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몬스터 콜스’ 8일까지 국립극장
민새롬 연출·박지선 작가·황혜란 디렉터
1인 다역, 7편의 1인극 보는 듯한 작품
연극 ‘몬스터 콜스’의 배우 김원영 [국립극장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시월, 어느 깊은 밤, 나는 잠에서 깼어요. 가슴이 마구 뛰었습니다. 너무 무서웠어요.” (연극 ‘몬스터 콜스’ 중)
매일 밤 12시 7분. 10대 소년 코너에겐 ‘몬스터’가 찾아온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 소년의 폭풍 같은 내면이 42세의 지체장애 배우 김원영의 눈에 들어찬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 끝끝내 공포를 이기고 시선이 닿은 곳에서 고요를 마주한다. 숨소리가 뒤섞인 낮은 음성으로 그가 말한다. “까만 밤하늘엔 반달이 떠있었어요.” 고통의 터널을 지나온 듯한 목소리 뒤로 우주가 쏟아졌다.
10대부터 40대까지, 나이도 성별도 모두 다르다. ‘배우’로 모였지만, 배우라는 직업만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한 무대에 선다. 각기 다른 사회적 특성을 가진 7명의 배우. 이들은 무대 위로 올라가 ‘한 명의 인물’ 코너를, 코너의 다층적 감정과 그가 처한 ‘공기’를 연기한다. 때론 코너의 주변 인물이 되기도 하고, 서술자가 되기도 한다. 연극 ‘몬스터 콜스’(12월 8일까지, 국립극장)가 서사를 그리는 방식이다.
개막을 앞두고 국립극장에서 만난 민새롬 연출가는 “한 명의 배우가 ‘1인 다역’을 하기에 7편의 1인극을 보는 것 같은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연극은 좀 독특하다. ‘몬스터 콜스’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주인공은 열세 살 소년 코너. 엄마는 병들었고, 아빠는 늘 부재중이다. 학교에서도 혼자다. 의지할 곳 없는 코너의 일상에 어느날 몬스터가 침입해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 원작 소설의 큰 줄기다. 그 과정을 통해 마음 속 상처와 진실을 마주하는 이야기다. 각색을 맡은 박지선 작가는 코너가 겪는 고통스러운 감정과 삶의 진실에 집중해 대본을 매만졌다.
연극 ‘몬스터 콜스’의 연출을 맡은 민새롬 [국립극장 제공] |
보통의 연극이라면 한 명의 배우가 저마다 하나의 역할을 맡겠지만, 이 연극은 다르다.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 사회적, 신체적 특성을 가진 배우들 중 일부가 동일한 인물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특정 인물만 연기하는 것은 아니다. 민 연출가는 “배우들은 인물로만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감각과 내외부적인 공기와 분위기, 이미지로도 존재한다”고 했다.
연극엔 두 명의 작가가 존재한다. 활자를 적은 대본을 책임진 박지선 작가와 활자가 펼쳐낸 세계를 몸짓으로 옮긴 황혜란 디바이징 디렉터가 바로 그들이다. 민 연출가는 “이 작품은 활자와 몸으로 이뤄졌다”며 “박지선 작가는 줄거리를 해석해 각색했다면, 황혜란 디렉터는 표현하는 배우들이 어떻게 창작해 내는지를 각색했다”고 설명했다.
디바이징 디렉터는 이 작품을 통해 명명된 직업이다. 공연 참여자들이 극 구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공동 창작 방식인 디바이징 씨어터를 이끄는 주체 격이다. 황혜란 디렉터는 배우들의 고유한 연기와 움직임을 끌어내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각기 다른 삶의 역사와 몸의 경험을 가진 배우들이 이 텍스트를 만나 서로의 다름과 고유함을 끌어낼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연극엔 장애인 배우와 비장애인 배우가 어우러진다. 민 연출가는 “단지 연기와 움직임만을 코치하는 것이 아닌 몸에서 비롯된 영감과 인식을 심어주는 역할”이라고 귀띔했다.
