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증시 쏠림에 코스피 개인 수급 역대급 저점
‘26.5兆 순매수→23.9兆 순매도’ 냉·온탕 오간 外人 팔자세 지속 여부 주목
“내년 환율 ‘상저하고’…빠른 경기·수출 회복 중요”
[챗GPT를 사용해 제작함, 게티이미지뱅크, 신동윤 기자 제작] |
[헤럴드경제=신동윤 기자] #. 직장인 정수인(39) 씨는 지난 3월께부터 ‘국내 주식 80%, 미국 주식 20%’ 수준이던 자신의 주식 계좌 포트폴리오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우선 정 씨는 삼성전자를 비롯해 기존 보유 주식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주요 국내 대형주의 비중을 줄여 미국 증시에 상장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나스닥 지수 추종 상장지수펀드(ETF)에 대한 매수에 적극 나섰다. 개별 종목의 경우에도 테슬라를 비롯해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구글 등 ‘매그니피센트7(M7)’으로 불리는 빅테크(대형 기술주) 종목들을 집중적으로 매수했다. 이 결과 자산 배분 구조는 연말까지 ‘국내 증시 50%, 미국 주식 50%’ 수준까지 바뀌었다는 게 정 씨의 설명이다. 정 씨는 “국내 증시에 투자해 아무리 기다려도 주가가 오르지 않아 힘들어할 바엔 22% 양도소득세를 물더라도 확실히 우상향 곡선을 그리는 미국 주식 비중을 높이는 것이 합리적인 투자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2025년 을사년(乙巳年) ‘푸른 뱀의 해’를 앞둔 국내 증시는 시작도 전부터 ‘파란불’이 들어온 모양새다. 외국인 투자자의 역대급 ‘코리아 엑소더스(국내 증시 대탈출)’ 현상이 벌어지는 동시에, 그동안 국내 증시를 떠받치고 있던 ‘동학개미(국내 증시 소액 개인 투자자)’까지도 코스피·코스닥 시장 대신 미국 증시나 가상자산 등으로 눈을 돌리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투자 주체들의 국내 증시 외면 현상이 심화할수록 수익률 곡선의 지지부진한 흐름이 계속되고, 외국인·개인 투자자 등이 이에 실망해 이탈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내년에도 이어질 수 있단 우려가 투심을 짓누르는 분위기다.
1일 한국예탁결제원 증권정보포털 세이브로(SEIBro)에 따르면 지난 26일 기준으로 국내 투자자의 올해 미 증시 거래액(매수+매도액)은 4997억7185만달러에 달했다. 닷새가 남은 상황 속에 연간 기준 미 증시 거래액 ‘5000억달러’ 시대가 사실상 올해 개막한 셈이다. 지난해 말(2732억646만달러) 대비 82.93% 늘어난 수준으로, 애초 연간 기준 최대치를 보였던 지난 2021년(3700억4650만달러)보다도 35.06% 웃돈 액수다.
올해 해외 증시에 대한 국내 투자자의 총거래액(5202억9691만달러) 중 미 주식의 비율은 96.06%로 1년 전(94.87%)보다 1.19%포인트나 높아지며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주식뿐만 아니라 채권에서도 개미들의 해외 진출 흐름이 뚜렷했다. 미 채권의 경우 올해 연간 순매수액이 77억5144만달러로 역대 최대치였고, 총거래액도 219억8988만달러로 지난 2019년(286억4338만달러) 이후 두 번째로 컸다.
이런 흐름 속에 개인 투자자의 해외주식 보관액도 연일 ‘역대 최대’ 기록을 경신 중이다. 지난 24일 기준으로는 전년 말(1041억8835만달러) 대비 57.72% 증가한 1643억2156만달러까지 늘어나면서다.
문제는 해외 증시, 특히 미국 증시를 향한 개미들의 ‘투자 이민’ 증가세는 자연스럽게 국내 증시의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코스피 시장의 개인 투자자 수급이 역사적 저점을 찍고 있다는 점이 문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헤럴드경제가 한국거래소(KRX) 정보데이터시스템을 활용해 월별 코스피 거래액 중 개인 투자자 비율을 분석한 결과 12월엔 44.31%로 지난 2019년 12월(43.36%) 이후 5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내려앉은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 투자자의 코스피 월별 일평균 거래액을 지난 26일 종가 기준으로 분석했을 때도 12월엔 11조4541억원으로 올해 연중 최저치는 물론, 작년 11월(11조3325억원) 이후 13개월 만에 최소치를 기록했다.
원/달러 환율이 장중 1,480원대를 돌파한 지난 27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현황판에 원/달러 환율 등 지수들이 표시되고 있다. [연합] |
국내 증시 엔진의 동력도 어느 때보다 약해진 상황이다. KRX에 따르면 26일 종가 기준으로 올해 코스피 연간 상장주식 회전율은 188.84%로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지난 2010년 이후 가장 낮은 값을 기록했다. 코스닥 역시도 올핸 430.11%로 지난 2014년(399.39%) 이후 10년 만에 최저치였다.
상장주식 회전율은 일정 기간의 거래량을 상장주식 수로 나눈 값이다. 회전율이 높다는 것은 투자자들의 주식 시장에 관한 관심이 높아 ‘손바뀜’이 활발하게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올해 들어 국내 증시에서 회전율이 역대급 최저치에 머물렀다는 것은 투심이 어느 때보다 식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외국인 투자자의 경우 상반기 기록했던 역사적 순매수세가 하반기 들어선 역사적 수준의 순매도세로 전환하며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국내 증시 전문가들은 짚는다.
