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 밟은 ‘리틀 베니스’…전광영, 6년 만의 귀환 [요즘 전시]

전광영 개인전 ‘집합:공명과 그 사이’
비엔날레 구성…60년 작품세계 총망라


전광영, 집합19-MA023, 2019. 작품 맞은편에는 작가가 촬영한 나이아가라 폭포수 영상이 소리 없이 재생된다. [가나아트]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흉측하게 변해버린 돌연변이 생명체일까. 탁한 회색빛을 띤 삼각형 조각들이 바닥에서 솟아오른 듯한 굴곡진 조형물 표면 군데군데 촘촘히 박혔다.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나이아가라 폭포수가 비치는 스크린이 마주하고 있는데, 이미지만 존재할 뿐 그 어떤 소리 없이 침묵하고 있다. 그렇게 침잠하는 고요 속에서 질문은 뻗어나간다. 우리는 무엇에 귀 기울이며, 무엇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걸까.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공식 병행 전시 ‘재창조된 시간들’에 출품된 ‘한지 작가’ 전광영(80)의 작품들이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를 찾았다. 그간 뉴욕, 브뤼셀, 모스크바, 베이징 등 해외 전시에 몰두해 온 작가가 6년 만에 한국에서 여는 전시다. 1980년대 초기작 ‘빛’ 연작부터 1995년부터 이어진 작가의 정체성인 ‘집합’ 연작,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 신작 등이 한데 모여 60년 평생 작업에만 몰두해 온 거장의 작품세계를 오롯이 만날 수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리틀’(little·작은) 베니스 비엔날레 같은 구성으로 전시를 준비했다”고 전했다.

전광영 작가. [가나아트]


전광영은 한지로 된 고서(古書)의 낱장을 찢어 삼각형 스티로폼을 감싸고, 끈으로 묶어, 화판에 매달아 특유의 돌출감을 표현한다. 30여 년 전 그는 불현듯 어린 시절 큰아버지의 한약방에서 본 풍경을 떠올리게 됐다. 한지로 감싼 뒤 끈으로 묶은 약첩은 소중한 물건을 보자기로 감싸는 한국의 ‘정’(情)이었다. 작가는 말했다. “서양은 ‘박스 문화’예요. 직육면체 모양에 정확하게 담을 수 있게 계량하고 그 박스를 차곡차곡 쌓는 거죠. 그런데 한국은 ‘보자기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집간 딸에게 친정어머니가 싸주는 보자기. 그 속에 하나라도 더 담으려는 마음.”

그의 ‘집합’ 연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박힌 삼각형 조각마다 한자와 한글이 빼곡하다. 서로 각기 다른 시대와 사상을 품고 전하던 문헌이 작가의 손을 거쳐 다른 생을 가진 정보의 최소 의미로 재탄생하는 지점이다. 작가는 “논어를 출처로 하는 조각들이 새롭게 배열되면서 전혀 다른 의미로 재탄생하기도 하고, 모태인 논어와 정면으로 대립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원색으로 물든 한지로 만든 삼각형 조각이 회색조를 띠는 ‘집합’ 작품들 사이에서 변주된 또 다른 세계를 전하기도 한다.

전광영, 집합001-MY057, 2001. [가나아트]


전시의 백미는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 공식 병행 전시와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돼 선보인 대형 설치 작업들. 그 시작을 알리는 작품 ‘집합001-MY057’은 높이 3m, 지름 1.1m의 원기둥 여섯 개로 구성된 작품으로, 한때는 번창했으나 파괴되고 망각돼 그 잔재만이 남은 그리스와 로마 유산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폐허의 기둥처럼 서 있는 이 작품은 번영과 쇠락, 영원과 유한이라는 시간의 두 얼굴을 은유하며 관객을 묵직한 사유의 장으로 이끈다.

이어 ‘집합0015-JL038’은 병원에서 녹음한 죽어가는 사람의 심장 소리를 배경으로 전시장 한편에 놓여 있다. 새카맣게 타들어 간 심장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생과 사의 경계에서 격렬하게 질문을 길어 올린다.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며, 무엇을 잃어버린 채 죽어가는가. 작품은 그저 묻고, 관객의 답을 기다릴 뿐이다.

작가는 예술가를 “그의 시대를 증언하는 자”로 정의한다. 삶의 틈새에서 저마다 각자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작가가 재창조한 시간이 그 자체로 전시명이 됐다. 전시는 내년 2월 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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