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맥베스’ 뒤엔 레이디맥베스가…권력 도파민에 취한 광기의 끝 [고승희의 리와인드]

오는 29일까지ㆍ서울시뮤지컬단 ‘맥베스’
권력을 향한 핏빛 욕망이 만든 불안과 파멸


서울시뮤지컬단 ‘맥베스’ [세종문화회관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나는 왕이 될거야.”

일찍이 ‘세 마녀’가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점쟁이, 타로 마스터, 무당…. ‘샤머니즘’의 총체 격인 ‘마녀’는 ‘전쟁 영웅’의 잠재된 욕망을 깨운다. 손바닥에 ‘왕(王)’자를 적진 않았지만, 세 명의 마녀가 주입하는 ‘운명론’은 욕망의 추동엔진이었다. 셰익스피어(1564~1616)의 비극 ‘맥베스’의 근간을 이룬 장치다.

운명론이 사라졌다. 예언은 ‘의지’로 뒤바꿨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고, 운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은 셰익스피어 시대부터 이어온 ‘생존 본능’이다. 서울시뮤지컬단이 매만진 ‘맥베스’(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가 원작의 핵심 장치를 뒤바꾼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맥베스가 왕이 된다”는 예언은 의지와 다짐, 스스로의 선택으로 끝모를 야망을 향해간다.

김덕희 서울시뮤지컬단 단장은 “셰익스피어 비극을 음악극으로 재해석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며 “많은 사람들에게 저마다 해석하고 바라보는 ‘맥베스’의 기준이 있기에 해석과 결말을 바꾼다는 것에 고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극본의 각색은 고전 재창작의 달인인 김은성 작가가 맡았다.

두 번째 시즌을 맞은 뮤지컬 ‘맥베스’는 특히나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등 현재 불안한 정국과 맞물려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원작이 담아내는 이야기가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무대는 ‘정치적 해석’을 하지 않지만, 작품의 두 주인공과 메시지는 정치 상황과 맞닿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현재의 분위기는 객석이 증명한다. 평일 저녁에도 꽉 채운 관객들의 연령대가 다양하다. 보통의 뮤지컬 공연에서 보기 힘든 중장년 관객들부터 10대 자녀들과 함께 관람하러 온 40대 가족도 적지 않았다. 남성 관객이 기존 뮤지컬보다 많다는 점도 특이점이다.

국내 최대 티켓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의 예매자 통계에 따르면 ‘맥베스’의 관람객은 전연령대에서 비슷한 비율로 나타난다. 30대가 23.7%로 가장 많았지만 40대 22.5%, 20대 18.3%, 50대 16.1%, 10대 13.9%로 상당히 고르다. 서울시뮤지컬단 관계자도 “공연장에 오면 이번 시즌에는 특히나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이 찾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다”고 말했다.

서울시뮤지컬단 ‘맥베스’ [세종문화회관 제공]


사실 맥베스는 실존인물이었다. 1040년부터 17년간 스코틀랜드를 이끈 국왕으로, 왕이 되기 전 스코틀랜드를 침입한 노르웨이와 아일랜드군을 물리친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욕망은 그를 전혀 다른 길로 이끌었다. 셰익스피어는 맥베스라는 인간의 삶에 대해 “그것은 바보가 들려주는, 음향과 분노로 가득한 아무런 의미 없는 이야기(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라고 했다.

뮤지컬은 쉴 새 없이 휘몰아친다. 원작의 세 마녀는 맥베스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환영(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두 아들)으로 달라졌다. 이들은 매순간 그의 욕망을 부추긴다. 하지만 맥베스의 욕망을 자극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로 그의 부인인 ‘레이디 맥베스’다. 뮤지컬에선 맥버니(이연경·유미 분)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운명이 사라진 자리엔 욕망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랐다. ‘왕이 되겠다’고 결심하자, ‘최고 존엄’을 향한 질주는 빠르고 과감했다. 특히나 이번 시즌은 대본과 음악은 초연 때와 같지만, 해석의 방향성이 크게 달라졌다. 신재훈 연출가는 욕망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맥베스와 맥버니가 느끼는 불안과 광기에 집중해 이들의 내면을 선명히 드러냈다.

한 때는 ‘뛰어난 장군’으로 난세를 수습했지만, ‘내가 왕이 될 상’이라고 확신하는 비대한 자아를 가진 맥베스와 그를 부추기며 조종하는 맥버니가 욕망을 삼켜가는 과정은 섬뜩하다.

맥버니는 첫 등장 이후 장장 5분간 뒷모습만 보였다. 맥베스가 전쟁터에서 승전고를 올리며 돌아온 날, 덩컨 왕은 맥베스에게 지방 영주 자리를 주고 자신의 아들 말콤에게 왕위를 내주는 과정을 지켜보는 내내 맥버니의 등은 파르르 떨렸다. 의도적 연출은 맥버니가 마침내 등을 돌려 관객과 마주할 때 빛을 발한다. 맥버니의 눈은 분노와 분노가 만들어낸 광기어린 욕망이 들어차고, 절로 일그러지는 입술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분투한다.

