의 지난 24시간 총거래대금은 34조6074억원에 이른다. 가상자산 거래 규모는 지난 12일 코스피 거래대금(12조8480억원), 코스닥 거래대금(7조4123억원)의 1.5배 수준이다.
다만 최근 국내 증시의 낙폭이 크고 가팔랐던 만큼 상황이 안정되면 반등 기회를 노려볼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양해정 DS투자증권 연구원은 “미국 시장은 직접적인 피해가 없으니 차기 정부 기대감으로 상승 중이지만 한국은 수요시장의 정책 불확실성이 투자 시계를 흐리게 하고 있다”며 “트럼프 1기 시기에도 정부가 구성되고 정책 윤곽이 잡히면서 한국 시장은 안정을 찾았다. 트럼프 트레이드가 멈추면 금리 인하, 달러화 변화 등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신동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