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도 2011년 3월 민주화 요구 폭발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과 그의 아내 아스마 알아사드 여사가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석하고 있다.[로이터] |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시리아 내전이 지난 8일(현지시간) 개전 13년 만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으면서 유럽과 중동 권역에 심대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일단 약 500만명에 이르는 시리아 난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유럽과 중동 일대에 흩어진 시리아 국민은 각국의 난민 수용 문제와 결부돼 세계적인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11월 30일 기준 시리아 난민 수는 481만9000여명.
이 중 대다수인 432만명이 시리아 인근 튀르키예, 레바논, 요르단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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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에 의하면 시리아 내전이 격화한 2015년 이후 지난해까지 유럽에서 난민 자격을 얻은 시리아인은 130만명에 달한다.
독일은 시리아 국적자 97만명이 거주하고 있고 이 중 78만명이 망명 자격을 얻었거나 신청한 상태다.
독일에 이어 오스트리아 11만명, 스웨덴 9만명, 네덜란드 8만명 등의 순으로 시리아 난민은 유럽에 분포한다.
한 여성이 9일(현지시간)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정치범 수용소 세드나야 감옥에 알아사드 정권 재임 기간 중 실종된 가족을 찾으며 울음을 터뜨리고있다. [AFP] |
내전을 피해 시리아 내부에서 이주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실향민 규모는 1000만명을 상회할 것으로 추산된다.
시리아 국민은 2011년 내전이 본격화하면서 전쟁을 피해 인접국과 유럽 등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지난 8일(현지시간) 내전이 종식되면서 시리아 난민 수용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유럽에서 더 이상 시리아 난민을 수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 종전 이후 상황이 안정화되면 유럽의 난민 문제가 새 국면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시리아 반군이 9일(현지시간) 시리아 국기를 들고 반군의 승리를 기뻐하고 있다. [로이터] |
시리아 내전은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혁명이 기폭제가 된 ‘아랍의 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경제 위기를 겪던 아랍권 국가들이 식량 위기를 겪으면서 국민들은 정부에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호소했다.
또한 호주 출신 해커 줄리언 어산지의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튀니지 벤 알리 일가의 부패상이 공개되면서 튀니지 혁명이 촉발되는 등 정보화가 아랍의 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랍권 정치 지도자의 부패 실태가 트위터 등으로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2011년 3월 15일을 전후해 시리아에서도 국민들의 민주화 목소리가 커졌다.
정부군이 시위에 나선 국민을 상대로 강경 진압에 나서면서 정부군과 반군의 무장 갈등이 격화되고 2012년 중반께 결국 내전으로 비화한다.
한 남성이 9일(현지시간)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포스터를 발로 밟고 있다. [로이터] |
정부군은 이란, 러시아로부터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반군은 미국이 지원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NATO), 천연가스와 석유를 생산하는 국가들로 구성된 걸프협력회의(GCC) 국가들의 지원을 받았다.
나토와 산유국들의 지원 속에 반군은 개전 초기인 2013년 이들리브 등의 지역 중심지를 장악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시리아 내전 일지. |
2014년에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인 이슬람국가(IS)가 반군과 정부군 양측을 모두 공격해 동부 시리아 일대를 장악한다.
이 무렵 미군이 주도하는 연합합동 특수임무부대(CJTF)가 참전하고 미군은 또한 쿠르드민병대(YPG)로 구성된 시리아민주군(SDF)를 지원한다.
하지만 러시아와 이란을 등에 업은 정부군은 2014년과 2015년 반격을 개시해 2018년 말까지 대부분의 반군 거점을 탈환한다.
혼란을 틈타 튀르키예는 2016년 북부 시리아를 침공해 IS와 정부군 등과 군사적으로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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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SDF가 주도한 공세로 IS는 급격히 세력을 잃게 되고 주요 거점을 상실한다. 반군을 지원한 셈이다.