연극 ‘몬스터 콜스’의 황혜란 디바이징 디렉터 [국립극장 제공] |
무대 위의 연극 장르는 보통 인물들의 대사로 구성된다. 하지만 ‘몬스터 콜스’의 배우들은 인물인 동시에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을 보여줄 배경이자 분위기이고, 이 상황을 그려나갈 서술자이기도 하다. 10대 소년의 내면의 소리가 시시각각 튀어나오면, 그 언어를 몸으로 옮겨낸다. 배우 김원영이 휠체어에서 내려와 비보이와 같은 몸짓으로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면,그 옆으로 대여섯 명의 배우들이 겹겹이 쌓여 기괴한 나무의 움직임을 만든다. 문학적인 언어들이 내레이션처럼 흐르고, 혼란스러운 정서가 선율이 돼 더해지면 배우들의 몸짓은 보다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민 연출가는 “사실 대부분 프로덕션에선 배우들에게 해석을 요구하지 않고 정해둔 길로 이끌기에 배우 스스로 자신의 해석을 드러내고 몸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굉장히 두렵고 불안한 일일 수 있다”며 “작품에선 배우들이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체가 되기에 배우들에게 보다 의미있는 도전이 되고 있다”고 봤다.
이 과정에서 공동 창작이 일어났다. 배우는 주어진 대본과 연기를 하던 기존 무대의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낸다. 배우 스스로가 작가가 되기도, 연출자가 되기도 하는 과정이다. 이를 창작진 세 사람은 ‘배우의 드라마터지(dramaturge)’라고 했다.
“휠체어에 앉은 40대의 배우가 13세의 소년 역할을 하거나 20대의 젊고 건강한 남자 배우가 아픈 엄마 역할을 할 때 10대 소년처럼 보이거나 연약한 여성처럼 보이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전혀 다른 신체성이 병치될 때 배우의 삶이 함께 드러나게 되는 순간을 마주해요. 상반된 조건의 신체성이 핍진성을 살려가며 연기하는 것이 이 작품에선 유효하게 다가와요.” (황혜란)
연극 ‘몬스터 콜스’ 연출을 맡은 민새롬, 작가 박지선(왼쪽부터) [국립극장 제공] |
대본은 연습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내용이 더해지기도 하고, 빠지기도 했다. 박지선 작가는 “대부분의 작품에선 희곡을 고정불변의 것, 완성된 형태에 가까운 것으로 보고 캐릭터와 작품 분석을 한다면 이 연극에서 대본은 출발의 개념이었다”며 “대본을 두고 배우와 연출가가 워크숍을 하는 과정에서 즉흥 대사가 추가되기도 하고, 기존의 것을 덜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원작을 뼈대로 삼아 연극에선 코너의 주변인물들의 내면이 더해졌다. “‘나쁜 역할’로 그려지며 원작에선 가려졌던 아빠의 내면, 딸에겐 한없이 약하고 손자 코너에겐 엄격한 할머니의 붕괴되는 내면”을 방백으로 처리했다는 것이 박 작가의 설명이다. 황 디렉터는 “외할머니의 내면의 묘사는 빨간 석류가 쪼개지듯 핏빛 속마음이 쩍 벌어져 나오는 느낌”이라고 귀띔했다.
인물들의 내면이 더해지며 연극은 ‘모두의 이야기’로 향한다. 민 연출가는 “내면의 방백을 통해 이 이야기가 주인공에게만 거쳐가는 고통이 아닌 저마다의 입장에서 경험하는 고통의 이야기이자 ‘고통의 유대’라는 색깔이 더 짙어졌다”고 말했다.
출간 당시 ‘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표준’이라는 평가를 받은 ‘성장 소설’은 박 작가의 선택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연극은 누구나의 마음 속에 놓인 모순된 감정과 그것을 직시하는 두려움과 공포, 끝내는 깨고 나와 성장하는 과정으로 향한다. 박 작가는 “10대 소년의 이야기이면서도 마치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했다.
“이 작품은 ‘괜찮다’고 말하는 이야기예요. 누군가의 죽음, 삶에서 마주한 실패, 상처로 인한 감정을 허락해주는 상태, ‘그 감정을 가지고 있어도 괜찮다’, 고 말해줘 위로가 돼요. 지독한 고통 속에서 설령 어떤 안 좋은 마음을 가졌더라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으니 그 마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라, 그런 마음을 가져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건네요.” (박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