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지원·정책금융 공급 등 환영하나
정작 산업 판도 바꿀 빅딜 카드 빠뜨려
“결국 기업이 알아서 결단을 내리란 건데, 시장 판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정부가 23일 내놓은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놓고 업계에선 연구개발(R&D), 정책자금 투입 등 다양한 지원이 담겼다면서도 “현 상황을 뒤집을 파격은 안 보인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특히 일각에서 필요성을 거론한 정부 주도의 강력한 산업 재편 방안은 빠지고, 자율적 재편을 뒷받침하는 수준이란 점에서 아쉬움이 나온다. 산업 패러다임을 바꿀 ‘한 방’은 쏙 빠뜨린 채, 결국 기업 차원의 재편·자구 노력에 공을 넘긴 셈이다.
정부 지원안의 주요 내용을 보면, 설비투자나 연구개발(R&D) 운영자금 등에 대해 저리대출을 해주는 방식으로 총 3조원 규모의 정책금융을 공급하기로 했다. 또한 공장 가동이 멈추고 있는 전남 여수시 등을 ‘산업위기 선제 대응지역’으로 지정하는 방안 검토, 공정거래위원회 사전컨설팅 지원에도 나선다. 기업활력법에 따른 사업재편 기업 인센티브 강화, 고부가가치 제품으로의 포트폴리오 전환을 위한 R&D 지원도 추진한다.
이와 관련해 업계에선 체질 개선에 도움이 되는 R&D 지원, 당장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정책금융 등에 대해 긍정적인 평을 내렸다. 다만 산업 위기 판도를 바꿀 강력한 구조조정 방안은 없단 점에서 한계를 지적했다. 이번 정부 발표는 4월부터 민관 협의체 논의를 통해, 정부와 업계 간 공감대가 미리 형성된 내용이다. 특히 정부 주도 구조조정이 실패로 돌아온 사례가 있는 만큼, 일찌감치 사업 재편은 철저히 기업 몫으로 남기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정부는 인위적 구조조정에 대해 줄곧 선을 그었고, 예상대로 이번 발표에는 공정거래법상 독과점 규제를 한시 유예하는 조치 등이 빠졌다. 국내 업체 간 규모 있는 사업 매각·인수는 시장점유율이 독과점 기준에 걸리면 불가능한데, 사업재편 규제 장벽을 낮추는 수준으로는 사실상 역부족인 상황이다. 결국 업계의 공격적인 구조개편 없이는 정부 대책도 실효성을 잃는데, 각사의 상황이 서로 다르다보니 재편 움직임이 부진할 수 있단 우려도 나온다. 한 관계자는 “회사마다 구조조정 필요성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며 “상대적으로 석화사업 비중이 낮은 회사는 ‘빅딜’이 그리 절실하지는 않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정부 주도의 파괴적 혁신이 물 건너가며 결국 기업들은 ‘각자도생’으로 시장에 대응한단 방침이다. 단기 극약처방보다는 경쟁력 강화를 통한 근본 체질 개선이 대전제다. 국내 석화업계는 그간 대규모 나프타분해시설(NCC) 설비에 값싼 원료를 투입해 수출을 확대하는 구조로 성장해왔는데, 중국·중동 등 후발국의 대규모 설비 증설에 따라 이런 구조는 경쟁력을 잃은 상황이다.
국내 NCC는 울산, 여수, 대산 3개 석화산단에서 운영 중인데, 글로벌 NCC 대비 설비규모, 운영효율성 측면에서는 아직 경쟁력이 있다고 평가된다. 다만 증설을 주도하는 주요국들의 경쟁력을 고려하면, 기업들의 비용절감 자구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이미 기업들은 범용 석유화학사업 비중 축소, 신사업을 통한 포트폴리오 다양화 등을 공통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주요 NCC 기업들의 사업 규모 축소도 이어지고 있다. LG화학은 현재 NCC 2공장 매각을 위한 최종 협상을 진행 중이며, 롯데케미칼은 해외 법인 지분 매각에 이어 최근에는 말레이시아 합성고무 생산 법인(LUSR) 청산을 결정했다. 고은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