하지만 정부군이 2018년 반군의 마지막 거점인 이들리브 공격을 앞둔 가운데 러시아와 튀르키예의 중재로 휴전이 성사된다. 반군 세력은 이들리브로 집중되고 튀르키예가 반군을 지원하는 구도가 형성된다.
튀르키예는 2019년 YPG와 충돌했고, 2020년부터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내전은 정체기에 들어간다. 2021년 시리아에서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95% 이상 득표율로 재선된다. 반군과 서방은 선거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투표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알아사드 대통령은 서방과 대립 구도를 이룬 가운데 정부군이 반군 점령지 대부분을 장악하고 2022년 내전 종결을 선언했다.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시민들이 반군의 승리에 환호하고 있다. [AFP] |
그러나 잔존 반군 세력은 튀르키예의 지원 속에 YPG와 대립 구도를 이어갔고 정부군은 이를 묵인한다. 이러한 정체기가 올해 11월 초까지 지속되다가 정부군의 지원 세력에 균열이 일어난다.
러시아, 이란, 헤즈볼라 등의 시리아 정부군 지원 세력이 각각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의 갈등으로 여력이 없는 틈을 타 반군이 알레포 지역에 대규모 공세를 펼쳐 승리한다. 여세를 몰아 반군은 지난 8일 수도인 다마스쿠스를 함락시키고 알아사드 대통령은 모스크바로 도피하여 13년에 걸친 내전은 막을 내린다.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AFP] |
2000년 취임한 시리아의 6대 대통령인 바샤르 알아사드는 아버지인 하페드 알아사드(1930~2000)가 사망한 직후에 대통령직을 세습받았다. 그는 반정부 인사와 반군을 전기 고문하고 성폭행하는 등 인권 탄압을 일삼기도 했으며,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반군 지역에 사린가스·염소가스 등 화학 무기를 살포하며 국제사회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이 일가가 ‘알아사드’라는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27년으로, 바샤르 알아사드의 친할아버지, 알리 아사드(1875~1963)가 ‘알와히시’이던 성을 바꾸면서부터다. 알아사드는 아랍어로 ‘사자’라는 뜻이다.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아버지 하페드 알아사드(왼쪽)가 1973년 9월 9일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고 있는 모습. [AFP] |
알리 알아사드의 아들 하페즈는 1963년 바트당이 일으킨 쿠데타에 가담해 시리아 공군 사령관을 지내면서 시리아의 권력 중심부로 들어왔다.
하페즈는 허수아비 대통령 권한대행을 세워 놓고 본인은 국무총리라는 명목으로 집권했다가 1971년 4월 대통령에 직접 취임했다. 하페즈는 런던에서 안과의사로 일하고 있던 차남 바샤르(1965~)를 불러 후계자로 삼았으며 1998년에는 시리아군의 레바논 점령작전을 맡겼다.
바샤르는 2000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대통령에 취임해 24년에 걸쳐 독재 집권을 유지했다.
시리아 국민들이 반군의 수도 다마스쿠스 점령과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축출에 기뻐하고 있다. [AFP] |
이들 일가는 경제나 국가 근대화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사드 일가는 2011년 ‘아랍의 봄’ 사태와 맞물려 발발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후 내전이 시작되자 고문과 독가스 등을 사용해 자국민을 탄압했다.
그간 바샤르의 부인인 영국 태생 아스마(1975~)를 비롯, 가족과 일가친척은 시리아의 비즈니스, 은행업, 통신업, 부동산업, 해양산업을 장악해 부귀영화를 누렸다. 영부인 아스마 알아사드와 자녀 3명은 일찌감치 시리아에서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지난달 말 러시아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있다.
알아사드 대통령은 반군이 수도를 점령하기 직전 러시아 모스크바로 피신한 것으로 전해졌다. 크렘린궁의 한 소식통은 8일 스푸트니크 통신에 “아사드와 그 가족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며 “러시아는 인도주의적 고려에 따라 그들에게 망명을 허가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