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정책만으로 경제안정 한계”
금리인하엔 가계빚 들어 ‘신중론’
崔대행 재판관 임명 ‘불가피한 결정’
이창용(사진) 한국은행 총재가 복합적인 대내외 리스크에 통화정책만으로는 경제를 안정시키기 어렵다며, 창조적 파괴를 가로막는 규제를 속히 걷어내 신산업 개발을 위한 근본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2일 신년사를 통해 “슘페터가 자본주의의 핵심동력으로 강조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는 창조만큼이나 파괴에 방점이 찍혀 있는 말”이라며 “혁신 기업의 탄생에는 혁신에 성공하지 못한 기업의 퇴출이 수반된다”고 밝혔다.
조지프 알로이스 슘페터가 고안한 ‘창조적 파괴’는 그가 쓴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란 책에서 정립된 개념이다. 기술의 발전은 결국 기존 기술체계를 부수고, 새로운 체계를 쌓아가는 과정이란 주장이다.
이 총재는 “우리 경제에 신성장 기업이나 산업이 부족한 것은 창조적 파괴 과정에 수반되는 사회적 갈등을 관리하기보다 안정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회피해 왔기 때문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과 미국의 매출액 상위 15대 기업을 10년 전과 비교하면 미국은 7개 기업이 신규로 진입한 반면 우리는 2개 기업만이 바뀌었는데, 이는 지난 10여 년간 미래 수출을 이끌어가야 할 신산업이 개발되지 못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이 총재는 경고했다.
특히 “경제 부문 만큼이라도 혁신을 제한하거나 기득권을 보호해 창조적 파괴를 가로막는 규제들을 하루 속히 걷어내야 할 것”이라며 “신산업 육성과 규제 완화를 통해 새로운 기업이 생겨나고 성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밸류업은 공허한 구호에 그칠 위험이 있다”고 역설했다.
이 총재가 이처럼 규제 혁파에 목소리를 높인 것은 통화정책만으로는 안정적인 경제 시스템 구축에 한계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 총재는 “물가·성장·환율·가계부채 등 정책변수 간 상충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돼 경제 흐름 변화에 금리인하 속도를 유연하게 결정할 것”이라면서도 “현 상황에서 통화정책만으로 우리 경제를 안정시키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우려에는 국내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국정 컨트롤타워가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로 확대된 점도 담겨 있다.
이 총재는 통화당국이 금리 인하에 있어 가계부채를 과도하게 인식한다는 비판에 대해 “지난 18년간 가계부채는 부동산 대출과 밀접하게 연계돼 꾸준히 늘어났다”며 “(금리를 인하하면) 당장의 경기둔화 고통을 줄이고자 미래에 다가올 위험을 외면해 왔던 과거의 잘못을 반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경기를 고려해 비부동산 가계부채 및 비수도권 부동산 대출에 대한 미시적 조정을 검토할 수는 있겠지만, 가계부채 증가율을 명목국내총생산(GDP) 성장률 내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거시건전성 정책 기조는 흔들림 없이 유지돼야 한다”고 못박았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은 2%까지 낮아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2040년대 후반에는 0%대까지 떨어질 수 있다”면서도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 위기와 같은 상황으로 보는 것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부연했다.
이에 “2%를 밑도는 성장률의 절대 수준만을 과거와 비교하면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고통을 줄여주는 진통제로만 사용한다면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며 “단기적인 부양과 함께 고통스럽더라도 구조조정 문제에 집중해서 중장기적으로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헌법재판관을 임명한 것을 두고 이 총재는 “대외 신인도 하락과 국정공백 상황을 막기 위해 정치보다는 경제를 고려해서 어렵지만 불가피한 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최 권한대행의 이번 결정으로 “우리 경제 시스템이 정치 프로세스와 독립적으로 정상 작동할 것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홍태화 기자