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압축과 해학…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린 ‘퉁소소리’ [고승희의 리와인드]

고선웅 연출ㆍ각본의 연극 ‘퉁소소리’
원작 ‘최척전’, 30년 환란 관통한 생의 의지


연극 ‘퉁소소리’ [세종문화회관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말도 통하지 않는 베트남 상인들 사이에서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사람이 있다. 초췌한 낯빛에 금세라도 숨통이 끊어질 듯한 절박함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그를 둘러싼 수십 명의 베트남 상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에 민연(憫然)함이 들어찬다. 하나둘 입을 떼고 합창하듯 한 사람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른다. “옥영, 옥영, 옥영, 옥영!”

‘기구한 운명’이었다. 만나자 마자 이별이라더니, ‘호시절’이 짧았다. 전란에 떠밀려 ‘인연의 끈’은 희미해졌다. 그러다 닿은 곳은 안남(安南, 베트남). 산전수전 다 겪은 남원의 가난한 선비 최척은 그날도 이역만리 타국에서 퉁소를 불었다. 달밤의 퉁소 소리가 바람에 실려 메아리처럼 흩어지는 땅. 그곳에서 부부는 다시 만난다. 연극 ‘퉁소소리’ 1막의 마지막 장면이다. 객석엔 안타까운 부부의 연과 절망의 끝에서도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인류애의 숭고함에 흐느낌이 번진다.

연극 ‘퉁소소리’는 조선 중기 문인 조위한(1567~1649)의 한문소설『최척전』(1621)을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고전 해석에 탁월한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이 연출과 각색을 맡았다. 고선웅 단장은 2022년 3월 서울시극단 취임 이후 이미 세 편의 초연작(‘겟팅아웃’, ‘카르멘’, ‘욘’)을 올렸으나, ‘퉁소소리’는 그에게 조금 더 특별한 작품이다. 스스로도 “15년간 준비한 작품”이라 했을 만큼 심혈을 기울였다. 창극으론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귀토’, 연극으로는 ‘회란기’,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등 고전을 능수능란하게 매만져온 그의 장기가 발휘된 작품이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듯한 빠른 호흡의 대본은 해학적인 말맛과 아름다운 시적 언어가 버무려졌다. 추격하듯 내달리는 이산(離散)의 쓰라림은 150분(인터미션 포함)을 삽시간에 집어 삼킨다.

한 인물의 일대기를 무대로 옮기는 것은 자칫 악수(惡手)가 될 수 있다. 복잡다단한 사건과 자극 속에 살아가는 현대의 관객에게 ‘위인전’을 옮긴 듯한 이야기는 그리 큰 흥미를 불러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전형적인 일대기로 흐를 수도 있었지만, 고선웅의 손을 거쳐 완전히 다른 매무새를 갖췄다. 시대의 한계 속에 지워지기 일쑤였던 여성 캐릭터들(최척의 아내 옥영, 몽선(최척과 옥영의 둘째 아들)의 아내 홍도)이 진취적 인물로 그려진 것도 그 중 하나다.

연극 ‘퉁소소리’ [세종문화회관 제공]


연극은 조선 남원에서 시작해 일본, 중국, 베트남을 거치고, 30년의 시간대를 횡단한다. 오랜 전란(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온몸으로 살아낸 최척 가족(아내 옥영, 두 아들), 그들이 마주한 다양한 문화 속 사람들, 난리통에서 생이별하면서도 죽음의 그림자를 비껴간 이들의 이야기를 틈새마다 밀어넣었다.

무대는 영리하고 명민하다. 방대한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풀어내면서도, 시간을 껑충껑충 건너 뛰어 속도감을 높였다. 130분에 달하는 이야기는 잘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를 보는 것처럼 아귀가 딱딱 맞는다.

촘촘한 구조를 세우기 위한 장치는 세 가지로 꼽을 수 있다. 가장 큰 공로는 함축적이면서도 적확한 대사다. ‘압축적 표현’이 핵심인 창극 작업을 꾸준히 해온 고 단장의 경험들이 ‘퉁소소리’에 고스란히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서사의 신축’(늘이고 줄임)이 자유로운 판소리 화법이 연극으로 들어오자, 지난하기 그지 없던 인물들의 역사는 짧은 대사로 옮겨져 탁구 게임처럼 주고 받게 됐다. 극 후반 등장한 “메이꽌시, 다이조부, 괜찮아”라는 3개 국어의 대사는 30년 전란을 관통하며 위로를 건넨다.

함축적 대사의 연장은 ‘상징적 인물’에게서 찾을 수 있다. 대사 한 마디 없지만 존재로서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옷의 배우들이다. 고선웅 연출가의 히트작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처음 선보였고, 이젠 시그니처가 됐다고 할 만한 표현 방식이다.

많게는 1인 10역까지 해낸 배우들은 각각의 배역마다 적재적소에서 자기 몫을 해낸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인물 활용법이다. 최척 가(家) 사람들과 함께 자리한 무대 위 다양한 얼굴들은 활어처럼 팔딱거리며 몰입도를 높인다. 하객4, 피난민8, 베트남 상인4, 진위경 등 총 7개 역을 맡은 이원희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얼굴이자 극 곳곳에서 웃음을 주는 역할로 자리한다. 작품의 기저에 자리한 유쾌한 정서와 해학은 작위적이다 싶을 만큼 극적이고, 황당하리만치 우연이 난무하는 원작을 헤집고 끼어들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연극 ‘퉁소소리’ [세종문화회관 제공]


다역을 해내는 20명의 배우들은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대사도 동시에 수행한다. 아득한 먼 옛날 국경을 넘나들며 생존언어를 익힌 사람들이다. 한 공간에서 부대끼는 각기 다른 민족이 ‘공통의 언어’로 소통하는 모습은 당대 이민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인, 일본인의 어눌한 한국어 발음 연기는 객석에 웃음을 유발한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서 나왔다. 연극은 능숙하지 않은 발음을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대표적 성질로 보여줬으나, 이러한 타자화가 ‘퉁소소리’라는 작품에서 효과적인 표현 방식이었는지에 대해선 아직 의문이 남는다.

동아시아 전역을 훑고 간 방대한 시간을 극 안으로 담아내기 위해 연극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 무대 안의 경계를 허문다. 이는 한국 최초의 극이었을 ‘마당놀이’를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 중심에 배우 이호재가 있다. 그는 이호재 자신이었다가, ‘늙은 최척’이 되기도 하고, 이 소설을 쓴 조위한이 되기도 했다. 분신술을 하듯 여러 인물이 되는 이호재는 연극에서 관객들이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서술자’이자, 관객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징검다리다. 그러다가도 극 안으로 훅 들어가 하나의 캐릭터가 되며 ‘웃음 포인트’를 만든다.

연극은 환란 속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절망에서도 다시 서게 해주는 관계의 힘을 보여준다. 생을 저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는 이야기를 담는다. “결국 다 지나간다는 것, 그러니 삶은 계속되고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연출가 고선웅은 15년간 쌓아온 공력을 모두 쏟아냈다.

무대는 과감하게 비웠고, 배우들은 저마다의 역할과 대담하게 정면승부했다. 그러니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아도 소박한 자연스러움이 무대를 채운다. 연극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살아있는 우리의 이야기로 다가오는 이유다. 촘촘하게 직조한 세계가 바탕했기에 막을 내린 이후, 웃음과 감동의 카타르시스를 마주할 수 있었다. ‘퉁소소리’는 ‘조씨고아, 분노의 씨앗’의 흐름 위에서 또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고선웅의 ‘진화한 오늘’을 목도한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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