종가 기준으로 코스피 지수가 연고점을 기록했던 지난 7월 11일(2891.35포인트)까지 외국인 투자자의 코스피 연간 순매수액은 26조4967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지난 26일까지 외국인 투자자는 180도 표정을 바꿔 23조8895억원어치의 국내 주식을 내다 팔았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올 초 기대했던 글로벌 반도체 경기 회복세가 예상보다 더딘 데다, 과거보다 훨씬 짧게 마무리될 수 있단 예측이 이어졌던 ‘반도체 업사이클’의 지속 기간이 실제로 짧게 나타났다 볼 수 있다”면서 “올 상반기 주가 상승세를 견인했던 ‘시가총액 1위’ 삼성전자가 인공지능(AI)용 반도체 고대역폭메모리(HBM) 경쟁에서 뒤처진 채, 주력 부문인 레거시(범용) 메모리 반도체에서도 중국발(發) 저가 공세에 시달리며 수익이 예상에 크게 미치지 못한 점 등은 외국인 투자자의 강력한 이탈세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재등장이 수출 산업 중심의 한국 경제 둔화 위험성을 가중할 수 있다는 우려 속에 지난 3일 터진 ‘비상계엄 사태’는 외국인 투심에 결정타를 날렸단 평가도 이어진다. 한 외국계 자산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투자자가 악재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불확실성’”이라며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이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에 대한 탄핵까지 진행되는 정치적 혼란상에 대해 투자자들의 우려가 상당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연말에 이어 내년 상반기까진 올 초 국내 시장에 대거 유입됐던 자금이 중화권 증시로 빠져나갈 가능성에 대해서도 집중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또 다른 증권사 고위 관계자는 “외국계 ‘큰손’ 투자자들의 경우 ‘비상계엄 사태’ 이후 아시아권 신흥시장(EM)에 대한 내년도 국가별 투자 비중을 조정할 때 불확실성이 극대화한 한국 시장에 대한 비율을 하향 조정하는 문제를 두고 진지하게 논의 중인 곳도 있는 것도 안다”면서 “올해 초 중국 경기 침체 장기화에 따른 증시 침체를 피해 국내 증시로 몰려왔던 외국계 자본이 국내 정치·경제적 여건의 불안이 장기화할 경우 경기 부양책이 본격화할 중국으로 되돌아갈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당장 내년 상반기까지 국내 증시에 영향을 미칠 가장 큰 하방 압력은 ‘원화 약세’ 현상에 따른 원/달러 환율 급등세가 꼽힌다.
연말을 맞아 작은 수급에도 변동성이 높아지면서 원/달러 환율은 지난 27일 장중 1480원을 상회했다. 외화보유고가 4000억달러를 넘는 데다, 금융당국이 적극적으로 대처에 나서는 상황에서도 지난 1997~1998년 ‘IMF 외환위기’, 2007~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까지 원/달러 환율이 치솟는 것에 대한 우려도 갈수록 증폭되는 분위기다.
전규연 하나증권 연구원은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하 속도 조절 시사 속에 환율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내년에 1500원대도 열어둘 필요가 있다”면서 “내년 원/달러 환율의 경로는 ‘상고하저(上高下低)’의 움직임이 전개될 것으로 예상하나, 원화의 대내외 취약성과 미국 예외주의 지속, 무역분쟁 리스크 등을 고려할 때 시점은 다소 지연될 수 있어 보인다”고 내다봤다.
이 경우 ‘환차손’ 탓에 국내 증시에 대한 매력도가 떨어진 외국인 투자자의 탈출 속도는 더 빨라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진다.
환율과 동시에 내년도 국내 증시가 맞이한 최대 리스크로는 국내 주식으로 대표되는 원화 투자 자산에 대한 신뢰성 저하가 꼽힌다. 신중호 LS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외국인 이탈뿐만 아니라 미국 증시나 가상자산 등으로 떠나가 버린 개인 투자자의 이탈이 국내 증시 부진의 주요 요인”이라며 “국내 증시의 지속 가능한 수익 실현 가능성에 대한 개인 투자자의 손상된 신뢰도가 단기간 내 회복되기 어려운 국면이라는 점도 국내 증시가 회복을 위해 넘어야 할 큰 산”이라고 꼬집었다.
부산 남구 감만·신감만부두 야적장에 수출입 화물이 쌓여있다. [연합] |
2025년 국내 증시가 반등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은 한국 경제의 회복 탄력성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증권가에서 나온다. 최근 둔화 추세가 뚜렷한 수출 경기와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등이 ‘바닥’을 찍고 반등하는 모습을 보이는 시점이 빠르면 빠를 수록 외국인·개인 투자자의 국내 증시 복귀 시점이 빨라지고, 증시 반등의 모멘텀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호정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미국 관세 정책에 대한 기업들의 우려가 애초 시장의 우려보다 덜하단 조사가 있다”면서 “특히, 수출 경기 회복의 키워드를 쥐고 있는 ‘반도체’ 섹터에선 미 관세 정책 영향이 제한적이란 응답이 절반에 가깝다(47.6%)는 점이 눈여겨 볼 지점”이라고 짚었다.
신중호 센터장은 “오는 2025년 1분기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동시에 미국의 새로운 관세 정책과 산업별 압박 수준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시급한 대책 마련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반도체를 비롯해 주요 산업 섹터별로 수출 반등 등의 모멘텀이 2분기를 넘어서며 확인될 경우 개인·외국인 투자자의 국내 증시 복귀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