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전시 잇따라
이헌정·김재석 작가 개인전 ‘눈길’
이헌정 작가의 ‘항아리’. [박여숙화랑] |
‘달을 닮은 항아리에게 아름다움을 묻다’ 전시 전경. 이정아 기자. |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지난해 3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8세기 조선백자 달항아리 한 점이 60억원에 낙찰됐다. 달항아리는 저명한 해외 미술관과 컬렉터들이 소장하고 싶어 하는 ‘한국적 아름다움’의 정수로 손꼽힌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도 달항아리 모양의 성화대가 세계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우리가 달항아리에 매료되는 이유를 미학적으로 분석한 논문만 해도 4000건 이상이다.
그런 완전무결의 한국미이자 민족적 자부심으로 통하는 달항아리가 파손돼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표면을 따라 군데군데 갈라진 금이 보이거나, 조각난 틈과 틈 사이를 가까스로 이어 붙였거나, 굽다가 일그러져 망가진 듯한 달항아리들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다. 상식대로라면, 완벽하게 고운 곡선의 우윳빛 유백색의 달항아리여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는 파편이 미세하게 어긋나 있어 울퉁불퉁하게 쭈그러진 못난이 달항아리들이 그저 말없이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다.
최근 개보수를 마친 박여숙화랑에서 오는 20일까지 열리는 이헌정 작가의 개인전 ‘달을 닮은 항아리에게 아름다움을 묻다’는 강요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묻는 전시다. 한국적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인식되는 달항아리를 비틀어 ‘전통’과 늘 함께 붙여 쓰는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의 허상을 좇는다.
작가는 달항아리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인지, 아니면 모두가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기에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인지 반문한다. 그리고 관습적인 경계를 넘어설 것을 넌지시 속삭인다. 도예에서 출발해 도자 가구, 도자 벽화, 도자 건축, 영상, 설치 등 영역을 확대해 온 작가는 “예술은 기존의 가치를 답습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길 위에 도자’ 전시 전경.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스티븐 영 리의 ‘독수리구름문양매병’.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흔히 우리가 ‘완벽하다’고 일컫는 한국의 도자를 일부러 왜곡하는 또 다른 작가는 한국계 미국인인 스티븐 영 리다. 지난 4월부터 3개월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진행된 ‘길 위에 도자’ 전시에서 그가 선보인 ‘해체’ 연작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가마에서 깨졌거나 갈라졌거나 뒤틀린 항아리들의 몸체에 새빨갛거나 시퍼런 유약을 발랐다. 제멋대로 흠집 난 달항아리에 미국 문화와 관련된 색상을 덧입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작가의 정체성에 말을 거는 듯 보인다.
작가는 “항아리를 일부러 쓰러지게 하거나 균열을 만들어서 도자의 형태적 완벽함을 깨부쉈다”며 “사물마다 어떠해야 하는지 고유의 정체성이라는 게 있겠지만, 해체된 작품마다 저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고 결코 상상하지 못한 것을 보여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재석의 ‘Containing 061224’. [작가 제공] |
오는 23일까지 갤러리 이즈에서 진행되는 김재석 작가의 ‘Containing 2024’ 전시에서도 보기 좋게 그려진 달항아리와 꽤나 거리가 먼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빨강, 파랑, 초록, 노랑 등이 겹겹이 쌓인 색마다 거친 표면의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항아리 그림들이다.
특히 자유롭고 추상적인 붓 터치는 마치 매끈하게 반짝이는 항아리만이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작가는 “예쁨은 아름다움의 적”이라며 “지금 이 순간, 유한한 삶의 가운데서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멍들고 깨지면서 놓지 못하는 소중한 삶의 의미를 붙잡아 캔버스에 담고자 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