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쪽짜리 선언문에 “갈등·트라우마 사과…그래도 해야만 했던 일”
악시오스 “뉴욕 총격, 美 의료 시스템 불평등 드러내”
폴리티코 “시민들, 불평등 해결 어려울 때 무법자에 의존”
미국 유나이티드헬스그룹의 보험 부문 대표 브라이언 톰슨(50) 최고경영자(CEO)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루이지 만조니(26)가 10일(현지시간) 펜실베이니아주 홀리데이즈버그의 블레어 카운티 법원에서 열린 범죄인 인도 심문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로이터] |
[헤럴드경제=김영철 기자] 지난 4일(현지시간) 뉴욕에서 발생한 미국 최대 건강보험사 유나이티드헬스그룹(UNH)의 보험 부문 대표인 브라이언 톰슨(50) 최고경영자(CEO) 총격 살해사건의 용의자가 경찰에 붙잡힌 가운데 해당 용의자는 체포 당시 자필 선언문을 소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9일(현지시간) 루이지 만조니(26)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알투나에 있는 한 맥도날드 매장에서 경찰에 붙잡힐 당시의 모습. [로이터] |
앞서 만조니는 전날 오전 9시15분께 펜실베이니아주 알투나에 있는 한 맥도날드 매장에서 체포됐다.
만조니는 체포 당시 미국 사회와 대기업에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내용이 담긴 선언문을 소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자필로 작성된 3쪽 분량의 선언문에는 자신이 단독으로 범행했다고 언급하면서 “갈등과 트라우마를 일으킨 것을 사과한다. 하지만 그것은 해야만 했던 일이었다”고 쓴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면서 “솔직히 말해 이 기생충들은 당해도 싸다”는 문구가 포함돼 있었다고 미 뉴욕타임스(NYT)는 뉴욕 경찰의 내부 보고서를 인용해 전했다.
만조니는 앞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기술문명을 반대하며 폭탄 테러범이 된 테드 카진스키를 흠모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고 로이터 통신은 보도했다.
미국에서 ‘유나바머’(Unabomber)란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카진스키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미국의 대학과 항공사 등에 소포로 사제폭탄을 보내 3명을 숨지게 한 테러범이다.
16세 때 하버드대 수학과에 입학하고 24세 때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최연수 수학 교수로 임명된 천재였지만, 2년 만에 사표를 내고 몬태나주 숲속 오두막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그는 검거 전인 1995년 각 언론사에 보낸 선언문 ‘산업사회와 미래’에서 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인류에 재앙이 될 것이라며 혁명을 통해 산업사회를 전복해야 한다는 극단주의적 주장을 폈다.
선언문 발표 후 가족의 제보에 꼬리가 밟혀 1996년 검거된 그는 지난해 6월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만조니는 SNS에서 카진스키를 “극단주의적 정치 혁명가”라 칭하고 그의 선언문 산업사회와 미래를 두고 “선견지명이 있다”고 칭송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제시카 티쉬 뉴욕경찰청장은 NBC 인터뷰에서 “세 쪽으로 된 선언문에는 반기업 정서와 건강보험 업계와 관련된 많은 문제 관련 내용이 담겼다”라며 “다만, 구체적인 범행 동기는 향후 몇주 또는 몇 달간 이뤄질 수사 과정에서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조지프 케니 뉴욕경찰청 수사국장도 브리핑에서 만조니에 대해 “‘코퍼레이트 아메리카’(Corporate America)에 악의를 품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코퍼레이트 아메리카는 미국의 대기업 또는 미국의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지칭하는 용어다.
미 인터넷매체 악시오스는 만조니 총격사건 이후 온라인상에서 보험 업계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면서 만조니를 ‘21세기 로빈 후드’라고 칭송하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로빈 후드는 영국 민담에서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로,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의적으로 알려져 있다.
루이지 만조니(26, 왼쪽)가 지난 4일(현지시간) 뉴욕 미드타운의 힐튼호텔 앞 인도에서 미국 유나이티드헬스그룹의 보험 부문 대표 브라이언 톰슨(50) 최고경영자(CEO)를 향해 총격을 가하고 있는 모습. [로이터] |
이에 대해 악시오스는 “톰슨 CEO를 살해한 이번 사건은 미국 의료 시스템의 불평등을 부각시켰다”며 “온라인상에서 누리꾼들은 만조니를 영웅으로 치켜세운 동시에, UNH가 지난해 160억달러 이상의 영업 이익을 낸 점을 꼬집으며 사회적 불평등을 지적했다”고 전했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도 만조니의 범행이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사회적 강도(social banditry)’ 이론을 연상시킨다고 분석했다. 이 이론은 법적으로 불법이지만, 억압받은 사회의 지지를 받는 행동을 일컫는 사회적 저항을 의미한다.
미국 최대 건강보험사 유나이티드헬스그룹(UNH)의 보험 부문 대표인 브라이언 톰슨(50) 최고경영자(CEO)를 총격 살해한 루이지 만조니(26)가 펜실베이니아주 홀리데이즈버그에 있는 블레어 카운티 법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AP] |
NYT는 이번 총격 사건에 대해 미국인들이 의료보험을 청구해도 의료비 지급을 거부하는 의료보험 업계에 대한 좌절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료 보험 업계는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반면 보험으로 인한 수혜자는 드물어서다. 실제로 톰슨 CEO는 지난해 2810억달러의 수익을 보고했다.
미란다 야버 미 피츠버그 대학교 보건정책 및 경영학 조교수에 따르면 지난 2022년 미국인 4명 중 1명 이상이 비용 문제로 인해 의료 서비스를 지연하거나 중단했다. 이러한 여파로 지난해 11월 실시된 갤럽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31%만이 미국 의료 시스템을 신뢰한다는 응답이 나오기도 했다.
폴리티코는 “국가가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신뢰가 사라졌을 때 무법자들을 찾는 경향을 이번 총격 사건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미국 최대 건강보험사 유나이티드헬스그룹의 보험 부문 대표인 브라이언 톰슨(50) 최고경영자(CEO) 총격 살해사건의 용의자 루이지 만조니(26). [루이지 만조니 인스타그램 캡처] |
만조니는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으며, 명문대를 졸업한 수재다.
미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만조니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저명한 기업가 가문 출신이다. 만조니의 가족은 지역 라디오 방송국인 WCBM과 요양보호시설인 로리엔 헬스 서비스를 소유하고 있다.
만조니의 할아버지는 기업가이자 부동산 개발업자이며, 아버지는 엘리컷시티의 컨트리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사촌은 메릴랜드주의 공화당 소속 하원의원인 니노 만조니다.
NYT에 따르면 만조니는 볼티모어에 있는 명문 사립학교인 길먼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아이비리그 명문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컴퓨터공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그는 게임업계 등에서 일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만조니가 최근 몇 년간 극심한 허리 부상에 시달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일각에선 그의 범행이 허리 수술에 따른 보험금 지급을 거부당한 데 따른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한편 뉴욕 경찰은 2급 살인 혐의와 불법 총기소지 등 혐의로 만조니를 입건하고 펜실베이니아주에 신병 인도를 요청한 상태다. 그러나 만조니가 뉴욕주로의 신병 인도를 거부함에 따라 실제 인도까지는 시일이 소요될 가능성이 있다.
펜실베이니아주 블레어카운티 법원은 이날 열린 범죄인 인도 심문에서 만조니의 변호인이 신청한 보석 허가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