서울시뮤지컬단 ‘맥베스’의 맥버니 역할을 맡은 이연경 [세종문화회관 제공]


세습주의를 향한 분노는 권력을 향한 욕구로 발현된다. 그는 맥베스를 향해 “나약한 인간, 두려움은 지우라”며 칼자루를 들게 한다. 운명도 의지도 맥베스에게 ‘살인’을 점지하진 않았지만, 그는 오로지 ‘왕이 되겠다’는 야망으로 폭군의 길을 간다.

‘레이디 맥베스’(맥버니)는 원작과 뮤지컬을 좌지우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맥베스보다 더 큰 야심과 욕망의 화신으로 그려진다. 맥버니는 남편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살인’이라는 ‘왕권 찬탈’ 계획을 세우고, 맥베스를 조종해 ‘살인자의 길’로 몰아넣는다. 셰익스피어는 시대가 허락하지 않았던 ‘주체적 여성상’에 ‘권력욕’을 투영해 ‘인간의 본성’을 말한다. 성별을 떠나 노골적인 욕망은 악(惡)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다.

맥베스와 맥버니는 늘 계단 위에 올라서 있다. 눈부시게 빛나는 왕관을 쓰고, 찬란한 망토를 걸치고 ‘최고 존엄’의 자리를 만끽한다. 마침내 움켜진 권력을 시시각각 확인하며, ‘권력 도파민’에 취한다. 맥버니와 맥베스가 무거운 왕관과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한 망토를 하나씩 벗으며 부르는 노래는 소름끼치고 허망하다.

“왕관은 왜이리 무겁고 난리야, 까딱 잘못하면 목 부러지겠다(중략) 황금 목걸이, 다이아몬드 반지, 사파이어 귀걸이와 은팔찌 주렁저렁 온 몸이 너무 무거워(중략) 무겁고 불편한 것 쯤이야. 벗으면 다시 입고 싶어. 너무 좋아 그래서 더 겁나. 너무 신나서 다 없어질까 두려워~.” (‘왕관이 이렇게 무거운줄 몰랐어.’ 중)

서울시뮤지컬단 ‘맥베스’ [세종문화회관 제공]


권력 도취의 끝은 ‘파멸’이다. 그 과정으로 향하는 길에서 두 주인공의 감정 변화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들의 감정선만 따라가도 극의 기승전결이 읽힐 만큼 대본으로 섬세하게 표현했고, 배우들은 온몸으로 연기했다. 미치광이처럼 권력에 취해 낄낄거리다가도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 하고, 자신들이 죽인 망령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좀먹는다. 맥버니의 감정과 광기를 보여주는 서울시뮤지컬단 단원 이연경의 연기와 노래는 눈과 귀를 뗄 수가 없다. 단연 압도적이다.

셰익스피어의 시적 언어를 뮤지컬의 화법으로 치환한 대본 곳곳엔 운율이 묻어있다. 인물들의 감정 변화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절묘하게 표현했다. 홀수박의 불규칙한 ‘죽음의 왈츠’는 맥베스와 맥버니의 몰락과 파멸을 보여주는 데에 안성맞춤이었다. 불안과 두려움에 끝끝내 미쳐버리는 맥버니는 끔찍하다. 몽유병에 걸려 손과 몸을 문지르다 핏자국을 보고 피비린내를 맡는다.

“시퍼런 피 제발 지워져라, 내 손에 왜 문신처럼 새겨졌나, 폭포처럼 쏟아지는 끝없는 피, 이 세상을 뒤덮은 검붉은 저주 (중략) 제발 좀 사라져라 지워져라, 씻어져라 없어져라,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맥베스’ 넘버 ‘아무리 씻어도 씻을 수 없어’ 중)

역사는 반복된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과거의 이야기에 오늘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권력욕과 권력 남용이 불러온 결과는 이미 수세기 전 고전에서도 꼬집었다. ‘셰익스피어의 나라’ 영국의 더 타임스는 “김건희 여사를 한국의 레이디 맥베스”로 비유했다. 맥베스의 모습에서도 대한민국 대통령의 모습이 중첩된다.

파멸의 길을 가면서도 부부에겐 양심도 반성도 없다. 오로지 권좌를 지키기 위해 맥베스는 더 무자비하게 ‘폭군의 길’을 걷는다. ‘절대권력’을 가진 자의 광기와 권력 남용은 스스로를 자멸의 길로 이끌고, 민중의 증오와 저항을 부른다. 그럼에도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거세된 양심과 상식, 실종된 정의와 도덕의 결과를 보여준다.

뮤지컬에선 빠졌지만 원작 속 “약간의 물로 우리는 이 행위를 씻을 수 있다”는 레이디 맥베스의 대사는 처참한 인간성을 보여준다. 피묻은 손을 씻을 수 있다는 자위는 망상에 가깝다. 역사는 반복되나, 시대는 언제나 오늘을 기억한다.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