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 설치된 윤석열 대통령 지지화환이 쓰러져 있다. 이영기 기자. |
[헤럴드경제=김광우 기자] “이게 다 뭐냐, 뭘 잘했다고!”
20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 사거리. 길을 지나던 한 중년 남성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동행하던 여성이 남성을 말렸다. 인근 경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곤 남성에 속삭였다. “조용히 해.”
이들을 곤란하게 한 건 바로 거리를 가득 메운 화환들. 실제 현장엔 약 500미터 남짓 거리에 얼핏 봐도 수백개는 될 법한 화환이 줄지어 있었다.
화환, 꽃이다. 그런데 비밀이 있다. 여기 대통령실에 이런 화환이 배달되기 시작한 건 지난 11일. 벌써 10일 가량 지났다. 그런데, 결코 시들지 않는다.
바로, 이 꽃들은 말 그대로 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더 냉정히 얘기하면, 일회용 플라스틱 쓰레기들이다.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된 조화들이다.
플라스틱이지만 재활용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러 화학물질이 합성된 탓이다. 각종 경조사에 쓰이는 것도 모자라, 이젠 정치적 이유로까지 수백개의 화환이 경쟁적으로 남발되는 현실이다.
20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 화환. 멀쩡한 조화 사이로 시든 꽃이 보인다. 김광우 기자. |
환경부에 따르면 화환은 국내에서만 연간 약 700만개가 소비된다. 해당 수치는 장례식과 결혼식에 사용된 것만 추산한 결과다. 시위·집회 등 여타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늘어난 것을 고려하면, 전체 규모는 700만개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지난 주말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의결된 이후, 당론으로 탄핵을 반대한 국민의힘 의원 사무실, 당사무실 등에는 근조 화환 배송이 이어지고 있다. 정치계뿐만 아니다. 아이돌 팬들이 연예 기획사의 행보에 반발하는 의미로 근조 화환을 배송하는 현상도 벌어진다.
이렇게 쓸모를 다한 화환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화환이 재사용되는 비중은 20~30% 정도. 그마저도 3~4회 사용되고 버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700만개 중 500만개 가량이 버려지는 셈이다.
추모가 끝난 후 쏟아진 플라스틱조화 쓰레기들. [김해시청 제공] |
화환에 사용되는 꽃들 대부분은 중국에서 수입된 조화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경조사에 흔히 사용되는 3단 축하 화환의 평균 80%, 근조 화환의 평균 30%가 조화로 구성된다. 전체가 조화로 구성된 상품도 적지 않다. 대통령실 앞 응원 화환들에서 시든 꽃을 찾기 어려운 이유다.
재활용도 쉽지 않다. 중국산 조화의 주 소재는 플라스틱. PE·나일론·PVC 등 합성 소재로 만들어진다. 사실상 분리배출이 힘들어 일반폐기물에 해당한다. 수거된 이후 소각되거나 매립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조화에 더해 플라스틱 소재의 지지대 등도 재활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20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 화환들이 한 곳에 쌓여 있다. 김광우 기자. |
길거리에 설치된 시위 화환의 경우 처리가 더 어렵다.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은 자체적인 처리 구조를 갖춘 경우가 많다. 전문 업체가 이를 수거해, 지지대는 그대로 사용하고 꽃을 새로 달아 사용하기도 한다. 이 경우 꽃 외 기타 쓰레기는 절감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보낸 시위 화환은 주체가 명확하지 않다. 길거리 특성상, 제품 전체가 훼손되며 지지대까지 사용이 불가능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주문자를 추려내 수거를 요구하는 것만 해도 상당한 시일이 소요된다. 이에 지자체가 세금을 들여 처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20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 거리에 대통령 응원 화환들이 놓여 있다. 김광우 기자. |
업계에서는 지난 2020년부터 ‘화환 재사용 실명제’가 시작되며 화환에서 조화를 사용하는 비중이 더 늘었다고 보고 있다. 이전에는 화환 업체가 사용된 화환을 수거해, 리본만 갈아 재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관련해 소비자 불만이 커지자 법 개정이 이뤄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재사용한 화환이 특정한 표시 없이 유통될 경우 최대 10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하지만 인증을 통해 재사용 제품을 판매하는 업체는 많지 않았다. 특별한 날 사용되는 특성상, 재사용에 대한 소비자 선호가 유독 낮기 때문이다.
문제는 조화가 재사용 규제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 관련법에 따르면 재사용 인증 표기 제도는 생화에만 적용된다. 조화는 상품 재사용에 따른 상품 훼손도 적다. 오히려 조화를 사용해 불법 재사용을 지속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얘기다.
온라인 화환 판매업체 관계자는 “조화를 사용하면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진다”면서 “조화를 재사용할 경우에는 재사용 단속에도 걸리지 않으니까 더 나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에서 사용되는 화환 중에서 생화만 있는 건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생화로만 만들어진 신화환 모습.[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제공] |
일각에서는 근본적으로 생화 화환을 사용하는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탄소 배출을 줄이면서도, 국내 원예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다.
농식품부는 3단 화환보다 크기가 작은 대신, 생화만을 사용하는 ‘신화환’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예식장·장례식장 중 희망하는 곳에 신화환을 설치할 수 있는 지지대를 별도 공급하고, 파쇄기를 지급하는 등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이 외에도 쌀화환 등 조금 더 환경친화적인 상품들을 대체품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쌀화환은 꽃 대신 쌀이 든 포대를 사용해 실용성을 더한 제품이다.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쌀화환이 놓여 있다.[연합] |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에서도 조화 화환을 제한하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수원시는 지자체가 운영하는 연화장 장례식장에 3단 근조화환 반입을 금지하고, 100% 생화로 만든 ‘신화환’만 반입을 허용하고 있다. 부산시와 창원시 등 지자체도 일부 장례식장에 3단 화환 반입을 금지했다.
박정음 서울환경연합 활동가는 “화환이 시위 집회의 수단으로 바뀌고 있지만, 쓰레기가 회수돼 재사용되거나 하는 사례는 거의 없는 상황”이라면서 “화환 자체가 쓰레기를 배출하는 구조다 보니, 쌀화환으로 대체하는 등 문화가 전반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